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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17 00:01:19

에케렌 전투



파일:800px-Constantijn_Francken_-_Battle_of_Ekeren.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3.2. 네덜란드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3년 7월 30일 벨기에의 앤트워프 인근 에케렌에서 프랑스군과 네덜란드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이 승리했다.

2. 배경

1702년 5월 15일, 영국과 네덜란드는 플랑드르에 공세를 개시한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플랑드르 방면을 맡은 프랑스군 원수 부플레르 공작 루이 프랑수아는 영국 원정군이 합류하기 전에 네덜란드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크산텐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네덜란드군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군이 라인강 방면의 카이저베르트를 포위 공격하자, 루이 14세는 탈라르 공작 카미유 도스튄에게 13,000명의 병력을 보내 네덜란드군을 요격하게 했다.

6월 초, 부플레르 공작은 클레베로 진군해 네덜란드군을 압박했다. 이에 네덜란드군은 네이메헌으로 후퇴해 그곳에서 민병대를 동원하여 프랑스군과 대치했다. 이때 네덜란드의 기술장교 메노 판 쿠호른이 민병대를 조직해 플랑드르 서부로 진격했다. 프랑스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회군시켜야 했고, 자연히 카이저베르트에 주둔한 프랑스군의 전력이 약화되었다. 이윽고 1702년 6월 30일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이 이끄는 영국군이 도착했다. 말버러 공작은 영국-네덜란드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뒤 플랑드르와 카이저베르트에 분산 배치된 프랑스군을 공격하기 위해 프랑스군 본대에서 10km 떨어진 뫼즈강 인근의 그라브로 이동했다.

뒤늦게 적군이 근처까지 왔음을 깨달은 부플레르 공작은 7월 26일 적군이 뫼즈강을 건너오자 펜로와 루르몬트 방면으로 후퇴했다. 8월 2일 말버러의 선봉대가 적군과 교전해 가볍게 격파했지만 도주하는 적을 따라잡는데 실패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라인강 하류로 후퇴했고, 카이저베르트에 주둔하고 있던 탈라르 공작은 급히 소환되었다. 말버러 공작은 적이 지리멸렬해진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해 1702년 10월 말 리에주를 공략했다. 게다가 루이 14세는 신성 로마 제국군이 9월 중순에 란다우 요새를 공략하고 라인강 방면으로 밀어붙이자 부플레르 원수에게 라인강에 병력을 파견하라고 지시해 가뜩이나 적보다 열세한 병력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던 부플레르 공작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듬해인 1703년 5월 3일, 말버러 공작은 본을 공격했다. 본의 프랑스군은 12일 동안 버텼으나 5월 15일 항복했다. 이후 말버러 공작은 오스텐더와 앤트워프를 공략하거나 프랑스군과 결정적인 회전을 벌이고 싶어했다. 그는 네덜란드 장군 멘노 반 쿠호른에게 오스텐데로 진군해 포위하라고 지시했고, 네덜란드의 반 스펜러 장군에게는 앤트워프 서쪽으로 진군하라고 지시했으며, 제이콥 반 바세네어 오브담 장군에게는 베르헌옵좀에서 남쪽으로 진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본인은 리어로 진군하기로 했다.

6월 28일, 오브담 장군의 네덜란드군은 베르헌옵좀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다음날 앤트워프에서 북쪽으로 7km 떨어젠 에케렌에 이르렀다. 적의 이같은 움직임을 탐지한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은 지원 병력을 파견해 앤트워프의 수비대를 지원하게 했다. 또한 부플레르는 6월 30일 안트르베펜에 입성한 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에케렌으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에케렌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네덜란드군

4. 전투 경과

6월 30일 아침, 부플레르 공작이 급파한 프랑스 용기병 부대는 회베넨 근처에 자리를 잡고 네덜란드군이 브레다와 베르헌옵좀으로의 퇴각로를 차단했다. 이와 동시에, 베드라므 후작 휘하 스페인 분견대는 윌마르스동크 근처에 배치되었다. 이리하여 네덜란드구는 사방에서 4:1의 전력으로 포위되었다. 얼마 후 프랑스 용기병들을 발견한 네덜란드 척후병들이 급히 이 사실을 알리자, 오브담 장군은 즉시 그의 기병대를 회베넨으로 파견해 이들을 격퇴하게 했다. 그러나 프랑스 용기병들은 이를 거뜬하게 격파했다. 오브담은 가까운 마을인 무스브로에크를 점거하려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그 후 프랑스군이 공세를 개시했고, 네덜란드군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을 상대로 하루 종일 맞서 싸워야 했다.네덜란드군은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자질이 우수한 하급 장교들은 독자적으로 휘하 병력을 이끌고 대응책을 신속하게 마련해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이는 적을 상대로 선전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탄약이 고갈되면서 더이상 저항할 여지가 사라졌다.

오후 8시 경, 오브담은 병사들을 저버리고 브레다로 도망쳐 버렸다. 이에 부지휘관인 슐란겐베르크 남작 프레드릭 요한 반 베르가 대신 병사들을 지휘했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후방에 위치한 오르드렌을 공략해 퇴로를 확보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부관 프리즈하임 장군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물살을 헤치며 강을 도하해 프랑스군의 측면을 습격했다. 네덜란드는 장 시간 사투를 벌인 끝에 오르드렌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네덜란드군은 어둠이 깔려 적이 전투를 중단한 틈을 타 아군이 장악하고 있는 리요 요새로 퇴각했다. 이리하여 에케렌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군은 에케렌 전투에서 23명의 장교와 597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66명의 장교와 731명의 병사가 부상당했다. 스페인군은 9명의 장교와 482명의 군인이 사망했으며, 43명와 장교와 292명의 병사가 부상당했다. 반면 네덜란드군은 1717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부상당했으며 694명이 실종되었다. 또한 야포 6문와 보급마차 150대가 프랑스군에게 넘어갔다. 오브담 장군은 이 전투 이후 아군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불명예를 짊어졌고 다시는 전투에 관여하지 않았다. 반면 부플레르 공작은 적을 포위해놓고도 섬멸시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