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마사회 연도대표마 {{{#!wiki style="margin:0 -11px -5px;color:#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or:#000000; word-break: keep-all" | 최다우승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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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 잡지 '굽소리'에 실린 에이원의 상상화. 에이원의 실물 사진은 전해지지 않는다. | ||
이름 | 에이원 A ONE | |
출생 | 1965년 | |
죽음 | 1974년 6월 8일(9세) | |
마번 | 없음 | |
성별 | 암컷 | |
털색 | 밤색 | |
아비 | 알 수 없음 | |
어미 | 알 수 없음 | |
성적 | 공식:50전 46승 비공식:90전 72승[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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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경주마. 70년대 초중반 동시대의 경주마들을 아득히 뛰어넘은 능력을 선보이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명마이다.한 해에만 25전 전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비공식 한국 경마 최다 연승마이며,[2] 동시에 뚝섬 수몰에 의한 자료 소실로 관련된 정보가 대부분 사라져버린 비운의 경주마이기도 하다.
2. 생애
에이원은 1969년 6월 4일 한국마사회가 호주에서 도입했던 35두의 경주마 중 한마리였는데, 에이원의 조교를 맡았던 김승길 조교사(金勝吉, 1932-2000)[3]에 의하면 좌측 앞다리의 발굽벽에 'A1' 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기에 이것을 그대로 마명으로 썼다고 한다.도입된 지 6개월 후 데뷔전을 시작으로 그해 2승을 거두었던 에이원은 1970년부터 점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1971년에 들어서자 마침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꽃피우기 시작한다.
2.1. 연승 행진
경마 에이원人氣(인기)최고┈8천人波(인파)몰려
당시 에이원의 인기를 실감케 하는 1971년 5월 24일자 경향신문의 기사. 에이원이 뛰었던 경주의 배팅총액 350만원 중 340만원이 에이원에게 걸렸다.
당시 에이원의 인기를 실감케 하는 1971년 5월 24일자 경향신문의 기사. 에이원이 뛰었던 경주의 배팅총액 350만원 중 340만원이 에이원에게 걸렸다.
우수한 마체의 밸런스와 추입력을 바탕으로 전술하였듯 1971년 25전의 경주를 치르고 전승하며 그해 최다우승마의 자리를 얻었으며, 마사회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스포츠 신문인 일간스포츠에선 1972년에 21연승, 73년에는 18전 15승으로 두 해 모두 최다 우승을 기록하였다는 기사가 쓰였을 정도로 문자 그대로 우승을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십세기, 제네바, 섬광, 나폴레온 등 당대의 강자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에이원에게는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나오는 경주마다 우승하다 보니 사람들의 흥미 저하를 우려한 마사회는 에이원의 연승을 막기 위해 부담 중량을 72kg 까지 늘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른 경주마들보다 100m 뒤에서 뛰게 하는 '부담 거리'까지 적용했으나,[4] 아랑곳하지 않고 연승을 이어가자 결국 하위 등급의 말들이 뛰는 경주에만 편성시켜 경주마 명목만 유지시켰을 정도였으니 당시 에이원의 강함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2.2. 죽음
1974년, 어느새 9세의 고령이 되었음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던 중 그 해 6월 8일에 산통으로 보건소에서 치료를 받다 죽었다. 죽기 직전에 갑자기 고삐를 끌고 나가 자신이 지내던 마방으로 갔는데, 마지막임을 직감한 조교사가 깔짚을 새로 깔아주자 그곳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사후 부검 결과 사인은 소장 부근에 생긴 종양으로 인한 장 협착으로 인한 산통으로 밝혀졌다.
3. 여담
- 현재 에이원의 실물이 찍힌 사진이 존재하지 않아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증언에 의하면 털색은 콧등의 길고 흰 유성을 제외하고 전부 밤색털로 덮여있었으며,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마체를 지녀 관계자들의 말문을 막히게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해당 항목에 올라온 건 그런 증언들을 모아서 만들어낸 상상화인 셈. 그나마 에이원의 이름과 분필로 적힌 배당판 사진 등은 남아있지만.
- 성격은 늘 온순하고 조용한 편이었으나, 항상 깔끔한 것을 좋아해서 자신의 몸에 티끌 하나 묻는 것도 싫어할 정도였으며 밥 먹을 때도 몸에 묻히는 법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별개로 식욕은 왕성해서 하루라도 운동을 거르면 체중이 불었다고.
- 당시 조직폭력배와 같은 암수(暗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조폭들의 회유와 압박은 기본에, 한번은 몰래 약물을 투여하려는 시도가 발각되어 아예 담당 조교사가 마방 앞에서 잠을 자며 지키기도 했다고 한다.
- 조교사와의 인터뷰에 의하면, 너무나 압도적으로 이기다보니 커리어 후반기 때에는 열심히 뛸 이유를 찾지못해 오히려 경쟁심이 점점 줄어들었고, 조교 때에도 제대로 능력 발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최고 속도로 달리게 하여 기합을 넣었다고.
- 부검으로 인해 확인된 또 하나의 사실로, 심장이 자기 체중의 1%를 훨씬 넘는 6kg 정도였다고 한다.
- 과천 서울경마공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외승길 언덕엔 매년 말위령제가 열리는 마혼비(죽은 경주마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한 비석)와 석탑이 있는데 이것이 당시 에이원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뚝섬에 처음 세워졌었다가 이후 과천으로 이전하면서 같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 비공식 기록의 경우, 마사회에서 홍보용으로 발행한 경주마 카드에 삽입된 정보를 기반으로 하였다.[2] 공식 기록으로만 따질 경우, 최다 연승마는 17연승의 미스터파크이다.[3] 뚝섬 경마장 시절 이름을 날렸던 기수이자 명조교사로, 1938년 진행된 제 2회 봄 천황상 우승마 '하세 파크'의 기수인 '김자근봉'(1903-1969, 나중에 '김승배'로 개명)의 아들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서울경마공원에서 활약했던 김학수 조교사의 어버지이기도 하다.[4] 다만 혹자는 이 부담 거리에 관한 부분이 기자의 오해로 인한 잘못된 정보라고 주장하기도 하니, 걸러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