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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4:33:34

에드워드 A. 크레이그

에드워드 A. 크레이그
Edward A. Craig
파일:1000140696.jpg
본명 에드워드 아서 크레이그
Edward Arthur Craig
출생 1896년 11월 22일
미국 코네티컷주 댄버리
사망 1994년 12월 11일 (향년 98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엘카혼
복무 미합중국 해병대
최종 계급 미국 해병 중장
복무 기간 1917~1951
학력 세인트존스 군사대학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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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코네티컷주 댄버리에서 태어났고 세인트존스 군사대학 ROTC로 졸업후 해병 소위로 임관했다.[1] 다만 임관종합평가과정에서 시력에서 불합격되었고 당시 해병대사령관 조지 바넷의 배려로 겨우 합격할 수 있었다. 초임 시절 참모로 시작했고 서부전선으로 가지는 않았다.

전후 아이티, 관타나모에서 복무했고 바나나 전쟁에 참가해 아이티, 도미니카에서 민병대와 전투를 치렀다. 대위로 진급 후 샌디에이고, 워싱턴주, 필리핀에서 복무했다. 중화민국 상하이, 니카나과에서도 복무했다.

1941년 군사경찰 소속이였으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제2해병사단 2공병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가 9해병연대 부연대장으로 부대를 훈련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대령으로 진급 후 제3해병사단 본부대 소속으로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르무엘 셰퍼드의 후임으로 9해병연대장이 되었고 과달카날 전역후반기에 들어와 전투를 치렀고 이후 부건빌 전역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 공으로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제2차 괌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이오지마 전투에도 참가해 훈공장을 받았다. 이오지마 이후 샌디에이고에 있는 해병교육단장으로 있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에도 샌디에이고에 있다가 중국, 괌에서 복무했다. 종전 후 기존 부대를 감편한 상황이였고 1947년 극동지역 해병신속대응부대인 제1해병임시여단이 창설되어 여단장이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의 빠른 남하속도로 인해 한국군과 미리 파견되어 있던 제24보병사단이 사실상 와해되어 지연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1개 해병사단을 요구했고 이에 가용사단이 없는 상황이라 괌에 있던 제1해병임시여단이 한국으로 투입되었고 본래는 상륙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였으나 낙동강 전선, 그 중에서 창녕, 영산 인근에 배치되어 북한군과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본국에서 제1해병사단이 재편성되는 기간동안 창녕일대를 사수했고 제1해병사단이 완편되어 한국으로 건너와 해산 후 편입되었다.[2] 크레이그 역시 제1해병사단 부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당시 그가 속해있었던 여단이 상륙의 선봉이 되어 공을 세웠다. 이 일련의 공으로 은성훈장을 받게 된다. 1951년 중장으로 예편했고 1994년 사망했다.


[1] 원래 육군을 지원했으나 해병대가 되었다.[2] 감편된 상황에서 급하게 파병된 제24보병사단과 달리 이미 완편되어 있었고 장비역시 퍼싱전차, 항공전대도 콜세어기, 헬기와 야간투시장비까지 갖췄고 급하게 훈련했음에도 1주일만에 파병되어 성과를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