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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53:12

에드가 자코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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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Jacobs(1904.3.30 ~ 1987.2.20)

본명은 에드가르 펠릭스 피에르 자코브(Edgard Félix Pierre Jacobs). 필명으로 이를 줄인 Edgar P. Jacobs를 주로 쓴다.

1. 개요2. 생애
2.1. 《U 광선》과 에르제와의 만남2.2. 블레이크와 모티머2.3. 그 밖에
3. 작가의 취향
3.1. 셜로키언3.2. 오페라
4. 가족관계5. 카메오6. 그 밖에7. 대표적인 작품

1. 개요

벨기에 브뤼셀출신의 오페라 성악가, 연출가, 만화가. 에르제를 이은 명료한 선 계열의 대표적인 만화가다. 프랑스-벨기에 만화(방드데시네)로는 블레이크와 모티머가 유명하다. 아독 선장의 모델이기도 하다.

2. 생애

자코브는 1904년 3월 30일에 브뤼셀에서 경찰인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2살 때 어머니까지 여의게 되어 고아가 되어 빵집 견습생으로 들어갔고, 여자 형제는 시장의 아내의 식모로 들어가는 등 집안 사정이 빈곤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경찰 공무원에 합격해서 중산층의 삶을 살 수 있었다.[1]

자코브는 어려서부터 미술과 오페라 쪽에 관심이 많았으나 부모는 위에서 말했던 가난했던 경험을 겪은 것도 있어서 아들이 예술 쪽에서 일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돈을 버는 직업을 가지길 원했기 때문에 억지로 상업학교에 진학하여 1919년에 그곳을 졸업했다. 그 때부터 자코브는 돈과 씨름하는 오피스 직종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어 그 쪽에서 절대 일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고 한다.

한편 자신의 흥미대로 남는 시간에 틈틈이 그림을 그리면서 음악이나 연극 연습을 하는 것에도 대단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 때문에 후에는 부업으로 오페라 극단에서 데코레이션을 하거나, 시나리오를 제작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엑스트라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특정 분야를 정말로 잘하지는 못하고 약간 골고루 잘하는 선에서 부업을 뛰었는데 단순한 부업이 아니라 가창 실력이 정말 뛰어나서 1929년에는 벨기에 정부에서 메달을 받았을 정도였다고.

하지만 이렇게 노래로 먹고 살 것 같았던 그는 만화가로 유명해졌고, 이러한 성공이 있기까지 역사의 굴곡에 의한 어려운 시기를 오랫동안 보내야 했다.

특히 금전운이 따르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문제였던 것은 세계 대공황 크리... 브뤼셀 예술계도 큰 타격을 받아서 이 때 고생을 꽤 많이 했다고 한다. 1919년부터 1940년까지 오페라 프로덕션에 들어가서 브뤼셀, 릴(Lille) 지역에서 바리톤을 맡아 연기하고,[2] 그림 그려서 작은 부수입도 벌어가면서 근근이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진심으로 성악하기를 좋아했고 어려서 사무직에는 절대 종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한 맹세를 지키겠다는 고집도 꺾지 않았다. 게다가 솔직히 성악 외에 마땅히 크게 내세울 만한 것은 없었던지라(...) 이런 그가 만화, 일러스트 쪽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벨기에의 잡지 《브라보》 편집장 자크 로디[3]의 지도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1946년까지 브라보에서 일하는데, 불행 중에 다행으로 이 때 자코브가 브라보 리뷰 코너에 그린 상업 일러스트레이션이 빛을 발하면서 잡지가 판매부수를 크게 상회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져서 벨기에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어 독일군정기가 시작되고, 이 때문에 미국 만화 수입 연재가 금지되어〈플래시 고든〉의 연재가 중단되자 자코브는 이를 이어서 그리는 역할을 맡게 된다. 단 그 시도도 몇 주 만에 독일에 의해 검열조치 당해 실패로 끝난다.(...)

2.1. 《U 광선》과 에르제와의 만남

이후 자코브는 플래시 고든에서 배웠던 창작 기법을 활용하여 1941년에 생애 최초의 만화 "U 광선"을 창작해 브라보에 연재한다. 중요한 것은 U 광선 자체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유명만화가 에르제땡땡의 모험을 흑백판에서 컬러판으로 개작하면서 스타일을 쇄신하려던 참이었는데 이 《U 광선》이 에르제 눈에 띄게 되었고, 자크 반 멜케베크의 소개로 자코브는 땡땡의 모험을 개작하는 데 참여하는 에르제의 조력자들 중 한 명으로 일하게 된다.

처음에는 "파라오의 시가" 개작 작업에 참여했는데, 큰 성공은 못했지만 이 후로 에르제와 친구가 돼서 콩고에 간 땡땡, 미국에 간 땡땡, 오토카 왕국의 지휘봉, 푸른 연꽃 개작 과정에서도 참여하게되고, 이어서는 유니콘 호의 비밀, 라캄의 보물, 7개의 수정구슬, 태양의 신전을 만드는데도 도움을 주었다고.

이렇게 땡땡 시리즈 개작 작업에 참여한 몫이 많아서, 자코브는 1947년에 에르제에게 땡땡의 모험 지분을 나눠갖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에르제가 땡땡이고 땡땡은 곧 에르제라며 거절(...). 그래서 한동안은 협력관계가 좀 삐그덕거렸다고. 하지만 에르제와 자코브는 여전히 친구로 지냈고, 그 덕에 《땡땡》 잡지에서 블레이크와 모티머도 연재되었다.[4]

2.2. 블레이크와 모티머

자코브가 유명만화가가 되기 시작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땡땡》 잡지에 셜록 홈즈 스타일의 만화인 블레이크와 모티머를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1946년에 레이몽 르블랑이 《땡땡》 잡지를 만들어서 에르제를 포함한 여러 만화가들을 영입했는데, 자코브도 잡지에 만화 연재 지면을 할당 받게 되어 9월 26일 블레이크와 모티머 시리즈 중 첫 번째 시리즈인 《황새치의 비밀(Le secret de l’Espadon)》을 최초로 연재했다.

사실 자코브는 《U 광선》 빼고는 만화가라기보다는 본업이 일러스트레이터에 가까워서 초기에 칸을 구성하는데 고생을 좀 많이 했다. 특히 《황새치의 비밀》에서 여러 가지 만화 기법을 실험하다보니 어색한 부분이 많은 편이다. 칸의 구성과 대사의 배치가 조악하고 글이 엄청 많아서 독자가 읽기 어려울 정도. 원래 방드데시네는 성인층을 대상으로 한 야한 만화가 아니면 청소년 잡지에 연재된 것이라도 글이 매우 많다고 하지만 황새치의 비밀의 경우는 정말로 도를 넘어선 수준.

이는 다년간의 일러스트레이터 경력으로 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초기 만화는 마치 소설 속 일러스트레이션처럼, 소설을 이해하게 도와주는 수단으로써의 만화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연재를 반복할 수록 제 스타일을 찾아서 안정된 구성을 갖추게 되어 특유의 명료한 선 기법이나 색채, 무대 감각을 살린 연출이 돋보이면서, 그는 평생 블레이크와 모티머 시리즈를 제작했다. 그렇게 1970년에 "사토 교수의 세 공식" 1탄까지 완성하고 2탄은 에피소드까지 짜놓고 미완성으로 남겨둔체 생을 마감한다.[5]

2.3. 그 밖에

1978년에는 자신의 최초 앨범인 U 광선을 개작하고, 《종이 오페라: 블레이크와 모티머 회고록(Un opéra de papier: Les mémoires de Blake et Mortimer)》라는 자서전을 출간했다.

3. 작가의 취향

3.1. 셜로키언

대표적인 셜로키언이다. 사실 셜록 시리즈 뿐만 아니라 추리소설 자체를 매우 좋아했다고. 블레이크와 모티머 시리즈에 이런 취향이 잘 드러나는데, 자세한 건 블레이크와 모티머 참조.

참고로 블레이크와 모티머 시리즈의 고정악역인 오를리크 대령[6]의 모델은 자코브 본인이다.

3.2. 오페라

자코브는 오페라를 매우 좋아했고, 스스로가 오페라 배우였고 극작가였다. 그래서 만화 속에 무대식 연출을 많이 차용했다.[7]

그런데 만화를 그린답시고 오페라를 끔찍하게 싫어하는[8] 에르제를 오페라 극장으로 끌고 다니는 민폐를 저질렀다고(...), 에르제는 이를 암묵적으로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오페라 여가수 비앙카 카스타피오레를 극성스러운 직업적 오페라 빠순이로 그리고 있다. 비앙카는 그런 의미에서 자코브의 여성화 버전이라는 얘기도 있다. 비단 자코브만이 영감을 준 건 아니겠지만...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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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니니와의 결혼식 사진)

자코브는 1930년(26세)에 19세의 레오니 베르벨트(Léonie Bervelt), 일명 니니(Ninie)라는 여성[9]과 결혼했다. 그녀도 자코브와 같이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직업으로 했다. 그들은 1945년에 결별해서 51년에 이혼했다.[10] 니니는 1969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1953년에 음악가인 잔 패냐르(Jeanne Faignart)[11]와 재혼했다. 혈육은 아니지만 재혼한 아내의 자식들(즉 의붓자식)을 같이 키웠다. 의붓아들은 르네 키틀리에(Rene Quittelier)로, 자기분야인 과학부분에서 조언을 해주어 '황새치'를 디자인하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특히 그의 의붓손녀[12]인 비비안 키틀리에(Viviane Quittelier)는 자코브를 기리는 사업에서 매우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온라인 상 활동을 열심히 해서 블로그, 페이스북 등 각종 페이지에서 만날 수 있다.

아홉살 아래로 남동생 앙드레 자코브가 있었다. 직업은 군인이었다고 한다. 어라?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안타깝게도 동생은 자코브가 군복무 중 전사했고, 자코브는 제대 후에야 이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5. 카메오

자코브가 땡땡 개작 작업에 참여하면서 땡땡 시리즈에서 자코브가 까메오로 등장하기도 한다. 주로 자코브라는 이름을 이탈리아식으로 바꾸어 끝에 i를 넣은 자코비니(Jacobini)를 성악가 이름으로 오페라 광고에 끼워넣는 식으로 등장한다. 미라가 된 이집트 고고학자, 설계도를 그린 엔지니어, 오페라 극장에서 구경하는 관람객, 오페라 배우(포스터 상의 이름)으로도 나오므로, 이것을 찾는 것도 나름 재미.

6. 그 밖에

청년기에 극단생활을 하면서 브뤼셀 옥탑방에 거주하다가 블레이크와 모티머로 크게 성공하자 브뤼셀 근처 Bois des Pauvres[13] 저택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었다.

바리톤 역할에 걸맞게 체격이 상당히 우람한 편이었다. 이에 비해 아내는 매우 가냘프고 작은 체격이어서 멜케베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같이 걸어다니는 모습이 마치 미녀와 야수를 보는 듯 했다 카더라.

30대부터 두꺼운 뿔테 안경을 썼지만 사진을 찍을 때 안경을 벗어드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잡지 땡땡에서 만화가들을 인터뷰해서 새해 화두를 언급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자코브는 희망(espoir)을 주제어로 언급했다. 자코브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단어.

에르제와 함께 일한 적이 많아서 땡땡학자들에게 익숙한 인물. 무엇보다 에르제는 자코브에서 영감을 얻어 아독 선장을 만들었다. 덩치가 크고 코가 크고 목소리가 크며 흥에겨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영락없는 자코브. 즉, 자코브는 아독 선장의 모델인 셈이다.

2012년 10월 중에 그의 생애를 만화로 그린 La marque Jacobs,[14] Une vie en bande dessinée가 델쿠르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동시대 만화가들 치고는 상당히 장수했다. 전기만화 《La marque Jacobs》에서는 오랫동안 살면서 말년에 아내들과 만화 동료들의 사망을 연달아 접하며 슬퍼하다가 저택에서 고독하게 임종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7. 대표적인 작품


[1] 자코브가 적성에 맞지 않는 상경계로 진학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2] 이 기간에 오페라를 같이 했던 여성인 니니(에르제의 고모와 별명이 같지만 동명이인이다.)와 결혼했다.[3] 후에 블레이크와 모티머 시리즈의 주인공 블레이크의 모델이 된다.[4] 자코브는 성격이 원만한 편이었다. 이는 똑같이 협력관계에 있었던 자크 반 멜케베크와는 상당히 비교되는 부분. 자크는 실력과 영향력(특히 채색 부분에서 에르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측면에서는 상당히 뛰어났는데 성격이 어둡고 냉소적이어서 에르제와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으므로 유명세가 떨어지는 편이다. 오죽하면 프랑스-벨기에 만화에서 붙여진 자크의 별명이 "제 3의 사나이"겠는가(...).[5] 이 미완성 작품은 봅 드 무어에 의해 완성되어 1990년에 출간된다.[6] 셜록 홈즈 시리즈모리아티 교수 같은 인물[7] 이러한 자코브식 연출기법이 만화에서 빛을 발하는데, 그 절정이 바로 블레이크와 모티머의 모험 시리즈 중 "노란 마크". 의문의 검은 망토 사나이와 블레이크와 모티머의 추격전은 명장면으로 꼽힌다.[8] 에르제의 이모 니니는 툭하면 오페라 노래를 불러댔는데 이게 에르제 어린 시절에 정말 끔찍하게 들렸다고 한다.[9] 'U 광선'에 등장하는 실비아의 모델이기도 했다.[10] 동료 자크 판 멜케베크의 그림에서 자코브와 니니를 해학적으로 그린 것이 있는데, 35년에는 자코브가 천사표로 아내 옆에 딱 달라붙었다가 40년에 들어서 거친 야수가 되어 마누라를 패고(...) 나중에 도리어 마누라에게 부지깽이로 역관광(...) 당해서 테이블 아래에서 쫄아붙은 모습이 나와있다...친구가 이 정도로 그릴 정도였으니 엄청 많이 싸운 듯. 아무래도 전쟁중 생활고가 큰 원인으로 보인다.[11] 이분도 재혼이다. 전 남편 사이에서 자식이 둘.[12] 그러니까 의붓아들인 르네 키틀리에의 딸[13] 직역하면 앙상한 나무라는 뜻이다.[14] 그의 작품 '노란 마크(La marque jaune)'의 패러디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