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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1-09 23:59:30

어명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덕화(德化) / 유초(儒樵)
본관 함종 어씨[1]
출생 1870년[2] 7월 24일
경상도 거창현 하가남면 평촌동
(현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들마마을)[3]
사망 1971년 4월 30일[4]
경상남도 거창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98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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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어명준은 1871년 9월 6일 경상도 거창현 하가남면 평촌동(현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들마마을)에서 아버지 어재호(魚在顥, 1849 ~ 1914. 11. 7)[5]와 어머니 거창 신씨(1855 ~ 1931. 10. 22) 신병찬(愼炳贊)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딸만 한 명 있던 큰아버지 어재영(魚在泳, 1841 ~ 1896. 1. 16)[6]에 입양되었다.

그는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북면에 살던 김병직(金秉直)과 만나 가조면 장기리 장날인 3월 20일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비밀리에 동지규합 등 사전준비를 진행했다. 이윽고 3월 20일 정오에, 그는 김병직과 함께 장터에 나아가 5백여명의 장꾼들 앞에서 태극기를 높이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장꾼들이 모두 이에 호응하자, 그는 그들의 선두에 서서 장터 일대를 행진했다.

이후 그는 김병직과 함께 시위대열에서 빠져나와 가북면 용산리에 있던 일본군 헌병분견소로 달려갔다. 마침 이곳은 헌병들이 모두 장기리 장터로 출동하여 아무도 없었다. 그는 분견소 안으로 들어가 서류를 모두 찢어버리고, 유리창과 기물을 닥치는대로 파괴한 후, 의자에 앉아 헌병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장기리 장터에서의 시위군중 6명을 체포하여 돌아오던 헌병들을 보자, 그는 김병직과 함께 헌병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무수한 구타를 당하여 초주검 상태로 다음날 아침 거창군 주둔 일본군 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5월 31일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거창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1년 4월 30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어명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 10월 30일 거창군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1] 양숙공파(襄肅公派)-거창(居昌) 문중 26세 명(命) 항렬.[2] 함종어씨세보 상권 700쪽에는 188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독립유공자 어명철도 이 마을 출신이다.[4] 함종어씨세보 상권 700쪽에는 3월 30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5] 초명 어재청(魚在淸).[6] 초명 어재황(魚在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