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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7:21

양호(삼국전투기)

1. 개요2. 설명3. 작중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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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훈 작가의 작품 삼국전투기에서 등장한 양호를 서술하는 문서.

2. 설명

히카루의 바둑(고스트 바둑왕)의 도우야 아키라로 나온다. 소탈하게 지낸 기록 때문인지 전투시에 문관들도 갑옷입는데, 양호는 위 소속으로 등장했던 첫등장을 제외하면 어떤 때라도 갑옷를 입지 않는다. 예상하겠지만 라이벌 육항은 신도우 히카루로 나온다. 서릉 전투 (3)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키 크고 미남에 재능까지 훌륭했지만 여기저기서 하도 견제를 받아서 출세는 오히려 늦었다고 서술됐다.

3. 작중 행적

전투 외편 6-1에서 짤막하게 처음으로 등장한다. 위군 갑옷을 입고 등장했으며, 전투외편 6편 시점에서는 가충과 종회에게 견제당하고 있었다고 언급되었다.

전투외편 8편부터 정식으로 등장한다. 한참 석포가 의심을 받던 와중 사마염이 석포가 진짜 반란을 일으킬 것 같냐고 묻자 석포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두둔해 줬다. 사마염은 오의 움직임도 그렇고 너무 상황이 맞아떨어진다고 반론했지만 양호는 오가 움직이니 석포가 움직이는 거라고 일축했다. 사마염은 양호의 말에도 의심을 풀지 않다가 석포가 모든 군권을 포기한 뒤에야 의심을 풀었다. 이후에는 도독형주제군사로서 양양에 배치되었다고 언급되기도 했다.

서릉 전투 편에서는 보천이 투항하자 사마염의 명으로 서릉 접수를 위해 움직인다. 양호는 육항이 반드시 움직일 거라고 예상했기에 자신은 5만 병력으로 강릉을 쳐 육항을 저지하고자 했고, 대신 양조에게 3만의 병력을 줘서 서릉을 지원하라고 했다.

강릉성 지척에 도달한 양호는 둑을 만들어 평지를 물로 채워 놓은 모양새를 보게 되었고, 양호는 저들은 움직이기 힘들도록 물을 채워 놓은 것이겠지만, 선박을 이용하면 이동이 훨씬 수월해진다고 말하며 상대에게 자신들의 작전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서윤을 시켜 둑을 파괴할 특공대를 조직했다는 소문을 내게 하였다. 그러나 양호가 둑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육항이 간파하여 둑을 전부 무너뜨려버렸기에 기껏 준비한 선박들이 쓸모가 없어졌고, 양호는 이 사건 이후 자기가 육항을 과소평가했다고 인정하며 적장만 아니라면 꼭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양호가 본격적인 강릉 공략을 시작하기도 전에 양조의 육군이 궤멸되어버리자 양호는 자신과 서윤의 수군만으로는 강릉과 서릉을 전부 꿰고 있는 육항을 상대로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강릉 공략을 포기하고 양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양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거기장군에서 평남장군으로 직책이 강등되었다.

이후 육항과의 일화가 언급되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양호는 양양 일대를 덕으로써 통치하였다고 언급되기도 하였으며, 육항 사후 드디어 때가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국 통일 편에서는 수하였던 왕준이 익주자사가 되어 공을 세우자 그에게 대 오 정벌을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수군 함대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동시에 함대를 키우기 가장 적당한 장소가 익주 장강의 상류였기에 그곳에서 최강의 함대를 만들 것을 부탁한다.

양양 일대를 덕으로 다스린 것과는 별개로 양호는 진 내부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오 정벌론자에 속했음에도, 육항의 죽음을 확인하고도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오를 정벌할 준비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였다. 육항이 죽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오의 중심이 초긴장 상태일 것이고, 서량에서는 여전히 독발수기능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1] 서윤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기회가 왔을 때(육항이 죽은 지금) 움직이는게 낫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양호는 어차피 앞으로 1~2년 동안은 시간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말하며 여유를 보였다. 오의 긴장은 길어야 1~2년 안에 풀릴 것이고, 사마준이 복귀한 서량도 1~2년 동안은 안정될 것이며, 앞에서 왕준에게 부탁한 함대도 1~2년쯤 뒤에 완성될 것이며, 결정적으로 1~2년 정도만 지나면 오에서 손호를 따르는 자는 아무도 없어질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

그리고 실제로 육항이 죽고 2년 뒤 양호는 상소를 올려 오를 정벌하자고 주장하지만[2] 가충 일파의 반대로 다수결에서 밀려 무산됐다. 두예와 장화는 양호의 의견에 찬동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묘사되었다.

양호는 겸손하고 욕심이 없으며 언제나 스스로를 낮게 평가했다. 거기에 그는 그리 대단한 가문도 아니었고, 장인인 하후패가 촉에 투항했던지라 처가는 커리어에 감점요소만 되었다. 양호 본인도 스스로를 매우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음에도 항상 가질 건 다 가진 자들에게 견제를 받아왔다. 작가는 이를 보고 양호를 송곳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결국 양호는 끝내 삼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278년 병으로 사망했다. 양호는 죽기 전에 장화에게 자기가 구상한 오 정벌 전략을 그대로 전수했고, 두예를 직접 자신의 후임자로 지명하였다. 그렇게 양호의 유지는 두예와 장화 두 사람이 잇게 되었다고 묘사됐다. 덧붙여 양호가 생전 오 정벌을 서둘렀던 이유는 손호가 폭정을 일삼다 자멸할까 우려한 것이었다고 묘사됐다. 손호가 죽고 아예 새 정권이 들어서 버린다면 일이 굉장히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


[1] 독발수기능의 죽음이 서릉 전투 편보다도 이전에 연재되었기에 헷갈릴 수 있지만 독발수기능은 양호보다도 1년을 더 살았다. 즉 274년 기준으로는 아직 멀쩡했다.[2] 사마염은 오를 정벌하려면 장강을 넘어야 한다고 주저했지만 양호는 지형의 힘도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때나 빌릴 수 있는 것이며 촉의 첩첩산중도 뚫었으니 장강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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