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야오쉰 陽耀勳 / Yang Yao-Hsun | |
출생 | <colbgcolor=#ffffff>1983년 1월 22일 ([age(1983-01-22)]세) |
타이둥현 | |
국적 | 대만 |
투타 | 좌투좌타 |
신체 | 178cm / 90kg |
포지션 | 투수 → 외야수 |
프로입단 | 2006년 육성선수 계약 (후쿠오카)[1] |
소속팀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6~2013) 피츠버그 파이리츠 산하 마이너 (2014) → 알투나 커브 / AA (2014) 라미고-라쿠텐 몽키스 (2015~2021) 푸방 가디언스 (2022) |
병역 | 국훈중심 야구단[2] (2014년 8월~2015년 8월) |
응원가 | 영화 소림소녀 OST |
[clearfix]
1. 개요
대만 프로야구 리그 푸방 가디언스의 외야수.대학시절 외야수였으나 투수로 전향 후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하였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대만으로 복귀한 뒤에는 다시 외야수로 전향하였다.
2. 선수생활
2.1. 투수 시절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피츠버그 파이리츠
중국문화대학 시절인 2005년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계약했다. 같은 해 일본으로 야구유학을 가있던 동생 양다이강이 같은 해 드래프트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계약하며[3] 프로로서는 동기가 되었다.일본프로야구 9년동안 38게임에 등판하여 90 2/3이닝 5승 5패 평균자책점 3.08 탈삼진 87개를 기록하였다. 고질적인 제구불안과 소속팀 호크스의 어마어마한 뎁스를 뚫지 못해 1군에서는 미미한 성적을 거뒀다.[4] 그래도 2012년 1차례 완봉승을 기록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나마 유일하게 빛을 본 시즌이 2012년이었다. 후반기에 9경기(7선발)에 등판하여 2승 3패 1홀드 ERA 1.48을 기록하면서 후반기 에이스 역할을 맡아 클라이맥스 시리즈까지 선발로 나온 것. 그러나 2013년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겠다면서 스프링캠프를 보이콧하는등 좋지 못했고, 아예 1군에 올라오지도 못한 채 시즌 후 방출당했다.
2014 시즌에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시도하여 피츠버그 파이러츠와 2년 계약을 맺지만 메이저리그를 밟지 못한 채 더블A에서 6점대라는 처참한 기록만 남기고 동년 7월 방출당한 후 대만으로 리턴한다. 대체훈련제도 보충역 자격을 얻지 못했는지[5] 대만 인터넷을 보면 2015년 드래프트까지 1년 간 군 복무를 했다고 한다. 현역병으로 한 것은 아니고 한국의 상무에 해당하는 국훈중심 야구단이다.
2.2. 대만 복귀 : 라미고 몽키스
제대 후에도 투수를 고집하는 바람에 2015년 드래프트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여 미지명이라는 굴욕을 겪었다. 드래프트 이후 EDA 라이노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계약에는 실패하였고, 2015년 라미고 몽키스에 입단 테스트를 통해 입단한다.2016 시즌 좌익수로 활약하였는데 타격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주전자리를 꿰찼다. 주로 테이블세터로 출전하였으며 타율은 높지 않지만 규정타석을 돌파하고 17홈런-19도루라는 호성적을 기록했다. 결국 2016년이 프로 생활을 15년 넘게 해 오면서 규정이닝/규정타석을 도달한 유일한 시즌이 되며 커리어하이로 남게 되었다.
2017 시즌 최악의 타격부진 속에 베이스러닝 중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후기리그 중반 복귀하여 고감도의 타격감을 보여줬다.
2018 시즌에는 더 타격이 안 좋아져서 OPS 6할대로 부진했고, 시즌의 절반 정도밖에 못 나왔다.
2019 시즌에는 사실상 대타요원으로 전락. OPS는 7할대지만 그게 끝이다. 아무래도 30살이 넘어서 대만에 돌아온거다보니 부상과 노쇠화로 생각만큼 잘 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2020 시즌에는 개막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2군에서 뛰고 있다가 시즌 중반부터 다시 주전 외야수 자리를 차지했다.
2021년 시즌에는 주로 2군에 있었고 시즌 후 방출당했다. 이후 푸방 가디언즈에 입단하며 현역 연장.
그러나 푸방에서도 시즌 초에 백업으로 잠시 나오다 이렇다 할 성적을 못 내고 2군행. 7월에 1군에 돌아왔지만 1경기 1타석에 그쳤고 1년만에 또 방출을 당했다. 이후 실업야구팀 타이중시 야구단에 입단.
3. 플레이 스타일
투수시절 최고구속 155km에 이르는 빠른 공을 던졌으나 고질적인 제구력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야수로서도 안 다듬어진 툴가이+배드볼 히터의 모습. 나쁜 공에 배트가 잘 나가지만, 그런 공을 타격해도 장타를 잘 만들어낸다. 나쁜공을 타격해서 만들어낸 홈런 장면들. 수비에서도 빠른 발과 강견을 가졌지만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결국 재능은 있었으나 막내동생의 하위호환이었다. 거기다가 부상과 심한 기복은 물론 투수와 타자를 마구 오가며 자기 포지션조차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대만에서도 이렇다 할 누적기록을 쌓지 못한 비운의 선수 중 하나였다.[6] 다만 투수로도 야수로도 워낙 툴이 좋았기 때문에 40이 다 되도록 불러주는 팀이 있었어서 선수생활 자체는 꽤 오래 했던 케이스.
4. 역대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2015 | 라미고 몽키스 | 25 | 87 | 37 | 5 | 0 | 0 | 24 | 10 | 5 | 9 | 8 | .425 | .485 | .483 | .968 | ||
2016 | 라미고 몽키스 | 89 | 359 | 101 | 12 | 6 | 17 | 74 | 48 | 19 | 25 | 74 | .281 | .335 | .490 | .825 | ||
2017 | 라미고 몽키스 | 57 | 181 | 63 | 14 | 0 | 5 | 38 | 25 | 8 | 13 | 38 | .348 | .392 | .508 | .900 | ||
2018 | 라미고 몽키스 | 40 | 127 | 33 | 5 | 0 | 3 | 18 | 14 | 1 | 11 | 27 | .260 | .319 | .370 | .689 | ||
2019 | 라미고 몽키스 | 39 | 72 | 19 | 4 | 0 | 3 | 12 | 10 | 0 | 7 | 19 | .264 | .329 | .444 | .773 | ||
2020 | 라쿠텐 몽키스 | 65 | 212 | 67 | 17 | 1 | 9 | 35 | 38 | 5 | 12 | 53 | .316 | .360 | .533 | .893 | ||
CPBL 통산 | 315 | 1038 | 320 | 57 | 7 | 37 | 301 | 145 | 38 | 77 | 219 | .308 | .360 | .484 | .844 |
5. 여담
- 대만 원주민(아미족) 출신이다.
- 홈런 이후 홈플레이트에 돌아와 가슴을 두드리는 특유의 세리머니를 취한다.
- 막내동생 양다이강도 야구선수로 일본프로야구에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가는 중. 형제가 일본프로야구에서 투타대결을 1차례 벌였고 결과는 2타수 무안타 1볼넷 1삼진으로 끝났다. 구장은 후쿠오카 야후오크돔이었으며 형제의 부모님이 이 경기를 직관하는 것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때 한 분은 닛폰햄 유니폼을, 한 분은 소프트뱅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다만 형제간에 사이는 좋지 않은데 2017년 시즌 이후 금전적인 문제가 언론을 통해 표출되기도 했다.[7]
- 사실 큰동생 양야오화도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야구선수였으나 일본에서도 대만에서도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지 못하며[8] 2018년을 끝으로 야구를 접었다. 대학 졸업 후 대만에 돌아가기 전까지 일본 독립리그에서 4년간 뛴 적이 있다. 대만에서는 프로 입단이 좌절되자 6년간 실업야구에서 뛰었고 2019년부터 3년간 푸방 가디언스의 일본어 통역을 맡았다.
-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였으며 한국과의 예선 경기에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하였다.
- WBC의 경우 2006년 과 2013년 두 차례 대만 대표팀에 선발되었고 특히 2013년의 경우 한국전에 선발투수로 나왔다. 2 2/3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쳤다. 손톱이 깨지는 부상속에서 유니폼에 피를 닦으며 투구를 이어나간 것이 인상적이었다.
[1] 외국인 선수 입단계약. 참고로 대만에서도 드래프트에서 미지명됐기 때문에 이후 입단 테스트를 거쳐 한국의 육성선수 같은 개념으로 입단했다. 물론 입단 방식만 그런 식이었고 바로 정식선수로 등록됐지만.[2] 대만판 상무 야구단. 현재는 폐지되었으나 2023년부터 징병제가 1년으로 다시 늘어나면서 부활 얘기가 나오고 있다.[3] 후쿠오카제일고 출신, 그래서 외국인 선수로 분류되지 않는다.[4] 애초에 동생 양다이강과 다르게 대만에서 대학을 나와서 외국인 쿼터 제한까지도 걸려있었다.[5] 한국의 예술체육요원과 동일하다.[6] 그나마 대만에서 딱 1시즌 규정타석을 달성하고 17홈런-19도루라는 호성적을 보여주긴 했다. 문제는 이때 이미 33살이었다는 것. 차라리 젊을 때부터 대만에서 야수로 뛰었다면 더 의미있는 누적 성적을 냈을 것이다.[7] 양야오쉰이 번 돈도 대만 일반인의 10배 가까이 되나, 양다이강이 번 돈은 양야오쉰이 번 돈의 10배는 된다. 즉 일반인인 둘째가 번 돈<애매한 커리어였던 양야오쉰이 번 돈<스타플레이어였던 양다이강이 번 돈이다. 이런 식이니 금전 갈등이 안 생기기도 어렵다. 물론 형제가 모두 야구를 했고 한명만 성공해서 떼돈을 벌고 다른 한명은 실패해서 일반인으로 푼돈을 벌며 사는 경우는 꽤 많으니(대표적으로 마츠다 노부히로와 나카무라 타케야가 있다. 단 이 사람들의 형제는 건실한 기업 산하 실업야구 팀으로 가서 나름 괜찮은 회사 회사원이니 낫다.) 무조건 이런 상황이라고 싸움이 난다는 것은 아니다.[8] 2014년 드래프트는 미지명, 2015년 드래프트는 드래프트 참가를 위한 추천 테스트에서 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