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양성운 楊聖雲 | |
본명 | 양성운 |
출생 | 1925년 12월 19일 |
전남 보성 | |
사망 | 2014년 11월 1일 (향년 88세)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호 | 설봉 (雪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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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남 보성에서 출생하여 보성에서 작품 활동을 한 대한민국의 서예가. 백수복(百壽福)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2. 생애
일제 시대에 태어나 해방되기 전 일본으로 잠시 끌려 가 징용을 당했다. 해방이 되어 혈기가 왕성한 한창의 나이에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어 전란에 휘말리는 등 혼돈의 시기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한 때는 기자로 한때는 사업가로 지내다가 , 심지어는 유랑극단을 맡아 전국을 돌기도 했다. 방황을 마치고 보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중년의 나이였고, 다시 붓을 잡게 된다.
이미 스승들은 세상을 뜬 다음이었고, 생활고에 접어 들게 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에 그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배웠던 모찌(찹살떡)를 만들어 팔면서 생활을 연연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 잠을 청하게 되는데 눈 내린 하얀 벌판에 겨울에는 보이지 않은 뱀이 기어가는 기이한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한다. 하도 기이한 꿈이라 스스로 해몽을 해 보던 그는 하얀 눈밭은 화선지를 말하고 검은 뱀은 그 화선지에 또아리를 튼 전서 즉 백수복을 연상케 하여 이것은 자신이 백수복을 전념해야 한다는 일종의 계시로 받아 들이고 그의 스승인 효봉 선생의 백수복을 그가 가야 할 작품 세계로 받아 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3. 활동
백수복은 목숨수(壽) 복복(福)자로 구성되어 이루어 진 전서체로 백여가지 이상의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일컫는 작품명이다.설봉 선생의 아름답고 힘이 있는 전서체의 백수복은 현존하는 여느 백수복 중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설봉선생은 보성에 건재 하던 두 스승으로부터 글을 사사 받게 되는데 그의 행서와 전서의 영향은 이 두 스승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려서 효봉 허소 선생께 글을 사사 받고 이후 설주 송운회 선생께 배우게 되는데 그의 호가 설주 선생과 효봉 선생의 첫 자를 일컫는 설봉이 된 이유도 이를 말해 준다.
당연히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이 두 분의 글들이 교차하고 있으나 이후 그는 스승을 통해 새로운 자신의 뼈있고 독특한 서체로 발전하게 된다. 설봉 선생의 백수복은 가히 아름답다.
불가에 귀의한 그의 작품은 양산 통도사에 머물면서 통도사 발전을 위해 백수복 병풍을 기부하게 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 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영향으로 금강경, 반야심경 등을 담은 병풍 등과 관련한 작품들이 많이 산재 한다.
4. 여담
행서와 예서 그리고 전서에 능통한 그의 작품은 국내 외에서 호평 받으며 일본에서도 인정해 주는 단체에서 서예 대상을 받은바 있다.
물론 자세히 보면 그의 스승인 효봉 선생과 설주 선생의 필체가 언뜻 담겨 있으나 힘이 축적된 그만의 필체를 여실히 느낄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들은 그의 작품을 보면 서체 속에 다양한 그림이 보이는 것 같다고 한다.
목포 유달산에 자리 한 개항 백 주년을 기념하는 ‘儒達山精氣’’ 기념비석에 담긴 그의 말년 서체는 그야말로 이를 말해 주고 있듯이 강한 힘과 미려함이 함께 함을 보여 주고 있다.
방황을 끝낸 중년초입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보성에서의 작품 활동은 이렇게 많은 그의 유작을 남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