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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18:12:10

양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파일:양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1.jpg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

1. 개요

1975년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면 유산리에서 공업단지 조성 중에 출토된 5세기~6세기 경 신라시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

파일:양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2.jpg

높이 26cm, 대좌너비 12cm.

1975년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면 유산리에서 출토되었다. 전면에 녹이 덮여 있으나 형태는 비교적 완전한 편이다. 출토지가 확실한 신라시대의 반가사유상으로, 반가상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대좌에 내려진 여러 겹으로 접힌 옷주름, 세장(細長)하면서도 가슴부분이 표현된 점 등은 경주 금산재(金山齋)에서 출토된 경주 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과 비교할 수 있다.

파일:양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3.jpg
사진 출처 : 반가사유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반가사유상이 발견된 바로 옆, 양산지방 공단의 만호제강 북쪽에 있는 설상 구릉 남서쪽에 양산 유산동 고분군(梁山由山洞古墳群)이 존재하는데 이 고분군은 5세기~6세기 경 조성된 신라시대의 무덤군으로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또한 5세기~6세기 경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깊이 숙인 침잠한 얼굴 표정 또한 명랑한 웃음을 띤 기존 7세기의 세련된 반가사유상들보다 앞서는 고졸한 양식으로서, 확실한 신라 반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반가사유상 특유의 까다로운 신체 조형을 무난히 소화한 우수한 금동불로, 흔히 작품성이 떨어지는 반가사유상은 상체를 꼿꼿이 세워 정면관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팔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등 추상화의 경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상은 머리를 상당히 숙이는 동시에 약간 옆으로 기울이고 오른손 두 손가락 끝을 오른뺨에 살짝 대어 사실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이 사유상은 도상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소를 하나 가지고 있다. 보관 정면에 커다란 보상화문이 있고 그 위에 희미하게 선정인 여래좌상의 화불이 있는데, 이렇듯 반가사유상에 화불이 있는 예는 한반도에서는 유일하다.

파일:양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4.jpg
사진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이 반가사유상은 원형의 대좌 위 여러 겹으로 접혀진 옷주름이 덮여 있는 신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전형을 보여주며, 특히 오른손이 살짝 숙인 얼굴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절정이다. 또한 손의 형태에서 왼손을 오른쪽 발목 위에 얹어 두었으며, 두 손이 신체에 비해 약간 크게 조성됐다. 청동상의 머리 부분 뒷면에는 광배를 꽂았던 방형의 홈이 있고 머리카락은 2갈래로 갈라져 어깨 위에 내려와 있으며, 관은 꽃무늬 장식이 있는 삼면보관을 쓰고 있어, 전(傳) 황룡사지출토 반가사유상이나 경주남산삼화령출토 석조삼존불상의 양 협시상과 유사하다. 특히 원형의 대좌 위에는 여러 겹으로 접혀진 옷주름이 덮여 있는 특성이 주목 받았다. 이러한 옷주름 표현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매우 유사하지만, 오른 무릎위에 얹혀 있는 왼발 족좌가 일반적인 연화좌가 아닌 연꽃잎 모양이라 차이가 있다. 출토지가 확실하고 옷주름처리가 정교한 전형적인 신라의 반가사유상이라 할 수 있다.불교신문 : 신라 금동반가사유상의 절제미

지금으로부터 1,5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3.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