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우승자 | ||||
유남규 (1988) | → | 얀오베 발드네르 (1992) | → | 류궈량 (1996) |
<colbgcolor=#131230> 이름 | <colbgcolor=#ffffff,#191919>얀오베 발드네르(Jan-Ove Waldner)[1] |
국적 | 스웨덴 |
출생 | 1965년 10월 3일([age(1965-10-03)]세) 스웨덴 스톡홀름 |
종목 | 탁구 |
신체 | 179cm, 82kg |
전형 | 오른손 / 셰이크핸드 올라운드 |
특기 | 드라이브 |
별명 | 테이블 위의 녹색 여우[2] 스웨덴의 탁구 영웅 현대 탁구계의 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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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전 탁구 선수. 국내 탁구인들에겐 과거 언론에서 지칭하던 발트너라는 명칭으로도 친숙한 선수이다.세계 탁구사에서 처음으로 그랜드슬램[3]을 달성한 선수로, 현재까지도 유일한 넌차이니즈 그랜드슬래머로 남아있다.
2. 평가
21세기 글로벌 탁구 팬들에게도 자주 회자되는 세계적인 선수이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단식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전성기였던 80년대 후반~90년대 초중반 외에도 현역으로 롱런하면서, 한국 나이로 36세인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풀세트 접전 끝에 단식 은메달을 획득했고, 무려 40줄에 접어든 2004 아테네 올림픽에도 출전하여 단식 4강까지 진출한 바 있었다.[4] 당시 전성기에서 내려와 노장의 길을 걷던 그를 해설자가 소개하기를 "중국 탁구가 지배하기 전까지 왕좌를 지키던 선수이다. 또한 현재의 중국 탁구에 도전 가능한 유일한 서양인 선수였다."라고 소개할 정도였다.이후로도 2007년 국가대표팀에선 은퇴했지만 현역 생활은 더 오래 했다.[5] 단순히 눈에 보이는 년도로만 계산해 봐도 엄청난데, 1989년에 세계선수권 단식 우승을 한 양반이 11년 이후인 2000년 세계선수권 단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것도 결승전은 류궈량과 쿵링후이가 있던 중국.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도 2002년까지 세계랭킹 TOP 10안, 최고 7위까지 올라갔고 2004년에는 올림픽 4강에 진출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고 프로 데뷔 후 29년이 지난 2010년엔 자기 조카뻘인 1982년생 선수 파 게렐을 상대로 40대 중반의 나이에 커리어 통산 9번째 스웨덴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다 무려 50대에 접어든 2016년 가서야 현역 은퇴했다.
탁구의 그랜드슬램을 세운 5명의 남자 선수[6] 중 유일한 비중국인 선수다. 여담으로 발드네르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중국 선수 중 그나마 세대가 가까운 류궈량, 쿵링후이를 상대로 전적이 더 앞섰다. 이들조차 이러하니 다른 중국 선수들은 크게 밀리는 경우도 많았다.[7] 덕분인지 은퇴한 후에도 중국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라고 한다. 중국에선 그의 이름을 따 애칭으로 '라오와(老瓦)'라고도 불리며, 마룽이나 아마추어들과 이벤트 시합을 가지기도 한다.
3. 선수 경력
자세한 내용은 얀오베 발드네르/선수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colbgcolor=#ffffff,#191919> |
현역 시절 다큐멘터리 |
4. 플레이 스타일
<colbgcolor=#ffffff,#191919> |
하이라이트 영상 |
쉐이크핸드 플레이어로서 훌륭한 방어와 동시에 매우 영리하면서도 강력한 공격으로 상대를 공략하는 스타일이었다. 탁월한 볼 감각, 빠른 동체 시력과 민첩함이 합쳐져서 쉽고 간단하게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어 "진짜 고수" 느낌이 나는 스타일을 가졌다. 큰 힘 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득점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다시 경기에 임해서 더욱 멋이 나는 선수였다.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발드네르는 가만히 있는데 상대방은 좌우로 열심히 뛰어다니다가 결국 실점하는 걸 볼 수 있다.
강하고 변칙적인 포핸드로도 유명했다. 상황에 따라 구질과 코스를 적절히 선택해서 조절하는데 능했다. 발드네르가 세계대회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뛰어난 서브와 포핸드 드라이브 덕분도 컸다. 높은 타점에서 나오고 체중이 실려 막기가 쉽지 않은 발드네르의 포핸드 공격은 그의 세계 최고 수준의 서브[8]와 탁구 지능과 결합되어 많은 상대 선수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멘탈과 순간판단능력도 매우 뛰어나, 경기 중 정신적으로 잘 흔들리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판단과 플레이에 망설임이 없고 확신에 차있었으며,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정확히 시행해내는 선수였다. 또한 상대방에 대해 미리 연구를 많이 하고 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따지고 나서 게임에 들어갔다고 한다. 본인이 스스로 평가하기를 발트너는 자신의 최대 강점을 "게임을 읽는 능력" 이라고 밝혔고, 전술(Tactics) 면에선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반면 자신의 최대 약점은 백핸드 플릭 능력과 백핸드 공격력이라고 한다.
요약하자면 공격과 수비와 탁구지능이 고루 뛰어난데 서브도 답이 없고, 교묘히 상대의 심리와 약점을 이용하는 플레이를 하면서 본인은 경기 내내 침착함을 유지해 얄밉기까지 한, 그야말로 상대하기 상당히 골치 아픈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발드네르하면 창의적이고 재치있는 플레이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그의 탁구는 정석적으로도 매우 훌륭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발드네르의 전성기 시절인 80~90년대의 탁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백핸드 기술의 발전이 많이 이루어진 오늘날이지만, 이전의 서브&포핸드 중심의 밸런스형 쉐이크핸드의 대표주자는 발트너였다.[9] 좋은 경기력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진 기발한 플레이와 특유의 단정한 몸가짐, 쇼맨십으로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준 선수가 발드네르였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 ||
<colcolor#222> 금메달 | <colbgcolor=#ffffff,#191919> 1992 바르셀로나 | <colbgcolor=#ffffff,#191919> 단식 |
은메달 | 2000 시드니 | 단식 |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89 도르트문트 | 단체전[10] |
금메달 | 1989 도르트문트 | 단식 |
금메달 | 1991 지바 | 단체전 |
금메달 | 1993 예테보리 | 단체전 |
금메달 | 1997 맨체스터 | 단식[11] |
금메달 | 2000 쿠알라룸푸르 | 단체전 |
은메달 | 1983 도쿄 | 단체전 |
은메달 | 1985 예테보리 | 단체전 |
은메달 | 1987 뉴델리 | 단체전 |
은메달 | 1987 뉴델리 | 단식 |
은메달 | 1991 지바 | 단식 |
은메달 | 1995 톈진 | 단체전 |
은메달 | 1997 맨체스터 | 남자 복식 |
동메달 | 1993 예테보리 | 단식 |
동메달 | 1999 에인트호번 | 단식 |
동메달 | 2001 오사카 | 단체전 |
유럽선수권 | ||
금메달 | 1982 부다페스트 | 단식 |
금메달 | 1986 프라하 | 단체전 |
금메달 | 1986 프라하 | 단식 |
금메달 | 1988 파리 | 단체전 |
금메달 | 1988 파리 | 남자 복식 |
금메달 | 1990 예테보리 | 단체전 |
금메달 | 1992 슈투트가르트 | 단체전 |
금메달 | 1996 브라티슬라바 | 단체전 |
금메달 | 1996 브라티슬라바 | 혼합 복식 |
금메달 | 1996 브라티슬라바 | 남자 복식 |
금메달 | 2002 자그레브 | 단체전 |
은메달 | 1984 모스크바 | 남자 복식 |
은메달 | 1994 버밍엄 | 단체전 |
은메달 | 1994 버밍엄 | 단식 |
동메달 | 1984 모스크바 | 단체전 |
동메달 | 1984 모스크바 | 남자 복식 |
동메달 | 1998 에인트호번 | 단체전 |
동메달 | 2000 브레멘 | 단식 |
월드컵(단식) | ||
금메달 | 1990 지바 | 단식 |
은메달 | 1983 바르바도스 | 단식 |
은메달 | 1996 님스 | 단식 |
동메달 | 1991 바르셀로나 | 단식 |
월드컵(단체전) | ||
금메달 | 1990 치바 | 단체전 |
은메달 | 1991 쿠알라룸푸르 | 단체전 |
은메달 | 1994 님스 | 단체전 |
[1] 한국 탁구 팬들에게는 발트너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2] 단순히 강력하거나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기발하고 영리한 플레이를 해서 붙은 별명이다.[3] 올림픽, 세계선수권, 월드컵 단식을 모두 우승하는 것.[4] 16강에서 당시 세계랭킹 2위 마린과 독일의 최강자 티모 볼을 연달아 격파하며(참고로 이 둘은 발트너의 전성기 시절 자주 맞붙었던 류궈량과 외르크 로스코프의 제자들이었다) 4강까지 올라왔지만, 유승민에게 잡히면서 동메달 결정전으로 갔다가 왕리친에게 패해 4위를 기록한다.[5] 참고로 발드네르와 비슷하게 롱런한 선수는 같은 스웨덴 출신 동료인 요르겐 페르손, 벨라루스의 블라디미르 삼소노프, 크로아티아의 조란 프리모락, 벨기에의 장 미셸 세이브, 독일의 티모 볼 등이 있었다. 이는 이들의 실력이 좋은 것도 있지만, 그만큼 후세대가 커주질 못해서 세대교체가 늦게 된 것도 있었다. 그나마 2020년대 이후엔 확실히 세대교체가 된 편.[6] 다른 선수는 중국의 류궈량, 쿵링후이, 장지커, 마룽이다.[7] 참고로 한국의 김택수가 현역 시절 발드네르를 상대로 11승 12패로 가장 우수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 전적이 좋은 편인 김택수도 복식을 제외한 가장 중요한 단식 경기에선 발드네르에게 패배해 상위 라운드 진출에 실패한 바가 몇 차례 있었다.[8] 많은 탁구선수들이 발드네르의 서브는 심하게 변칙적이고 박자도 부정확해서 엄청나게 까다롭고, 아예 서브가 보이지도 않고 모션이 좋아서 어떤 서브인지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한다. 다만 발드네르의 전성기 시절은 Free Arm으로 공을 가리는 게 허용이 되던 시절이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룰이 바뀐 이후엔 메이저대회 우승은 해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룰이 바뀌자마자 발트너의 클라스가 떨어진 건 아니고 룰이 개정된 이후에도 그럭저럭 훌륭한 경기력을 선보였다. 룰이 개정될 당시 발트너의 나이는 이미 37세였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애초에 룰이 개정되기 전인 옛 시절엔 모두가 다 가릴 수 있었기 때문에 딱히 치사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같은 조건이었다. 지나치게 얄미워서 문제.[9] 지금 와서 보면 발트너의 탁구도 옛날 탁구일 수 있으나 80년대 당시엔 그의 천재성과 탁구 스타일은 분명 시대를 앞서갔던 게 사실이다. 특히 서브를 넣을 때의 그립, 서브를 넣는 방법과 훼이크를 주는 방식, 포핸드 서브 이후의 시스템, 서브 리시브 등, 현대 탁구에서 굉장히 비중이 큰 중요한 부분들의 개념 등을 더욱 발전시킨 선수가 발트너였다. (정작 발트너 본인은 서브와 리시브 심화 개념을 중국 유학 시절 때 배워왔다고 한다.) 물론 발트너만 서브 훼이크 같은 기술들을 사용한 건 아니지만, 이러한 부분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게 발트너였고, 많은 탁구인들이 그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정점을 찍은 선수는 세계적으로 모두의 타겟이 되는 건 기본이고, 그 선수에 대한 대처법 연구와 특징 분석, 모방이 수도 없이 많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마룽조차도 본인 입으로 자국 코치들과 선수들을 제외하면 자신이 가장 배움을 많이 얻었던 선수가 발트너였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이 둘은 서브와 포핸드 공격 스타일, 백핸드 드라이브 모션 등 전체적인 플레이스타일 상 비슷한 점이 꽤 많다. 마룽의 플레이는 발드네르의 장점을 흡수하고 운동능력까지 극도로 끌어올린 탁구 기계라는 평도 있을 정도.[10] 당시 최강국 중국을 상대로 5:0으로 이겼다.[11]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우승했다고 한다. 당시 상대인 조란 프리모라츠, 장-필리프 가티앙, 블라디미르 삼소노프 등이 10위권 내 선수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한 세트도 내주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기록이다. 또한 전설의 21:0 경기도 이 대회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