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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1 07:32:49

압둘라 파샤

오스만 시기 아크레 기반 군벌
술레이만 파샤 압둘라 파샤 이븐 알리
1. 개요2. 생애
2.1. 집권2.2. 파르히 숙청2.3. 바시르 2세와의 동맹2.4. 아크레 공방전 (1822년)2.5. 재임명과 레바논 개입2.6. 세력 확장2.7. 이집트의 침공과 항복
3. 평가

1. 개요

1819 ~ 1832년까지 팔레스타인, 레바논 남부 일대를 다스린 맘루크 군벌. 그는 오스만 군의 아크레 포위를 격퇴하고 역으로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였으며, 1831년에는 제자르 파샤도 이루지 못했던 자라르 가문의 거점 사누르를 함락하였다. 하지만 1832년 메흐메트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집트 군에게 아크레를 포위당한 끝에 항복, 히자즈로 은퇴한 후 요절하였다. 압둘라 파샤를 마지막으로 한세기에 걸친 아크레 기반 군사 정권은 붕괴되었고, 이집트 지배를 거쳐 오스만 제국의 직접 지배가 회복되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은 재차 중과세와 무관심에 놓이며 침체기로 들어섰다.

2. 생애

1801년 아크레에서 제자르 파샤 휘하의 체르케스계 맘루크인 알리 파샤 카진다르와 시리아 연안 자블라의 아슈라프 (무함마드의 후손) 출신 여인 간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자르 파샤에 이은 실권자 술레이만 파샤의 집권기에 알리 파샤는 2인자에 해당하는 카트쿠다에 올랐으나 1814년 사망하였다. 임종 시에 알리 파샤는 술레이만 퍄사의 주요 참모인 하임 파르히에게 당시 13세였던 압둘라의 후견을 맡겼다. 이를 충실히 따른 파르히는 유대인이었음에도 압둘라에게 아랍어, 이슬람 법학 등 그를 엘리트 아랍 무슬림으로 키워내었다.

파르히는 또한 압둘라의 모친과 함께 술레이만을 지속적으로 설득, 압둘라를 알리 파샤처럼 그의 카트쿠다이자 후계자로 지명하게 하였다. 이로써 파르히는 술레이만의 조카인 무스타파 베이 및 야파 태수 아부 나부트와 같은 잠재적 후계자들보다 어린 압둘라가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 그의 막후에서 실권을 휘두르려 한 것이다. 1818년 아부 나부트는 야파 태수에서 해임되어 레반트에서 축출되었다. 한편 술레이만 역시 압둘라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로 삼았다. 다만 그에게 부친 알리 파샤처럼 자신에 버금가는 대우는 삼갔다.

2.1. 집권

파일:아크레 압둘라.jpg
압둘라 파샤의 궁전. 후일 이브라힘 파샤를 거쳐 바하이교의 지도자 압둘 바하가 거처하였다.

1819년 8월 술레이만이 사망하자 맘루크 군부는 그의 조카인 무스타파 베이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파르히는 시돈 총독으로 조정에 무스타파 베이를 추천하라는 맘루크들의 주장에 현지에서 태어나 아랍어와 법학을 배웠고, 카트쿠다로서 통치 경험이 있는 압둘라가 아랍어와 법학 및 통치 경험이 부족한 그보다 더 적합하다며 일축하였다. 파르히는 코스탄티니예의 유대인 은행가이자 예니체리 부대와 친한 헤세키엘 알 바그다디를 통해 약 1100만 피아스터의 뇌물을 바친 끝에 1820년 1월 27일 압둘라의 임명을 얻어내어다. 5개월간의 공위기동안 술레이만의 동맹이던 레바논 산지의 바시르 2세가 대리로 일대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현지인들은 압둘라가 유화적인 통치를 행한 술레이만의 노선을 따를 것이라 기대하며 환영하였다.

2.2. 파르히 숙청

집권 후에도 압둘라는 대부 파르히와 신뢰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의 집에 국고를 둘 정도였다. 한편 압둘라는 현지의 평민 무슬림들과 어울리며 수피 행사인 디크르에 참가하였다. 파르히는 압둘라에게 카디, 무프티, 나킵 알 아슈라프, 울라마 등 상위 계급의 무슬림들과 디크르를 함께 할것을 조언하였지만 소용 없었다. 압둘라는 이 일을 동지들에게 알렸는데, 그의 친구들 중에서 저명한 이는 다음과 같았다. 아틀리트 해안의 아랍인 징세관인 셰이크 마수드 알 마디, 압둘라의 개인 이맘인 셰이크 무스타파, 아크레의 신임 카디인 무함마드 에펜디 아부 알 후다. 기존에 파르히의 정적이던 마수드를 포함한 그들 모두는 파르히가 압둘라에 대한 영향을 이유로 자신들의 새로운 지위를 위협할까 염려하였고, 점차 압둘라에게 파르히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며 반목을 유도하였다. 그들은 파르히가 '오만한 유대인'으로, 속임수를 통해 출세하였고 사사로히 국가 재정을 좌지우지한다고 성토하였다.

또한 그들은 종교적 측면에서 유대인이 무슬림들을 통치하는 것이 용납되는지 반문한 후, 이는 4대 법학파에서 금지되어 있으며 이슬람법에 무지했던 술레이만은 용서되지만 법학을 배운 압둘라는 그럴 여지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압둘라는 이러한 신인들의 주장에 동의하여 국고를 파르히의 집에서 사라이로 이전하게 하였고, 파르히는 군말없이 그에 따랐다. 그후 파르히는 서기장에서 해임되었고, 시돈 출신의 마론파 유수프 카르다히로 대체되었다. 대세를 파악한 파르히는 압둘라에게 가문의 본거지인 다마스쿠스로의 은퇴를 청하였지만, 이미 압둘라는 그가 나머지 친족들과 합류한다면 잠재적 위협으로 남을 것이라 여겨 불허하였다. 마수드와 현지 관료인 우마르 에펜디 알 바그다디 역시 파르히가 살아있는 한 조정과 연줄이 있는 동료 유대인들과 결탁하여 (그를 재위에 올렸듯) 정권에 위협이 될 것이라 설득하였다.

아크레 주재 프랑스 공사에 의하면 그 직후 압둘라는 마지막으로 파르히와 조우하였고, 양측은 설전을 벌였다고 한다. 그리고 파르히가 '너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누구 때문인데?'라는 식으로 쏘아붙인 것으로 '부자'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1820년 8월 8일) 파르히의 제거를 결심한 압둘라는 그날 밤 처남 이브라힘 베이 알 자르카시와 일단의 병사들에게 파르히의 살해를 지시하였다. 파르히는 이를 접하고도 관내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보복의 빌미가 되지 않고자 피신하지 않았다. 이브라힘 베이는 파르히의 집에 들어가 그를 반역자로 몰아 교살하고 저택을 약탈하였다. 압둘라는 파르히의 매장도 불허, 시신을 가족들에게 인도하는 대신 바다에 던지게 하였다. 이후 남은 재산 역시 몰수되었고, 유가족들은 다마스쿠스로 피신하였다.[1] 당대의 역사가 미샤카에 의하면 유능한 행정가로 여겨지던 파르히의 죽음은 종교를 불문한 관내의 모든 지성인들에 의해 애도되었다고 한다.[2]

숙청 후 압둘라는 하임 파르히의 동생 무사 파르히에게 재정관 지위를 제안하였지만 그가 거절하자 마론파 서기장 유수프 카르다히로 대체하였다. 결국 비무슬림 여부는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던 것. 또한 압둘라는 아크레, 사파드의 유대인들에게 파르히의 비호로 그간 수년간 면제되었던 세금을 전부 납부하게 하였다. 한편 파르히의 죽음을 접한 다마스쿠스의 동생 살로몬, 라파엘, 모이세는 형제의 복수를 천명하였다. 이를 위해 형제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터키인 장교들을 고용하였고, 코스탄티니예의 유대인 유력가인 체레비 카르모나에 서신을 보내어 술탄에게 억울함을 호소함과 동시에 아크레 토벌 칙령을 유도하게 하였다. 카르모나는 오스만 제국의 최고 종교 권력인 코스탄티니예의 그랜드 무프티 셰이크 알 이슬람으로부터 알레포, 다마스쿠스 총독들과 다른 두 파샤들로 하여금 형제들에게 군대를 주어 압둘라에 대한 정의 구현을 도우라는 칙령을 내렸다.

2.3. 바시르 2세와의 동맹

집권 직후 압둘라는 여러 차례 바시르 2세에게 현금, 보물 혹은 군마의 형태로 100만 디르함 상당의 조공을 요구하였다. 바시르는 그의 요구가 납부 불가한 수준임을 파악하곤 무답비르 (참모)인 멜키트파 부투루스 카라미를 아크레로 보내 중재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압둘라는 군대를 편성하고 바시르의 반군을 지원하는 것으로 맞섰고, 이에 바시르는 요구를 수용하며 마론파 농민들에게 2년치 지즈야와 카라즈 (토지세)를 부과해 자금 마련에 나섰다. 다만 (무슬림을 표명하는) 드루즈 농민들은 제외되었고, 그에 더하여 압둘라가 부과한 추가적인 5만 디르함까지 부과되자 배신감에 찬 6천의 마론파 농민들은 대주교 유수프 이스티판의 지휘 하에 봉기하였다. 해당 암미야 (민중봉기)에는 야즈바키 부족장 알리 이마드와 시하브 가문의 아미르 2명, 쉬아 셰이크 등이 동참하였고 이참에 바시르를 축출하기로 결심한 압둘라 역시 기존 세금만을 부과하겠다고 약속하며 그들을 지원하였다.

절망한 바시르는 다마스쿠스 총독 데르비시 파샤의 보호 하에 셰이크 바시르 줌블라트 등 소수의 측근만을 대동하고 하우란 지역으로 은거하였다. 압둘라의 지원 하에 야즈바키 가문은 쉬하브 가문 중 순니 무슬림인 하산 이븐 알리와 살만 이븐 사이드 아흐마드를 아미르로 옹립하였다. 동시에 압둘라는 투파, 카루브, 제지네, 비블로스, 알 리한 산지 등을 시하브 가문의 영지에서 떼어내어 시돈 총독의 직할령으로 삼았다. 그러던 1820년, 그리스의 반란에 직면한 조정은 러시아의 개입을 우려하여 압둘라에게 시리아 해안을 방비하고 관내 기독교도들의 무장해제를 지시하였다. 압둘라는 바시르마니 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여겨 그의 복위를 꾀하였고, 이를 위해 하산과 살만에게 무리한 액수인 110만 디르함의 연공을 요구하였다.

이에 하우란의 바시르가 데르비시 파샤가 자신에게 요구했던 5천 피아스터를 약속하며 복위를 청하자 압둘라는 데르비시 파샤에 이익이 되는 것은 참지 못한다고 답하며 수용하였다. 압둘라는 바시르를 아크레 인근 셰파 아므르로 소환하였고, 이에 레바논에서도 바시르의 동맹군이 거병하였다. 하산과 살만은 협상을 통해 퇴위하였고, 1820년 5월 17일 바시르는 복위할 수 있었다. 비록 비블로스, 바트룬 등지의 마론파 농민들이 쉬아 셰이크들과 함께 봉기하였지만 바시르가 드루즈 인들을 동원한 바시르에게 진압되었다.[3] 압둘라는 지즈야를 충실히 바친다는 조건 하에 바시르를 레바논의 아미르로 복위시켰고, 빼앗았던 시하브 가문의 영지도 비블로스를 제하고 돌려주었다. 그리고 1821년 양측은 데르비시 파샤에 대한 동맹을 결성하였다.

2.4. 아크레 공방전 (1822년)

한편 파르히 가문의 복수는 착실히 준비되고 있었다.1822년 초엽 다마스쿠스 총독 다르위시 파샤는 파르히 형제들의 부추김 하에 압둘라와 골란 고원, 나블루스, 베카 협곡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종종 무력 충돌을 벌였다. 한편 압둘라는 바시르에게 유대인들이 제국과 공모하여 자신과 맞서고 있으며 자신을 해임하고 시돈 에얄레트를 다마스쿠스에 합병하려 한다며 도움을 구하였다. 압둘라의 모친 역시 압둘라의 과거 실책들[4]을 언급하면서도 주종 관계를 명시하며 행동을 요구하였고, 바시르는 지속적으로 압둘라를 섬기며 휘하에서 싸울 것이라고 답하였다. 바시르와 만난 압둘라는 그에게 군대를 모아 야곱의 여울[5]에서 자신과 합류할 것을 지시하였다. 바시르는 1만 2천의 병력을, 압둘라는 이브라힘 아가 알 쿠르디 휘하 4천 병력을 편성하여 합류하였고 함께 요단강을 건너 다마스쿠스로 진군하였다. 1만 6천의 연합군에 맞서 다르위시 파샤는 드루즈 야즈바키 가문과 만수르 시하브 등과 함께 다마스쿠스 서남쪽 외곽 메제에 주둔하였다. 그리고 1822년 5월, 양측은 메제 부근에서 격돌하였다.

다르위시 파샤는 메제에 배치된 대포 덕에 초반에 우세를 점하였지만 압둘라 휘하의 맘루크 기병대가 돌격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다르위시 파샤의 진영은 무너졌고, 그는 1천 2백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압둘라 측은 고작 40명의 전사자만을 내었고, 이후 그는 다마스쿠스를 포위하였다. 다만 도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삼가며 조정과 다르위시 파샤의 동맹인 알레포 총독 무스타파 파샤와 아다나 총독 바흐람 파샤의 이탈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압둘라를 반도로 매도하며 시돈 총독에서 해임하는[6] 조정의 칙령이 하달되자 어느 한쪽 편을 들기 난감해진 바시르는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에게 망명하였다. 압둘라 역시 다마스쿠스 포위를 풀고 아크레로 후퇴, 도시의 방어를 강화하였고 그 역시 메흐메트 알리의 개입을 청하였다. 바시르가 돌아오기 전에 시돈 에얄레트를 합병하기로 한 다르위시 파샤는 파르히 형제들과 진격, 압둘라가 파병한 병력을 격파하고 갈릴리를 정복하였다.

그는 점령지마다 새로운 지방관을 임명하며 압둘라 파샤 정권을 대체하려는 의지를 보였고, 마침내 아크레에 이르러 도시를 포위하였다. (1822년 7월)[7] 무스타파, 바흐람 파샤 역시 파병하여 포위를 도왔고, 살로만 파르히 역시 포위 진영에 함께 머물며 경비를 제공하였다. 압둘라는 근위대를 포함한 정규군과 아랍/튀르크 비정규군으로 구성된 2천의 수비대를 이끌고 맞섰다. 5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다르위시 파샤는 시돈 총독에서 해임되었고, 무스타파 파샤로 대체되었다. 또한 포위 도중 살로만 파르히가 압둘라의 자객에 의해 암살[8]당하며 포위군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마침내 1823년 메흐메트 알리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여념이 없던 조정과 협상[9], 압둘라 및 바시르의 사면과 재임명을 이끌어내었다. 해임된 무스타파 파샤는 알레포로 회군하였고, 그와 압둘라 모두 양측의 갈등을 유발했다며 파르히 가문을 고발하였다. 무스타파 파샤의 고발장을 접수한 마흐무트 2세는 마침 진행되던 예니체리 숙청에 있어 그들과 친한 파르히 가문 역시 탄압에 나섰다. 이는 1823년 5월 헤세키엘 알 바그다디와 동생 에즈라가 처형되며 마무리되었다.

2.5. 재임명과 레바논 개입

압둘라의 복위는 점점 확대되는 메흐메트 알리의 영향력과 유대인 은행가들에 대한 제국의 정책 변화를 암시하였다. 한편 조정은 압둘라에게 포위의 경비인 2만 5천 푸르세를 벌금으로 내도록 하였고 그의 관할 중 트리폴리, 라타키아, 가자, 야파 산작을 납부가 완료될 때까지 압수하였다.[10] 다만 압둘라 역시 공성전 도중 국고를 탕진하였기에 벌금 전부를 다르위시 파샤의 연맹에 합류했던 레바논 쇼우프의 셰이크 바시르 줌블라트에게 벌금으로 부과하였다. 이에 개입한 바시르 2세는 하우란 피신 당시 함께했던 바시르 줌블라트를 위해 자신이 벌금의 2/3을 내주고 1/3만 그가 부담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납부가 완료되자 1824년 조정은 압둘라에게 가자와 야파 산작을 우선 반환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셰이크 바시르는 야즈바키와 아르슬란 가문 등 바시르 2세의 반대파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수도 베이트 엣 딘을 점령한 후 바시르 2세를 격파하였다. 그러던 1825년 1월 2일, 압둘라는 위기에 처한 바시르 2세에게 5백 알바니아 보조병을 원군으로 보내주었다. 이에 힘입은 바시르 2세는 반격에 나서 줌블라트 가문의 근거지인 무크타라 부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셰이크 바시르와 알리 이마드는 하우란으로 도주하였는데, 다마스쿠스 총독에게 사로잡혀 후자는 처형당하고 전자는 아크레로 압송된 후 감금되었다. 압둘라는 바시르 2세의 동맹인 메흐메트 알리의 요청에 따라 셰이크 바시르를 교살하였다. (1825년 6월 11일) 이로써 바시르 2세는 레바논 산지에 대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었다.

2.6. 세력 확장

1825년 예루살렘에선 봉기가 일어나 반군이 도시를 장악하고 징세관이 축출되었는데, 다마스쿠스 총독 무스타파 파샤는 진압에 실패하였다. 이에 조정은 압둘라에게 질서 회복을 맡겼고, 그는 적은 출혈로 예루살렘의 안정을 되찾았다. 이로써 제자르, 술레이만 파샤 때와 마찬가지로 압둘라 역시 사실상 팔레스타인 전역에 대한 영향력을 얻었다. 또한 압둘라는 공식적으로는 시돈 에얄레트에서 분리된 트리폴리 일대의 행정에 있어서도 영향력을 미쳤다. 1824년 트리폴리 총독 술레이만 베이 알 아젬이 핫지 카라반의 보호를 맡아 떠난 틈에 트리폴리에선 옛 징세관 무스타파 아가 바르바르가 주도 하에 임시 총독 후세인 베이 알 아젬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압둘라는 이에 개입, 당시 베이루트에 근거지를 두던 무스타파 아가에게 반란 책동의 중단을 요구하였다. 제자르, 술레이만 파샤와 동맹이었던 무스타파 아가는 그 후계자의 부탁에 순응하였고, 트리폴리로 돌아온 술레이만 베이는 곧 사망하였다. 그후 부임한 아카르의 알리 아가 알 아사드는 압둘라의 봉신이었고, 1827년 마침내 조정은 트리폴리의 안정 회복에 적임자라 판단된 압둘라에게 지배권을 돌려주었다. 이에 압둘라는 무스타파 아가를 트리폴리 태수로 복귀시켰다. 1830년 10월 조정은 예루살렘, 나블루스, 헤브론 산작을 공식적으로 압둘라의 통치 하에 맡겼다. 이는 기존에 일대를 관리하던 다마스쿠스 총독 메흐메트 파샤가 미리 (순례세)를 제대로 걷지 못한 것과 임박한 메흐메트 알리의 시리아 침공에 있어 유일하게 적수가 될 수 있는 아크레 정권에게 정치적 힘을 실어주려는 두 요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한세기 가량 사실상 자치를 누리던 나블루스 산지의 현지 셰이크들에 대해 압둘라는 직접 지배에 나섰다. 그들 중 가장 강력했던 자라르 가문은 압둘라의 간섭을 거부하였다. 자라르 가문의 거점인 사누르는 자히르 알 우마르나 제자르 파샤 같은 선대 군벌들과 여러 다마스쿠스 총독들의 포위를 견뎌낸 요새였다. 베이루트의 프랑스 영사에 따르면 압둘라는 자라르 가문을 격파하고 사누르를 점령함으로써 세계의 위대한 장군들 중 하나가 될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1830년 12월, 압둘라는 바시르의 병력과 함께 사누르를 포위하였다. 3개월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1831년 3월 사누르 수비대는 항복 혹은 도주하였고, 도시는 점령되었다. 공성전 도중 화약과 포탄에 엄청난 지출을 벌인 압둘라는 성채를 허물었다. 다만 승리 후 그는 메흐메트 알리의 시리아 침공이 구체화됨에 따라 나블루스 산지의 셰이크들과 화해하고 수비 준비에 치중하였다.

2.7. 이집트의 침공과 항복

아라비아, 그리스 파병을 대가로 시리아 지배를 갈구하던 메흐메트 알리는 만반의 준비 끝에 1831년 11월 아들 이브라힘 파샤 휘하의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표면상 침공의 명분은 압둘라가 징병 / 군포 / 노역의 선택지를 6천의 이집트 농민들을 수용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브라힘 파샤는 별 저항을 받지 않고 가자와 야파를 점령하였고, 압둘라는 아크레를 요새화하기에 바빴다. 한편 메흐메트 알리의 동맹 바시르[11]는 나블루스 산지의 주요 셰이크인 아라바의 후세인 압둘 하디에게 이집트 군에 대적하지 말 것을 조언하였다. 그리고 바시르 본인 역시 이브라힘 파샤가 시리아에 당도하자 압둘라와의 동맹을 깨고 이집트 진영에 합류하였다. 이에 압둘라는 비로소 바시르의 종교를 걸고 넘어지며 그를 '신뢰할 수 없고 은혜도 모르는 불신자'라고 욕하였다.

1831년 12월 이브라힘 파샤는 압둘라의 여름 거처인 하이파를 점령한 후 아크레를 포위하였다. 바시르의 병력과 합류한 이집트 군은 몇달간 아크레를 포격하며 수비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1832년 5월 29일 이브라힘 파샤는 전군을 모은 후 모든 방면에서 아크레 성벽에 대한 포격을 강화하였다. 성벽에 틈이 생기자 이집트와 마론파 기병대가 돌격,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가족들과 지하 벙커에 숨어있던 압둘라는 외벽이 뚫렸고 남은 병력이 350명에 불과하다는 절망적인 보고를 접하자 패배를 시인하고 성문을 열어 항복하였다. 이브라힘 파샤는 아크레를 약탈하였지만 압둘라만큼은 명예롭게 대해주었다. 항복 후 압둘라는 이집트로 보내져 한때의 동맹 메흐메트 알리의 환대를 받았고, 매달 연금과 함께 명예직으로써 와지르에 봉해졌다. 얼마동안 이집트에 머무런 압둘라는 히자즈로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메흐메트 알리의 허가를 받아 그곳으로 이주한 후 숨을 거두었다.

3. 평가

압둘라 파샤는 일명 '아크레 정권'의 마지막 군벌이었다. 정치에 있어 그는 선대인 술레이만 파샤 시기의 연로한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대표적으로 파르히가 있고, 아부 나부트와 친했던 맘루크들 역시 포함되었다. 그 자리에는 젊은 맘루크들로 채웠는데, 예를 들어 나사렛의 징세관으로 임명된 살림 아가는 겨우 17세였다. 기존 맘루크들은 해임된 후 연금으로써 시돈 에얄레트 각지의 징세관으로 임명되었다. 점차 맘루크들을 배제한 결과, 압둘라의 치세 말엽에 이르면 군사 지휘관들 중 맘루크는 전무하게 되었다. 이로써 레반트 지방에서 700년 가량 이어지던 맘루크 체제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와는 달리) 비교적 조용히 막을 내리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는 오스만 제국에서 예니체리를 숙청하고 신식 군대를 전면 도입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압둘라의 군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적다. 전반적으로 아랍 하와라 민병대가 주축이었으며, 쿠르드 민병대, 마그레브 용병도 있었다. 1831-32년 아크레 포위 당시에는 후세인 아가와 함디 아가가 하와라 부대의 지휘관이었고 (술레이만 파샤 시기 지휘관 중 유일히 자리를 지킨) 샴딘 아가가 달라트 기병대를 이끌었으며 알리 아가 파라하트가 마그레브 용병대의 지휘관이었다. 전체 병력은 2천 상비군이었지만 1824년의 경우 하와라, 달라트, 마그레브, 알바니아 부대까지 합쳐 3천에 육박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필요하다면 각종 드루즈 가문들과 동맹 바시르 2세의 병력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압둘라의 지출은 아크레의 국고에서 직접 차출되었다. 줄어드는 세수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술레이만 파샤가 설정한 자유 무역을 폐지하고 시리아의 면화 수출과 수입품에 대한 아크레의 독점을 강화하였다. 다만 이는 역효과를 낳아 상인들이 아크레를 회피하게 되었고, 나블루스의 목화는 대신 베이루트를 통해 수출되었으며 프랑스 영사관 역시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한 프랑스 영사는 보고서에서 압둘라가 주변을 폐허로 만들고 전국이 고립과 가난에 시달리게 만들었다고 혹평하였다. 역사가 토마스 필립에 의하면 다마스쿠스의 정치적 불안과 그리스 독립 전쟁에 전념한 오스만 조정 덕에 압둘라 정권의 위태로움을 숨길 수 있었다고 한다. 1832년 그의 패배와 함께 아크레의 자치 지위와 시리아 해안에서의 정치적 영향력 역시 사라졌다.


[1] 파르히의 부인은 여독이 쌓여 도중 사파드에서 사망함[2] 한 역사가는 파르히의 죽음이 처음으로 아크레의 존립 자체에 위협이 되었다고 한다[3] 이러한 민중 봉기는 19세기 중반 마론파와 드루즈 간에 벌어진 내전의 전조로 여겨진다[4] 바시르를 적대하고 파르히를 죽인 것 등[5] 사파드 부근, 요단강 도강 장소. 옛 십자군 성채가 위치함[6] 다르위시 파샤로 대체[7] 혹은 1821년 4월 파르히 형제들이 공격, 14개월간 포위했으나 큰 형인 살로만이 압둘라의 자객에 의해 암살되자 성공을 비관한 동생들은 포위를 풀고 다마스쿠스로 회군하였다고도 함[8] 독살이 유력하나 칼에 찔렸다고도 함[9] 당시 메흐메트 알리는 그리스에 파병해 진압을 돕고 있었기에 조정은 그를 무시할 수 없었음[10] 모두 제자르 파샤와 술레이만 퍄사 전에는 본래 시돈 에얄레트의 관할이 아니었다[11] 그는 1822년 자신의 망명과 복위를 도와준 대가로 메흐메트 알리에게 그가 필요할 때면 4천의 병력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