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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19:59:16

아타나시오

파일:라틴 십자가.svg 동방교회의 4대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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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 of Alexandria)
출생 290년
사망 373년 5월 2일
직위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1. 개요2. 생애3.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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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정통교회가 삼위일체론을 수용하고 아리우스파이단으로 정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 가톨릭, 정교회, 콥트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에서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교회학자로 선정되었다. 축일은 5월 2일이다.

2. 생애

290년대에 고대 이집트의 중심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다. 그는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자라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자주 들리면서 학문을 닦는 한편 독실한 신앙을 가졌으며, 사막에서 활동하던 교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수도자들로부터 엄격한 규율을 배우고 지켰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으며, 성격이 무척 불같았다고 한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알렉산데르의 심복이 되어 사목활동을 전개했다.

319년경 부제(보제)로 선임된 그는, 알렉산데르 대주교와 아리우스성부성자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벌일 때 알렉산데르의 편에 섰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중 으뜸 되는 존재이며,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 전에 말씀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알렉산데르와 아타나시오는 "성자는 신적인 것이므로 창조될 수 없고, 성부와 함께 영원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데르 등이 예수를 신으로 추앙함으로써 유일신론을 부인한다고 비판했고, 알렉산데르와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따른다면 교회는 그동안 피조물을 흠숭한 게 된다"라며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아타나시오는 아리우스의 주장이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역할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며 아리우스를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아리우스는 알렉산데르와 심한 갈등을 벌이다 파문 통보를 받자 니코메디아의 대주교 에우세비우스를 찾아가 자신의 이론을 설명했다. 에우세비우스가 지지 의사를 밝히자, 그는 재차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알렉산데르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자신의 이론을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알렉산데르가 단호히 거부하자,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이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이집트 뿐만 아니라 레반트 전역에서 거세게 전개되었다. 324년 로마 제국을 통합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알렉산데르파와 아리우스파에게 서한을 보내 "니케아에서 이 문제를 놓고 논의하자"고 권고했고, 두 세력 모두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325년에 개최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데르 대주교와 함께 참석했다. 그가 공의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니케아 신조를 작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후대에 정설로 굳어졌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회의에 참석하긴 했지만 발언 기회를 거의 부여받지 못했고, 공의회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한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데르 대주교와 아리우스를 지지하는 니코메디아 대주교 에우세비우스였다. 공의회에 참석한 서방교회 인사들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때에서야 처음 접했는데, 성자가 피조물이라는 말에 격분하여 연설 중이던 에우세비우스를 강제로 끌어냈다. 그리하여 니케아 공의회는 아리우스 일당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체(ὁμοούσιος)'임을 규정하는 니케아 신경을 공표했다.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가 사망한 뒤, 그는 5월 9일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에서 새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대주교가 되기엔 어려보여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고, 그 자신도 대주교가 되기 싫어서 공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직자들이 그 외에는 적임자가 없다며 강권하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대주교에 선임된 직후 이집트와 리비아 각지를 전전하며 여러 교회를 방문했다. 이 기간 동안 콥트 수도자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성 파코미우스와 중요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는 곧 시련에 직면했다. 이집트의 멜레티우스파 교회가 요안니스 아르카프 주교의 지휘 아래 아타나시오에 대한 공세를 개시한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사기와 매수, 신성모독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이게 통하지 않자, 그들은 멜레티우스파의 한 주교가 아타나시오의 선동으로 폭도들에 의해 사지가 찢겨 죽었다는 고발을 했다. 그는 죽었다는 주교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누명을 벗었다. 그러자 멜레티우스파는 어느 젊은 여자를 매수 또는 협박해서 아타나시오에게 강간당했다고 증언하게 했다. 그러나 그 여자가 법정에서 범인을 구별하지 못해서, 그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는 데 동의했지만, 주변의 친아리우스 성향의 측근들의 설득을 받고 점차 아리우스에게 긍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특히 황제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훗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를 집필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던 에우세비우스[1]는 아타나시오가 교회의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334년 카이사레아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아타나시오가 참석을 거부하는 바람에 취소되자, 황제는 에우세비우스의 주장에 동조했다.

335년, 황제는 즉위 30주년 기념행사로 예루살렘에 성묘 성당을 재건하여 봉헌하기로 했다. 그는 그곳에서 제국 전역의 주교들을 소집해서 대규모 주교회의를 개최하려 했다. 하지만 먼저 교리를 통합시켜 분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기로 하고, 예루살렘으로 오는 주교들에게 그 길목에 있는 티루스에서 먼저 종교회의를 열어 "불령스런 요소를 교회에서 제거하고 짐의 근심을 덜어달라"고 명령했다. 이번에는 아타나시오도 참석했지만,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이 대부분 아리우스파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온갖 인격모독을 당했다. 급기야 6명의 주교로 구성된 조사 위원회가 사람을 이집트로 보내 아타나시우스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수집하려 하자, 아타나시오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다. 그는 궐석 상태에서 해임되었고, 주교들은 본래 목적지였던 예루살렘으로 갔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한 아타나시오는 황제를 접견하려 했다. 황제가 거부하자, 그는 황제가 말을 타고 거리를 거닐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 그의 말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호소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훗날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와 그의 일행은 그간의 고통으로 몹시 힘든 기색이었다. 그래서 나는 깊은 연민을 느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거룩한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리스도교도들이 전능하신 신을 경배하게 된다는 아타나시우스구나."

그러나 6명의 주교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려와서 "아타나시오가 알렉산드리아 항구의 노동자들을 부추겨 파업을 획책하고 있다"고 고발하자, 황제는 분노했다. 아타나시오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결국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현재의 트리어)로 유배되었다. 그 후 아리우스가 황제의 명에 따라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부임하였으나,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켰고, 콥트교회의 수장인 이집트의 안토니오가 콥트어로 적힌 편지를 보내 아타나시오를 옹호했다. 황제는 336년 아리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러들어 신앙검증을 하려 했지만, 아리우스가 돌연 사망하는 바람에 무위에 그쳤다.

이후에도 유배 생활을 하던 아타나시오는, 콘스탄티노스 1세가 사망한 직후인 337년 11월 23일이 되어서야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338년, 동방의 황제이자 아리우스파 신도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타나시오를 다시 추방했다. 아타나시오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1세에게 호소했다. 교황은 시노드를 로마에서 소집한 뒤, 몇달간의 조사를 거친 후 아타나시오가 결백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추방령을 취소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리우스파 주교인 카파도키아의 그레고리오가 아타나시오를 대신해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지만, 알렉산드리아 신자들은 아타나시오의 복귀를 갈망했다. 339년 또는 340년 이집트의 주교 100명이 황제에게 연명 상소를 올려 "아타나시오의 복귀를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343년 세르디카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오의 무죄가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2세는 추방령을 철회하지 않았다.

345년 6월 그레고리오 대주교가 피살되자, 세르디카 공의회에 참석했던 주교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아타나시오를 복귀시켜 달라"고 청원했다. 게다가 동생 콘스탄스가 대군을 이끌고 국경에 이르러 "아타나시오를 더 이상 핍박하지 말라"고 요구하자, 사산 왕조가 갈수록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서 동생과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타나시오를 안티오키아로 불러들여서 대화를 나눈 후 추방령을 철회하고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하게 하였다. 아타나시오는 346년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여 군중으로부터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그 후 10년간 아리우스파에 대한 대결과 망명 및 귀환에 관한 글을 집필했다.

그러나 351년 9월 28일 무르사 전투에서 마그넨티우스를 무찌르고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타나시오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그는 밀라노에서 시노드를 열어서 아타나시오를 이단으로 판정하고 교황 리베리오에게 이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리베리오는 이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355년 콘스탄티우스 2세가 보낸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이틀 후 트라키아로 유배되었다. 결국 리베리오는 일시적으로 굴복하여 아타나시오를 정죄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아타나시오는 356년 밤 미사 도중 자신을 잡으려드는 병사들을 피해 상이집트로 달아났다. 그는 망명 중에 <도주에 대한 사과>,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사과>, <수도자에게 보내는 편지>, <아리우스파의 역사>를 집필했다. '콘스탄티우스에 대한 사과'에서는 황제에게 체포령을 피해 달아난 점을 정중하게 사과하면서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였고, '아리우스파의 역사'에서는 콘스탄티우스 2세를 적그리스도로 간주했다.

361년 11월 4일 콘스탄티우스 2세가 사망했고, 율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 등극했다. 당시 아리우스파 성향의 대주교 게오르기오스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인사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폭동을 일으켰고, 게오르기오스를 살해했다. 율리아누스는 추방된 주교들이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고, 아타나시오는 362년 2월 22일 알렉산드리아 주교청으로 복귀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회의를 소집하여 모든 이가 한 마음으로 통합되어 교리의 일치를 봐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공의회에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었으며, 성령의 신성, 그리스도의 인성 또는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을 정죄했다. 이단으로 찍힌 주교가 회개하면 온화한 보속을 내렸지만, 핵심 이단들에게는 가혹한 보속이 뒤따랐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아타나시오를 위험인물로 여기고, 이집트 총독 엑디시우스에게 "아타나시오를 다시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신자들이 황제의 명령에 항의하며 그를 지키려 하자, 그는 "얼마 안 있어 돌아올 테니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촉구해 자택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362년 상이집트로 다시 떠난 그는 363년 6월 26일 율리아누스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리아로 비밀리에 돌아왔다. 새 황제 요비아누스는 그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임명하는 걸 동의했다. 아타나시오는 363년 9월 니케아 신경을 재확인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해 모두의 동의를 받아낸 뒤, 안티오키아로 가서 요비아누스와 면담을 갖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요비아누스는 이에 긍정적인 답을 하였으나, 364년 2월 돌연사했다.

366년, 친아리우스 성향의 동방 황제 발렌스는 아타나시오를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외곽에 머물며 조용히 지내다가 황제가 몇달만에 명령을 철회하면서 주교청에 돌아왔다. 이후 설교와 집필에 전념하며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의한 성육신에 대한 관점을 강조하였다. 373년 5월 2일 보제들 중 한 명인 베드로를 후계자로 지정한 뒤 추종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사후 알렉산드리아에 묻혔다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키에사 디 산 자카리아 교회로 옮겨졌다. 가톨릭, 정교회, 콥트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였고, 축일을 그가 사망한 날짜인 5월 2일로 정했다.

3. 저서

아타나시오는 5차례에 걸쳐 추방당하고 수많은 정적의 맹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여러 저서를 집필하며 자신의 뜻을 널리 알렸다. <니케아 공의회 법령에 관한 편지>에서 니케아 공의회 절차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설명을 하였으며, 367년경에 신약성경 27권 목록을 최초로 정의한 서신을 작성하기도 했다. 또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옹호하며 예수를 하느님의 신성한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걸 강조하는 편지를 집필하였으며, <아리우스파의 역사>를 집필해 예수가 피조물일 뿐 신이 아니라는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강력히 비판했다. 한편, 그는 구약성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고 여러 주석을 달았다. 특히 <시편의 말씀을 영적 실천에 적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마르첼리누스에게 보낸 편지>는 후대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타나시오는 일찍이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할 때 깊은 관계를 가졌으며, 망명생활을 하던 자신을 위해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던 은수자 이집트의 안토니오의 전기를 집필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하느님께 삶을 봉헌한 안토니오를 찬미하며, 독자들에게 이를 본받아 훌륭한 성인이 되라고 권했다. 후대의 수도자들은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표본으로 삼아 수도원 규칙에 적용하였다.


[1]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