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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무스탄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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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타밈 마아드 알 무스탄시르 빌라
영어 Abu Tamim Ma‘ad al-Mustansir Bi-llah

재위 1036년 6월 13일 ~ 1094년 12월 29일
생몰 1029년 7월 5일 ~ 1094년 12월 29일[1]

1. 개요2. 치세
2.1. 일시에 그친 시리아 통일2.2. 바그다드의 쉬아 쿠트바2.3. 카이로의 혼란기 (1065 ~ 73년)2.4. 바드르 알 자말리의 집권
3. 죽음

1. 개요

파티마 왕조의 8대 칼리파. 불과 6세의 나이로 불안정한 제국을 물려받은 그는 불행히도 평범한 군주였다. 당시 파티마 조는 경제적으로는 절정에 이르렀지만 정치적으로는 베르베르, 누비아, 튀르크 군벌들 간에 분열되어 있었으며 결국 그들의 내란으로 카이로는 큰 피해를 입었다. 내전은 아르메니아인 군벌 바드르 알 자말리가 집권하며 종식되었다. 하지만 셀주크 제국이 시리아를 정복하고 레바논 해안도 독립하는 등 파티마 제국의 영토는 이집트에 국한되었다. 이러한 혼란기 속에서도 58년간 재위한 그는 비록 실권은 미약했지만 이슬람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칼리파이다.

2. 치세

부왕 앗 자히르와 누비아 출신 흑인 노예 라사드 사이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만에 후계자로 선포되었고 불과 6살에 칼리파로 즉위하였다. 치세 초반부에는 태후 라사드가 섭정하였다.

2.1. 일시에 그친 시리아 통일

1038년 다마스쿠스 총독 아누슈테킨이 미르다스 왕조를 격파하고 알레포를 장악, 시리아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카이로의 와지르 알 자자리는 그를 경계하여 시리아 주둔 파티마 군대의 반란을 유도하였고 결국 아누슈테킨은 알레포로 피신했다가 병사한다. 그리고 알 자자리의 승인 하에 미르다스 왕조가 알레포를 수복하며 시리아는 다시 분열되었다. (1042년) 경쟁자를 제거한 알 자자리 역시 3년 후에 사망한다. 한편 뒤늦게 아누슈테킨이 충신이었음을 깨달은 알 무스탄시르는 1057년 알레포에 매장된 그의 유해를 공신들이 묻히던 예루살렘 (알 쿠두스) 묘역으로 이장하도록 하였다.

2.2. 바그다드의 쉬아 쿠트바

1056년, 부와이 왕조 휘하 튀르크인 장군이던 아불 하리스 아르슬란 알 무자파르 알 바사시리는 셀주크 제국토그릴 1세바그다드를 장악하자 라흐바로 도주한 후 파티마 조에 복속했다. 알 무스탄시르는 다이 (선교사) 알 무아야드를 통해 50만 디나르 금화 및 그 상당의 의복, 활 1만개, 검 1천개, 말 5백필, 다수의 창과 화살을 보냈다. 알 무아야드가 라흐바에 당도하자 마즈야드 왕조의 두바이스와 우카일 왕조의 쿠라이쉬 등 현지 아미르들이 파티마 조에 복속해왔다. 1057년 초엽 이라크로 진군한 바사시리는 신자르에서 쿠탈미쉬 휘하 셀주크 군을 격파한 후 모술에 입성하여 알 무스탄시르 명의로 금요 예배를 행했다.

이에 토그릴이 반격에 나서 바사시리를 격파, 모술을 수복하고 신자르를 초토화했다. 라흐바로 귀환한 알 바사시리는 다시 반격할 때를 노렸다. 1058년 초엽, 알 무아야드는 토그릴의 형제 이브라힘 이날에게 연락해 파티마 칼리파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그의 찬탈을 돕기로 하였다. 이에 이날은 모술을 알 바사시리에게 넘겼고, 후자는 시타델의 셀주크 수비대를 4개월간 포위한 끝에 항복시키며 모술을 재점령했다. 다만 얼마후 그는 라흐바로 철수했고, 토그릴은 손쉽게 모술을 회복했다. 이후 토그릴이 누사이빈으로 진군하자 알 바사시리는 파티마령 다마스쿠스로 철수했다.

그 무렵, 이날이 지발에서 거병하여 토그릴이 진압에 나서자 알 바사시리는 이라크로 돌아와 히트안바르를 점령했다. 뒤이어 바그다드로 진격해 1058년 12월 27일, 쿠라이쉬 휘하 4백의 맘루크 기병대 및 자신 직속의 2백 튀르크 기병대와 함께 티그리스강 서안의 시가지를 장악했다. 뒤이은 금요일인 1059년 1월 1일, 쉬아세가 강한 바그다드 서부에서 알 무스탄시르 명의의 쉬아 예배가 거행되었다. 1월 8일에 알 바사시리는 강을 건너 동안의 시가지도 장악한 후, 역사상 처음으로 바그다드 대사원에서 쉬아 칼리파의 명의로 금요 예배를 드렸다.[2]

이후 군사 활동을 재개한 알 바사시리는 와시트바스라를 정복하며 순식간에 이라크 대부분을 석권했다. 다만 뒤이어 벌인 후제스탄 침공은 그 총독 하자라스프 빈 반키르에게 격퇴되었고, 알 바사시리는 아무 조건 없이 그와 휴전을 맺고 9월에 와시트로 철수했다. 한편 그해 7월 이날의 난을 진압한 토그릴은 알 바사시리에게 압바스 칼리파의 석방 및 그의 명의로 쿠트바와 동전 주조를 하는 (사실상의 복속) 대가로 바그다드 지배권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절되자 출병하였다. 알 바사시리는 도주하였고, 1060년 1월 4일, 토그릴은 알 카임과 함께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이로써 파티마 칼리파 명의의 금요 예배가 40번이나 진행된 끝에 압바스 칼리파 명의의 쿠트바가 회복되었다. 이후 알 바사시리는 쿠파에서 계속 셀주크 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2.3. 카이로의 혼란기 (1065 ~ 73년)

아누슈테킨의 후임자로 다마스쿠스 총독이 된 나시르 앗 다울라 이븐 함단은 전임자보다 더 야심이 많았다. 그는 튀르크 병력과 누비아 병력 간의 내전 (1067 ~ 1073년)에서 전자의 지도자였다. 한편 6년간의 내전은 1065년 ~ 1072년간의 기아와 겹치며 파티마 조의 쇠퇴에 결정타를 날렸다. 이집트는 분열되어 튀르크 병력이 카이로, 베르베르 병력이 델타 해안 , 누비아 병력이 상 이집트를 점거하고 시리아는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 알레포의 미르다스 조는 이미 1070년부터 압바스 칼리파의 이름으로 금요 예배를 하였다.

초기의 내전 끝에 나시르 앗 다울라가 카이로를 장악하였는데 이에 칼리파는 아르메니아인 장군 바드르 알 자말리를 이용해 그를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시리아 내륙에 이어 티레의 이븐 아부 아킬, 트리폴리의 아민 앗 다울라 아부 탈립 알 하산 이븐 암마르 등 경제적으로 중요한 레반트 해안마저 자립하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 알 무스탄시르는 그나마 충성하는 베르베르-아르메니아 병력을 바드르 알 자말리에게 팔레스타인으로 보냈다. 그는 아크레를 거점으로 반란 진압에 나섰다. (1070년)

그 틈에 나시르 앗 다울라는 재차 카이로를 장악했고 부하들의 급료를 지불하기 위해 지난 백년간 지어진 파티마 조의 궁전들과 도서관을 약탈하였다. 그는 바드르가 시리아에 묶여 있도록 베두인들의 반란을 사주하였고[3] 동시에 동족인 셀주크 제국에 알 무스탄시르를 폐위하고 압바스 칼리파에게 복속하겠다는 조건으로 도움을 청하곤 금요 예배를 바그다드 칼리파의 이름으로 언도하였다.

1073년 봄 학정을 일삼던 나시르 앗 다울라는 다른 튀르크 군벌에게 살해되었고 그의 가문은 멸족되었다. 비록 탐욕스러웠지만 튀르크 군대를 제어할 수 있었던 나시르 앗 다울라가 사라지자 이제 그들의 횡포는 절정에 달하였다. 1073년 내내 무정부 상태가 이어졌고, 보다 못한 알 무스탄시르는 그해 말엽 아크레 총독 바드르 알 자말리에게 몰래 개입을 청하였다. 바드르는 자신의 아르메니아인 친위대를 대동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승낙, 연말 무렵 다미에타에 당도하였다.

2.4. 바드르 알 자말리의 집권

파일:Bab_Zuwayla_Cairo_12_0864.jpg파일:주유쉬 모스크 복원.jpg
1080년대 셀주크 조의 침공에 대비해 지어진 카이로의 성벽 바드르가 아들 아우하드의 기리며 세운 주유쉬 사원의 복원 전/후 모습

1074년 1월, 바드르는 별 의심을 받지 않고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그는 자신과 칼리파 간의 밀약을 눈치채지 못한 채 방심하고 있던 튀르크 군벌들을 일거에 모두 암살해버리며 9년간 이어진 혼란을 끝냈다. 알 무스탄시르는 바드르를 '아미르 알 주유쉬' (군사령관)라는 칭호와 함께 와지르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파티마 조의 전권은 와지르에게로 이양되었고 칼리파는 바그다드의 경쟁자들처럼 종교적 권한만 지니게 되었다.[4] 그럼에도 이집트는 안정을 되찾았고 파티마 조는 백년을 더 연명할 수 있었다.

바드르는 알 무스탄시르보다 많은 7천의 친위대를 거느렸고 이들은 파티마 조의 새 군대인 주유쉬야의 핵심이 되었다. 한편 카이로를 장악한 그는 해안 지방 수복에 나서 알렉산드리아를 마지막으로 델타 지방을 평정한다. 이후 상이집트 재정복에 나섰는데, 몇년간 자치를 누리던 토착 아랍 부족들이 강하게 저항했지만 1076년까지 진압되었다. 이러한 업적과 함께 알 무스탄시르는 더욱 실권에서 멀어져갔다. 비록 이스마일파의 우위가 회복되었지만 바드르는 수니파나 다른 시아파, 기독교 등도 존중해주었고 종교 업무에 깊히 관여하여 교회와 모스크 모두의 건설을 후원하였다.

바드르는 동족인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민을 종교에 상관없리 장려해 친위 세력으로 삼았다. 1090년대에 이르면 이집트의 아르메니아인은 10만에 육박하였고 그중 대부분이 믿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기존 콥트 교회와 함께 이집트 기독교의 양대 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아르메니아 인들은 엘리트 층으로서 행정과 군사 부문에 기용되었고 이러한 풍조는 1160년대까지 한세기 가량 이어진다. 그외에 바드르는 행정 개혁에 착수하여 헬레니즘 시기부터 60-90여개의 쿠라로 나뉘어 있던 이집트를 23개 주로 개편하였다.[5]

파티마 조의 중흥과 함께 혼란기를 틈타 압바스 칼리파를 인정했던 메카, 메디나의 샤리프들이 1075년 다시 파티마 칼리파에 복속하였다. 같은해 다마스쿠스에선 형제 간의 내분이 벌어져 아트시즈의 동생 만클리가 바드르와 연락하고 자신의 영지 아크레의 금요 예배에서 알 무스탄시르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다만 얼마 안되어 만클리는 형에게 패하고 북쪽의 루파이나로 피신한다. 아트시즈는 내친 김에 1076년 10월 이집트로 진군하였다. 바드르는 지하드를 선포해 그를 격파한 후 휘하 아르메니아인 장군 나스르 앗 다울라를 보내 반격에 나섰다. (1079년)

이에 아트시즈는 셀주크 측에 도움을 청하였고 왕제 투투쉬가 남하하자 파티마 군은 철수하였다.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투투쉬는 아트시즈를 처형하고 시리아 남부를 셀주크 령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1080년대에 걸쳐 바드르는 셀주크 제국의 침공에 대비하여 진흙 벽돌로 된 카이로 성벽을 석재로 교체하였다. 다만 그가 사망하는 1094년까지 평화 시기가 이어졌다. 특기할 점으로는 1085년 바드르의 아들 아우하드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처형된 것이다. 바드르는 아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카이로 동남부 언덕에 주유쉬 모스크를 지었다.

3. 죽음

1094년, 6월 21일, 20년 넘게 이집트를 통치한 대재상 바드르 알 자말리 역시 사망하였다. 이후 알 무스탄시르는 실권 회복을 시도했지만 아르메니아 군부가 바드르의 아들 알 아흐달 샤한샤를 와지르로 추대하며 무산되었고 무신정권은 계속 이어지게 된다. 실망한 알 무스탄시르 역시 그해 12월 사망하였다. 본래 그는 장남 니자르를 후계자로 생각했으나 확실히 하지 못하였고, 이에 알 아흐달은 자신의 매부인 막내 왕자 아흐마드를 옹립하니, 그가 바로 알 무스탈리이다.

[1] 1월 10일이라고도[2] 동시에 압바스 칼리파의 인장, 터번 (민딜), 망토 (리바), 격자 가림막 (십박) 등을 얻었다[3] 이에 맞서기 위해 바드르는 셀주크 제국에서 도망쳐 온 오우즈 튀르크인들을 고용했는데 (나우키) 그들은 봉급 인상을 요구하며 반발했고 일부는 베두인 측에 가담, 아트시즈 이븐 우바크가 이끄는 나머지는 다마스쿠스를 장악하곤 셀주크 술탄과 압바스 칼리파에 충성하였다. 1076년까지 아트시즈는 예루살렘, 라말라 등 팔레스타인을 점령한다.[4] 이러한 체제를 후대 사가들은 와지라트 알 타프위드, 즉 절대적 권한을 지닌 재상으로 불렀다. 사실상 셀주크 술탄에 버금가는 지위였다.[5] 상이집트에 9개, 하이집트에 14개. 이때 구획은 현재까지 어느정도 남아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