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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0 22:04:48

안갑남

파일:안갑남.png
1930년 1월 29일, 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죽산 안씨(신)
출생 1901년[1] 8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전면 외우리
(현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외우마을)[2]
사망 1992년 8월 28일 (향년 91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갑남은 1901년 8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전면 외우리(현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외우마을)에서 모친 김계중(金季中)의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에 거주했다. 근화여학교에 입학했다가 1년이 안 되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14일, 그녀는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장홍염,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선봉, 경성여자상업학교 학생 송계월(宋桂月),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김진현(金鎭賢) 등 경성부내 각 학교 대표 16명과 함께 가회동 송계월의 하숙방에 모여 근우회의 허정숙을 고문으로 삼고 이튿날인 15일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한 동조시위를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15일 오전 9시 30분 정각에 각 학교에서 학생 전부가 만세를 부르며 종로네거리로 나와 숭례문 방면으로 시위행진을 하고, 설령 경찰에 구류되더라도 이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의 성명을 발설하지 않을 것, 경찰서에 송치된 후에는 단식투쟁을 실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담임교사의 엄중한 감시로 만세시위를 실행하지 못했으며#, 같은 달 18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송치되었다가, 불기소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이후 1991년 12월 14일 사망하였다.

201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8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죽산 안씨(신)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