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의 성녀
Apollonia( ? ~ 249)
3세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그리스도인이며 로마 황제 데키우스의 기독교 박해 기간 도중에 동정녀로서 순교하였다. 기독교의 성녀이며 축일은 2월 9일이다. 그녀의 이름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아마도 에트루리아의 귀족 가문 가운데 하나인 아플루니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회화에서는 종종 자신의 뽑힌 이빨을 집게로 들고 있는 젊은 여성으로 묘사되며 치과의사의 수호 성녀이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디오니시우스가 안티오키아의 주교 파비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아폴로니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중년의 여성 선교사로 249년에 순교했다. 이 편지에서 디오니시우스는 데키우스 황제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폭동이 일어나 그리스도인들은 집 밖으로 끌려나오고 재산이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본 뒤 살해되었다. 아폴로니아 역시 약탈당했으며, 턱이 부서지고 이가 뽑혔다. 그녀의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도시 밖으로 끌려나와 불경스런 구절을 암송하지 않으면 산 채로 불태워 죽이겠다고 위협을 받았다. 그러자 아폴로니아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 뒤 갑자기 결박을 풀고 스스로 물 속에 몸을 던졌다. 아폴로니아는 후대에 배교 황제 율리아누스의 박해로 로마에서 순교한 다른 아폴로니아와 혼동되었다. 중년의 여성 선교사는 젊은 여인으로 바뀌었으며 집게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이를 뽑는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나타냈다.
2. 알바니아의 유적
랜드마크인 아고노테테스의 기념물
님파이온 (분수대) 유적
그리스어 Ἀπολλωνία
라틴어, 영어 Apollonia
알바니아 남부의 그리스-로마 시기 유적. 블로러에서 북쪽으로 20km, 두러스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언덕에 위치한다. 기원전 600년경 코린토스 및 코르푸 출신 그리스 인들이 건설한 식민 도시로, 현지 일리리아인들을 축출하지 않고 공존하며 자원 산출에 열중했다. 이후 자체적인 폴리스가 되었고, 기원전 2세기 로마의 지배 하에서 일리리아 남부의 주요 군사 기지가 되었다. 동시에 철학, 웅변, 군사 학교가 세워지는 등 교육 도시로도 알려져 아우구스투스가 소년 시절 수학하기도 했다. 하지만 3세기 무렵 지진과 항구의 퇴적으로 내륙 도시가 되며 쇠퇴했고, 4세기에 수도원을 제외한 채로 버려져 현재에 이른다. 부트린트와 함께 알바니아의 양대 고대 유적지이다.
2.1. 역사
오데온 (음악당) 유적
성모 마리아 안식 성당
상고대 시기부터 일리리아 부족들이 비정기적으로 거주했고, 미케네 및 에우보이아 상인들이 왕래했다. 기원전 600년경 코린토스에서 2백여 그리스 인들이 이주해 왔고, 길락스를 지도자로 선임하여 식민 도시를 건설한 후 길라케이아 (Γυλάκεια)라 명명했다. 도시 건설에 있어 이주민들은 기존 일리리아 인들과 협력 및 통혼했고, 이후 코르푸에서도 이주민이 추가로 유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는 아폴론 신에게 헌정되어 아폴로니아로 명명되었고, 에피담노스 (디라키움)와 함께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잇는 주요 항구 중 하나가 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아폴로니아 인들이 헬리오스의 분노를 사서 한동안 농작물이 익지 않는 기근이 있었다는 설화를 전한다.
기워전 450년 아폴로니아는 트로니온에서 현지 아만테스 부족을 격파하고 영토를 남쪽으로 넓혔고, 드넓은 농지를 얻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올림피아에 기념물을 세웠다. 그 무렵 도시는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해다. 기원전 4세기 들어 농산물 및 노예 무역의 확대와 함께 아폴로니아의 인구는 6만으로 늘었고, 항구에는 백여척의 선박들이 왕래했다. 인근에서 생산되는 아스팔트 역시 선박의 방수에 필수적이었기에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다. 기원전 3세기 무렵 에페이로스 왕국에 속하던 아폴로니아는 기원전 229년 로마령이 되었고, 로마의 발칸 반도 진출 교두보로써 중시되었다. 4차 마케도니아 전쟁 당시 2천 로마 보병 및 2천 일리리아 기병[1]과 주둔한 로마 법무관 루키우스 아니키우스 갈루스는 일리리아 왕국의 겐티우스를 격파한 후 나포한 전함 일부를 도시에 기증했다.
로마 시기 아폴로니아에서는 3세기 간의 혼혈로 그리스 / 일리리아 구분이 사라졌다. 기원전 148년 도시는 마케도니아 속주에 편성되었다.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아폴로니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편에 섰고, 폼페이우스의 동맹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기원전 48년에 일대를 장악했다가 곧 항복했다. 후자가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기원전 44년에는 청년이던 아우구스투스가 아폴로니아에서 타르수스의 아테노도루스 하에서 수학하던 중, 암살 소식에 로마로 돌아갔다. 키케로가 필리피카이에서 대도시로 언급할 정도로 아폴로니아는 번영했고, 아우구스투스는 그 귀족정 체제를 인정했다.
팍스 로마나의 안정기를 지나 아폴로니아는 점차 기독교화되었고, 그 주교들은 에페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 등에 참석했다. 다만 3세기 들어 기존에 도시와 항구를 이어주던 비오서 (아오오스) 강이 남쪽으로 진로를 틀고, 항구 역시 퇴적물로 인해 메워지며 아폴로니아는 중요성을 잃고 쇠퇴했다. 게다가 기존 강의 진로를 따라 형성된 습지에서 말라리아가 창궐하며 주민들이 도시를 떠났고, 대신 남쪽의 아블로나가 발전하게 되어 현재의 블로러가 되었다. 이후 기존 아폴로니아에는 동로마 제국 시기에 세워진 아르데니카 수도원 및 성모 안식 성당만이 남았고, 오스만 제국기인 1684년 그리스어 학교가 세워져 1880년까지 운영되었다.
3. 불가리아의 도시 소조폴의 옛 지명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소조폴#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소조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 리비아의 도시 수사의 옛 지명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수사(리비아#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수사(리비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5. 대부의 등장인물 아폴로니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폴로니아 비텔리#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폴로니아 비텔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6. 한국의 창작 뮤지컬 아폴로니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폴로니아(뮤지컬)#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아폴로니아(뮤지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 현지 파르티니 부족장 에피카두스와 알갈수스가 이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