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비에른 할보르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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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 ||||
클럽 | ||||
노르웨이의 前 축구감독 |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이름 | 아스비에른 할보르센 Asbjørn Halvorsen | |
출생 | 1898년 12월 3일 | |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사르프스보르그 | ||
사망 | 1955년 1월 16일 (향년 56세) | |
노르웨이 나르비크 | ||
국적 | [[노르웨이|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68cm | 체중 71kg | |
직업 | 축구선수(센터 하프백 / 은퇴) 축구감독 은퇴 | |
소속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선수 | 사르프스보르그 08 FF (1917~1921) 함부르크 SV (1921~1933) |
감독 | 함부르크 SV (1933) 노르웨이 대표팀 (1936~1940) | |
국가대표 | 19경기 (노르웨이 / 1918~1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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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어린 시절
1898년, 할보르센은 제빵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들은 전직원이 2천명이나 되는 큰 제과점을 운영했다.2.2. 선수 생활
2.2.1. 클럽
할보르센은 1917년부터 고향팀 사르프스보르그 08 FF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17년의 노르웨이 컵 결승전에서 당시 18세의 할보르센은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를 뛰어 현재까지 노르웨이 컵 결승전 최연소 주장으로 남아있다. 결승전에서 할보르센은 골까지 넣어 사르프스보르그의 4대1 승리와 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 경기는 사르프스보르그의 첫 우승과 함께 관중 난동으로도 유명한 경기이다.할보르센은 1921년부터 함부르크로 이사해서 사업가가 되려고 했다. 처음에는 해운 회사에서 일했지만 세명의 동료와 함께 선박 중개 및 보험 회사를 설립했다. 원래 할보르센은 자신의 축구 선수 경력을 숨기고 사업에만 집중하려 했지만 함부르크 SV가 그의 동료를 통해 할보르센의 존재를 알게 되자 적극적으로 영입을 위해 힘썼다. 결국 함부르크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고 선박 브로커 일도 병행했다.
2.2.2. 국가대표
1918년 대표팀에 데뷔한 할보르센은 1920년 올림픽에도 참가, 노르웨이는 8강에 올랐다.할보르센은 1923년까지 노르웨이 대표팀으로 19경기를 뛰었는데 대표팀 경력을 빨리 마감하게 된 이유는 그가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하느라 당시의 교통편으론 대표팀 소집에 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지막 A매치는 함부르크에서 펼쳐진 독일전이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이 경기에서 할보르센의 팀동료 툴 하더(Tull Harder)에게 골을 허용, 0대1로 패했다.
2.3. 감독
1933년에 잠시 함부르크 SV의 선수 겸 감독을 맡은 할보르센은 나치 독일이 집권하자 1934년에 고국 노르웨이로 돌아왔다.노르웨이 축구 협회 간사로 일하던 할보르센은 1936년 올림픽에서 노르웨이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달성했다. 이는 현재까지 유일한 노르웨이 대표팀의 올림픽 메달 기록이다.
그는 이어 열린 1938년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에 밀려 패했다.
2.4.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부터 노르웨이도 전쟁에 휘말려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가 생기게 되었고 이에 할보르센은 당시 노르웨이 스포츠계의 보이콧 운동을 주도했다.사실 함부르크 SV에서의 활약으로 인해 독일인들 중 상당수가 할보르센에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나치의 간부들은 할보르센을 자신들의 선전도구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1940년의 노르웨이 컵 결승전에서 나치가 그들의 배너와 깃발로 경기장을 장식하려 하자 경기를 취소하겠다는 저항을 하기도 하고 컵 결승에서 나치 국장 요제프 터보벤(Josef Terboven)이 왕실 스탠드에 접근하는 것도 막았다.
이런 적극적인 보이콧 활동으로 인해 그는 나치 독일에 미운털이 박혔고 결국 1942년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소에서 할보르센은 그의 팬인 독일인들의 배려로 행정 업무를 보는 등 그나마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다른 노르웨이 수감자들에게 추가 식량, 가벼운 의무 및 의료 감독 등 그가 제공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했지만 당시 수용되어 있던 노르웨이인 504명중 반수가 가깝게 사망했을 정도로 수용소의 상태는 열악했다. 할보르센은 수용소 내에서 노르웨이인들에게 생존과 동기 부여를 주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그는 전선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정보를 얻어 노르웨이인들과 공유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잠들기 쉽게 만든 교육자이자 낙천주의자로 묘사되었다.
1945년 1월, 할보르센은 슈투트가르트 근처의 파이힝엔(Vaihingen) 수용소로 보내졌고 이곳에서도 그는 생존에 대한 의욕이 매우 낮은 노르웨이 수감자들을 발견했다. 파이힝엔에서 그는 수감자들을 위한 일종의 관리자가 되어 식량 공급을 준비하고 노르웨이인들이 시신을 운반하는 임무에서 해방되도록 했다. 그러나 그가 동료 수감자를 때리기를 거부하자 그는 관리자직에서 쫓겨났다.
2.5. 이후
스웨덴 적십자에 의해 수용소에서 석방될 때 할보르센의 건강은 심각히 나빠져 있었는데 선수 시절 71kg였던 체중이 48kg으로 떨어졌고 티푸스, 폐렴, 류머티즘, 발열에다가 영양실조도 앓고 있었다.전쟁이 끝나고 할보르센은 1955년 사망할 때까지 사무총장으로서 노르웨이 축구 협회에서 일했다. 1949년 그는 스웨덴과 노르웨이 축구계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스웨덴 바사 기사단의 기사로 훈장을 받았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걸린 각종 질병로 인해 쇠약해져 있었고 나르비크에서 사망했다.
3. 스타일 & 평가
3.1. 선수
할보르센은 함부르크의 엔진, 전투의 야전 사령관, 모든 상황에서 명령을 내리고 지시를 내리는 사람으로 묘사되었다.3.2. 감독
감독으로서의 할보르센은 대표팀 감독으로서 선수들에게 금욕과 절제를 많이 요구했다. 절주는 물론 축구를 포함하지 않는 국가 대표팀의 일부 모임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다이어트와 공동 활동에 대한 의견도 냈다.4. 뒷이야기
- 함부르크 SV 시절 동료였던 툴 하더와 선물도 교환하는 등 선수 시절에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둘의 정치적 성향은 정반대였는데 하더는 독일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나치가 독일의 정권을 잡기도 전인 1931년에 이미 나치당원이 되었다. 반면 할보르센은 1940년대에 노르웨이에서 반나치 활동에 앞장섰다. 나중에 할보르센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어 노르웨이로 돌아갈 때 함부르크 외각의 노이엔감머(Neuengamme)에 잠시 들렀는데 이곳에서 그는 하더와 재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하더는 노이엔감머에서 간수로 일하다 전범으로 기소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1953년에 노르웨이와 서독이 1954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을 치르고 나서 열린 연회장에서 다시 만났는데 화해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2] 하더도 1956년에 할보르센의 뒤를 따르듯 사망했다.
- 할보르센이 나츠바일러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시절, 후에 노르웨이의 총리가 되는 트뤼그베 브라텔리가 그의 동료였다. 브라텔리가 건강 악화로 생명이 경각에 다다랐을 때 임시 휴가와 의사를 구해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후에 브라텔리는 이 수용소를 "수감자들이 외부 세계와의 모든 접촉을 차단하는 것이 목적인 수용소, 굶주림과 비인도적인 대우로 죽을 수용소"라고 묘사했다.
5. 사생활
할보르센은 함부르크 SV 시절 독일인과 결혼을 했지만 이혼했고 1951년에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자녀는 없었다.6. 수상
6.1. 선수
6.1.1. 클럽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2회: 1922-23, 1927-28(함부르크 SV)
- 노르웨이 컵 우승 1회: 1917(사르프스보르그 08 FF)
- 북부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10회: 1921, 1922, 1923, 1924, 1925, 1928, 1929, 1931, 1932, 1933(함부르크 SV)
6.2. 감독
6.2.1. 클럽
- 북부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1회: 1933(함부르크 S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