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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7:30:47

아쇼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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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티온 왕조
아쇼트 1세 바그라트 1세 아다르나세 2세 과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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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클라제티 공국 초대 공작
აშოტ | 아쇼트 1세
파일:아쇼트 1세.jpg
제호 한국어 아쇼트 1세
조지아어 აშოტ
라틴어 Ashot I
출생 미상
사망 830년 (향년 불명)
재위 기간 807년 ~ 830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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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오-클라제티 공국 초대 공작.

2. 생애

이베리아 초스로이드 왕조의 가신 아다르나세 1세와 이베리아 귀족 가문의 일원인 네르세의 외동딸의 아들이다. 그는 807년경 아버지로부터 티플리스 인근의 영지와 직위를 물려받은 뒤 아랍인들을 자신의 영지에서 몰아낸 뒤 중앙 이베리아로 세력을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반격으로 잘 풀리지 않자, 타오-클라제티 일대로 후퇴한 뒤 자신을 이 지역의 공작이라고 선포했다. 813년 갈수록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조지아 에미르들을 억제하려는 아바스 왕조 칼리파에 의해 이베리아의 대공으로 인정된 그는 바크탕 1세가 지었지만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아르타누지 성을 복원했다.

한편 아랍인의 거듭된 침략과 전염병으로 황폐해진 조지아를 재건하고자 그리골 칸츠텔리 일대에 수도원 공동체 설립을 후원하고 조지아인들이 이 지역에 이주하는 걸 장려했다. 이후 이베리아의 정치 및 종교 중심지는 중앙 이베리아에서 조지아 남서부 타오-클라제티 지방으로 이전되었다. 그는 아랍인들이 점령한 조지아 영역을 되찾기 위해 군사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 콜라, 아르타니, 자바헤티, 삼츠케, 트리에티를 포함한 주변 영토를 확보했다. 810년대 후반에 압하지야의 테오도시우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카케티아 그리골의 에미르와 맞붙어 크사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중부 이베리아에서 카케티아 그리골 세력을 축출하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의 아르메니아 총독 칼리드 벤 야지드가 827/828년경 이베리아로 쳐들어와서 그를 중앙 이베리아에서 축출했다. 그는 니갈리 계곡으로 후퇴한 뒤 전열을 정비했으나, 830년 그곳 교회의 제단에서 배신자들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 그의 유산은 세 아들 바그라트 1세, 아다르나세 2세, 과람에게 분배되었다. 그는 사후에 아르타누지에 지은 교회에 묻혔고, 조지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하고 1월 29일을 순교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