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 촬영한 아메디의 장엄한 모습
쿠르드어 ئامێدی
아랍어 العمادية
1. 개요
이라크 북부 쿠르디스탄 다후크 주의 산간 도시. 이라크의 공용어인 아랍어로는 알 아마디야로 부른다. 모술에서 동북쪽으로 80여 km, 아르빌에서 서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인구 1만 1천의 산간 도시이다. 대자브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끼고 해발 1400m 의 고지에 위치한 덕에 여름 피서지로도 알려져 있다. 터키 국경과 직선거리로는 매우 가까우나, 험준한 산맥을 사이에 둔 탓에 실질적으로 월경을 위해선 서쪽으로 70km 떨어진 자호까지 가야 한다. 쿠르드 문화의 거점 중 한곳이고, 동시에 다수의 유대인, 아시리아인 공동체가 있는 등 자지라 지방의 다문화적 특성을 잘 간직한 도시이다.
2. 역사
방어에 유리한 입지 덕에 문명의 태동 무렵부터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2500년 경부터 현재와 같은 아메디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고, 일대의 패권국이던 아시리아에 천년 넘게 속하였다. 메디아인 사제인 마기의 본거지이던 아메디는 이란의 카샨과 함께 동방박사의 출신지 후보들 중 하나이다. 그후 아케메네스 제국, 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사산 제국을 거쳐 7세기 중반 이슬람 제국령이 되었다. 중세 아메디는 압바스 가문의 파샤가 다스렸고, 그 가문은 일대에서 가장 부유했다고 한다. 10세기 무렵부터 아메디 일대에는 쿠르드인과 유대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후자의 선구자인 하잔[1] 다비드 (935년경 사망)은 (에스겔)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곳에 매장되었다.셀주크 제국이 쇠퇴하던 1163년에는 아메디 출신 유대인 메나헴 벤 솔로몬 (다우드 이븐 알 루히)이 스스로를 다비드 '알로이' (깨달은 자)라 칭하며 일대의 유대인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아메디 시타델을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셀주크 숥탄은 그가 항복하지 않는다면 영내의 유대인들을 죽일 것이라 협박하기도 하였다.[2] 결국 아메디 총독이던 사이프 앗 딘이 다비드의 장인을 매수해 그를 죽이게 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고, 이란의 유대인들은 큰 추징금을 물어야 했다. 다만 이후로도 아메디의 1천 가구에 달하는 유대인들은 과일을 판매에 주로 종사하며 유지되었다. 1177년에 아메디에는 대모스크가 세워졌다. 법학, 아랍어 등의 과목이 있던 그 부설 마드라사는 아메디에서 가장 큰 교육 기관이었다.
1228년에는 에제키엘-다비드 영묘에 전자를 기리는 크니스 나비 예즈켈 시나고그가 세워졌고, 오순절 때마다 그곳으로 유대인 순례객들이 모여들었다. 14세기 압바스 왕조의 후예를 자처한 말리크 칼릴 알 압바시가 집권하였고, 1376년부터 아메디는 쿠르드계 자치 공국인 반디난 토후국의 수도가 되었다. 15세기 술탄 후세인 알 왈리는 모스크를 중건하고 모술의 누리 모스크를 모방한 높이 80m의 미나렛을 세웠다. 19세기 무렵 6천의 주민은 2500명의 쿠르드, 1900명의 유대, 1600명의 아시리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던 1842년 모술 총독이 점령하며 반디난 국이 폐지되고 일대는 오스만 제국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쿠르드 인들은 이라크 정부에 반기를 들었는데, 그 보복으로 1961년 이라크 공군이 공습을 가하였다. 그로 인해 랜드마크인 미나렛의 상부가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후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