甘粕景持
( ~ 1604년 7월 22일)
1. 개요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우에스기 사천왕 중 1명이자, 에치고 17장의 일원으로 에치고(越後) 이즈카(飯塚) 마스카타성(桝形城), 산죠성(三条城)의 성주이다. 초명은 나가시게(長重).
아버지는 아마카스 야스시게(甘粕泰重) 이며, 아들은 나오마사(尚政), 시게마사(重政).
같은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인 아마카스 카게츠구(甘粕景継)와는 먼 친척이다.
2. 생애
출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본래 닛타씨의 일족으로 우에노국에 살다가, 주가의 쇠퇴 이후 우에스기, 나가오씨를 섬겼다는 설, 나가오 타메카게를 섬기고 그의 아들인 우에스기 겐신을 섬겼다는 설, 본래는 가이-시나노 국경에서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우에스기 겐신에게 등용되었다는 설이 있다.에도시대의 책 시나노의 조약돌(信濃のさざれ石)에 따르면 1547년 10월에, 우에스기 겐신(당시에는 나가오 카게토라)이 다카야마에 성을 쌓을 때, 임시 보루로서 그 인근에 삼일성(三日城)을 축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본래 이름은 나가시게(長重)였는데, 주군인 카게토라(景虎)로 부터 이름 카게(景) 한 자를 편휘(偏諱) 받아 카게모치로 개명했다.
1559년 겐신의 상락 이후 금복륜의 태도(金覆輪の太刀)를 하사받았으며, 1560년 오다와라 호죠씨 공격에 종군했다. 이후 겐신이 관동관령직과 우에스기 씨를 계승할 때, 우사미 사다미츠, 카키자키 카게이에, 카와다 나가치카와 함께 가마쿠라 쓰루오카 하치만 궁에서 겐신을 수행하였다.
1561년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 참가하여 후미(신가리)를 맡아 지쿠마가와(千曲川)에 포진하여 사이죠산(妻女山)에서 내려오는 다케다군 별동대와 격전을 벌였는데, 다케다 군에서는 겐신이 후미를 맡은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활약을 하여, 갑양군감(甲陽軍鑑)에 따르면 "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무라이대장", 마츠린 야화(松隣夜話)에 따르면 "지용을 겸비한 사무라이 대장"이라고 격찬받았다.
겐신 사후, 후계 분쟁인 오타테의 난(御館の乱)에서는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지지, 1582년 시바타 시게이에(新発田重家)의 반란 때 병참기지를 수비하는 중책을 맡았으며, 1586년 반란 진압군의 철포대장으로서 공을 세워 카게카츠로부터 전공을 칭송받아 감장(感状)을 받았다. 1595년에는 가로 나오에 가네쓰구의 명으로 우에마쓰 야베에(上松弥兵衛)와 함께 가모군 이즈모다쇼(出雲田庄), 오쓰키쇼(大槻庄), 호나이(保内)의 검지봉행(検地奉行)이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 패전으로 우에스기 가문이 1601년 요네자와 이봉함에 따라, 1100석의 영지를 받았다. 게이초 9년 6월 26일(1604년 7월 22일), 요네자와에서 사망하였으며, 조동종(曹洞宗) 류곤지(龍言寺)에 묻혔다.현재 아마카스 씨의 역대 무덤은 에이쇼오지(栄松寺)에 있다.
자손은 대대로 요네자와 번사를 지냈으며, 현재는 주로 야마가타현·도쿄도·아이치현·가나가와현·시즈오카현에 거주 중이다. 관동대학살 백색테러 사건인 아마카스 사건의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그의 13대손이다.#
3. 대중 매체에서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가 100만인의 신장의 야망 결전 코엣츠전 업데이트에 등장하였다. 결국 이후 본 시리즈 14편 창조부터 등장한다.
16편 신생에서는 통솔81, 무력84, 지력83, 정치 54의 준수한 스텟으로 등장하며, 전법은 기동상승. 특성으로는 견고, 철벽, 차배로 주로 방어 특성을 보유. 가재는 부대능력 상승 대신 영내 집락 장악속도 저하, 봉행특기는 상비병제의 비용 절감이다.
스텟이 다른 사천왕에 비해 뒤쳐지는 감이 있으나, 물에 빠져죽고, 내통 의심 받아 죽는[1] 다른 사천왕에 비해 수명이 아주 길다는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