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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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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두번째부터 이토 노에(伊藤野枝 / 伊藤ノヱ), 오스기 사카에(大杉 栄), 사카에의 딸 마코(魔子).
1. 개요
甘粕事件(大杉事件)1923년 9월 16일 일본 제국에서 관동대지진 와중에 일어난 관동대학살의 일부.
2. 전개
사건의 발단은 무정부주의자였던 오스기 사카에[1]와 그의 내연녀 이토 노에[2]의 실종으로 시작되었다. 관동대지진으로 도쿄도와 가나가와현 일대에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오스기와 이토는 가나가와현에 살다가 지진으로 부상을 입은 오스기의 여동생을 병문안하고 여동생의 아들인 6살이었던 타치바나 소이치(橘 宗一)를 데리고 돌아오던 길에 행방이 묘연해졌다.목격자들이 그들 일가족이 일본 제국 육군 헌병들에게 끌려갔다는 목격담을 내놓아 지지 신보나 요미우리 신문은 이들 일가족이 살해되었다는 기사를 잇달아 내보냈고 군부와 갈등 중이던 경시청이 오스기 일가의 생사를 알아야겠다고 육군을 압박했다. 설상가상으로 실종된 오스기의 조카인 타치바나 소이치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가진 탓에 미국 정부도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3. 체포된 범인들
범인 아마카스 마사히코
결국 육군은 오스기 일가가 육군 헌병대에서 살해되었고 그 살해범이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 육군 헌병 대위라고 실토했다. 이후 세 사람의 시신이 오래된 우물에서 발견되었다. 아마카스 대위는 군법회의에 민간인 살해 혐의로 회부되었고 아마카스의 직속 상관들인 헌병 사령관 고이즈미 류이치는 정직 처분을 받았으며 계엄 사령관 후쿠다 마사타로는 경질되었다.
9월 24일 군법회의 재판정에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아마카스 대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관동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정부를 전복하려 할 것이다'라고 생각해 무정부주의자들의 중심인물인 오스기와 이토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가나카와에서 도쿄로 돌아와 집에 들어가려던 오스기 일가를 아마카스 자신과 헌병대 특별 고등경찰과의 모리 케이지로 상사가 납치해 헌병대로 끌고 왔으며 당일 세 명 중 한 명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스기의 조카 타치바나 소이치의 살해에 대해서는 아마카스의 진술이 오락가락했다. 처음에는 세 명 모두 혼자 살해했다고 했다가 군사법정에서 자신의 모친이 '내 아들이 어린 아이를 죽였을 리가 없다'며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본 후에는 아이는 죽이지 않았고 나중에서야 살해당한 걸 알았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이런 탓에 아마카스의 단독 행동이라기보다는 배후의 상층부가 지시한 결과가 아니냐는 의혹이 일었지만 밝혀지지는 않았다.
재판 과정에서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는 심한 폭행을 당한 후 교살, 타치바나 소이치는 교살당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인 감정서는 공개되지 않았다가 이후 검시를 맡았던 군의관의 유품 중에서 발견되어 1976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감정서에서도 오스기와 이토의 경우 흉부 완전 골절, 질식사의 흔적을 언급했기 때문에 재판에서 나온 증언과 일치한다.
이 사건의 여파는 커서 관동대지진으로 조선인과 반정부 성향의 무정부주의자, 노동운동가들이 잇달아 살해된 것으로 인해 국민들의 분노가 치솟았던 반면 보수 성향의 국민들은 오스기를 살해한 아마카스를 영웅으로 떠받들면서 그의 무죄 방면 서명운동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4. 판결
결국 군법회의는 아마카스에게 징역 10년, 모리 상사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했지만 아마카스와 함께 오스기 일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아마카스의 직속 부하 3명은 무죄 판결했다.무정부주의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육군 간부들에 대한 암살 기도를 벌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잇달아 체포되어 사실상 무정부주의 운동 세력은 미약해져 버렸다. 아마카스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지만 1926년에 채 형기를 절반도 채우지 않고 가석방되어 육군성 지원으로 프랑스에 유학한 뒤 만주로 건너가서 만주국에 관여했다.
아마카스는 오히려 만주에서 더 유명해졌는데 만주영화협회를 운영하며 야마구치 요시코(이향란)의 커리어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자 1945년 8월 20일 자살했다. 그 때문에 그가 개인적으로 이 사건에 대한 남긴 기록은 없다.
5. 진범은 따로 있다?
세간에서는 아마카스가 이 사건의 진범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는데 카사하라 카즈오는 심베의 제3연대가 주범이라는 설을 제기했고 타케다 카노는 육군 간부의 음모라는 설을 제기했다. 아마카스가 사건의 진범이 아닐 것이라는 근거로는 당시 육군과 헌병의 지휘계통을 봤을 때 분대장에 불과한 아마카스가 과연 오스기 일가의 살해를 명령할 위치였느냐는 점, 아마카스와 이토 노에가 심문 과정에서 유머러스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 아마카스의 사상적 성향이 허무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것 등이 제시되었다.[3]그래서 아마카스가 오스기 일가를 잡아 오긴 했지만 살해는 다른 이가 했을 것이라는 추측 혹은 아마카스는 오스기 본인만을 살해했을 것이고 이토 노에와 타치바나 소이치의 살해는 다른 이가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만주에서 영화 제작으로 일본 선전에 관여했던 아마카스는 만주 영화협회 간부와의 사적인 모임 자리에서 '내가 안 죽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똘끼가 충만했던 인간인지라 이 인간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는 의문. 모든 비밀은 그가 다 안고 가 버렸기 때문에 아마 진상이야 어쨌든 영원히 범인은 그로 기록될 것이다.
6. 매체에서
마루오 스에히로의 화집 신영명이십팔중구에 1번 그림으로 수록되었다.요시다 요시시게의 영화 '에로스+학살'은 이 사건과 1960년대 현실을 교차하는 영화이며 일본 뉴웨이브 영화의 대표작으로 불린다.
게임 상주전신관학원 팔명진에서 해당 사건의 진범인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이름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등장한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오스기가 미리 기타 잇키 집으로 피신한 덕분에 오스기 사카에가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