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9246><colcolor=#ffffff> 아드리아노 파니타 Adriano Panatta | |
출생 | 1950년 7월 9일 ([age(1950-07-09)]세) |
이탈리아 로마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조건 | 183cm (6 ft 0 in) |
ATP 싱글 랭킹 | 최고 4위[1] |
ATP 더블 랭킹 | 최고 15위 |
개인전 통산 성적 | 392승 245패 |
단식 타이틀 획득 | 10회 |
통산 상금 획득 | $776,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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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테니스 선수. 굵직한 성적을 남긴 선수가 드문 이탈리아에서 오픈 시대 이래 야닉 시너와 더불어 단 둘 밖에 없는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획득한 인물[2]이며, 1970년대 중반 ~ 1980년대 초 세계 테니스를 지배했던 비에른 보리를 상대로 보리의 홈코트와도 같은 롤랑가로스에서 2번 승리를 거둔 유일한 인물이다.2. 커리어
- 개인전 통산 성적: 392승 245패
- 단식 타이틀 획득: 10회
- 복식 통산 성적: 239승 154패
- 복식 타이틀 획득: 17회
- 통산 상금 획득: $776,187
아드리아노 파나타의 연도별 메이저대회 성적표
연도 | 호주 | 프랑스 | 윔블던 | US |
1969 | 1라운드 | 1라운드 | 불참 | 불참 |
1970 | 불참 | 4라운드 | 1라운드 | 불참 |
1971 | 불참 | 3라운드 | 3라운드 | 불참 |
1972 | 불참 | 8강 | 3라운드 | 1라운드 |
1973 | 불참 | 4강 | 불참 | 3라운드 |
1974 | 불참 | 2라운드 | 3라운드 | 불참 |
1975 | 불참 | 4강 | 3라운드 | 불참 |
1976 | 불참 | 우승 | 3라운드 | 2라운드 |
1977 | 불참 | 8강 | 2라운드 | 3라운드 |
1978 | 불참 | 2라운드 | 불참 | 4라운드 |
1979 | 불참 | 3라운드 | 8강 | 1라운드 |
1980 | 불참 | 1라운드 | 3라운드 | 불참 |
1981 | 불참 | 2라운드 | 불참 | 3라운드 |
1982 | 불참 | 2라운드 | 불참 | 불참 |
그 외
3. 선수 경력
1950년 7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으며, 클레이 코트를 운영하던 아버지 덕에 일찍 테니스를 시작하였다. 클레이 코트를 전문으로 하며 주니어 선수 시절 많은 기대와 주목을 받았다.1968년 자신의 고향에서 열리는 로마 오픈에서 프로 무대 데뷔를 하였으며 18살의 나이에 2라운드 진출을 이뤄낸다. 그러나 주니어 시절 기대와는 달리 1968년, 1969년 2년간 6승 8패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받았다.
그러던 1970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베를린 오픈에 참가하여 생의 첫 투어 4강 진출을 이뤄냈고, 이어 출전한 프랑스 오픈에서도 4라운드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다. 1971년 8강 이상의 성적을 꾸준히 기록하였고, 8월 이탈리아의 소도시 세니갈리아에서 열린 세니갈리아 오픈에서 우승하며 생의 첫 트로피를 얻는다. 1972년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는 와중에 1, 2라운드 탈락이 빈번했으나 프랑스 오픈에서 8강에 진출하였고, 이어 출전한 함부르크 오픈에서 준우승을 기록, 스위스에서 개최된 크슈타트 오픈에서 준우승, 토론토 오픈[8]에서 8강에 진출하는 등 우승은 없었지만 큰 대회에서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1973년 발렌시아 오픈에 출전하여 16강에서 보리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지난 해 함부르크 오픈 결승에서 패배했던 스페인의 마누엘 오란테스에게 패하며 다시 한 번 준우승한다. 잇달아 출전한 바르셀로나 오픈에서 다시 한 번 16강에서 보리를 꺾고, 4강에서 이번에는 마누엘 오란테스를 꺾었으나 결승에선 루마니아의 테니스 전설 일리에 너스타세에게 패하며 2개 대회 연속 준우승한다. 패배를 뒤로하고 출전한 니스 오픈에서 이번에도 결승에 진출하지만 마누엘 오란테스에게 타이브레이크만 3번 포함한 결승을 치른 끝에 패배, 3개 대회 연속 준우승하게 된다. 이후 4월 참가한 마드리드 오픈에서 4강에서 마누엘 오란테스를 꺾고 결승에 진출, 그러나 이번에도 일리에 너스타세에게 패하며 시즌 4번째 준우승을 한다. 자신의 고국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플로렌스 오픈에서 이번에도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두 번 연속으로 일리에 너스타세에게 5세트 풀 접전 끝에 패하며 5번째 준우승을 하게 된다. 이어서 참가한 본머스 오픈에서 마침내 일리에 너스타세를 결승에서 꺾었고 6번의 결승 진출 끝에 우승하며 시즌 첫 트로피를 들어 올린다. 이 기세를 몰아 프랑스 오픈에서는 16강에서 비에른 보리를 16강에서 꺾고 4강까지 진출한다. 남은 오픈들에서는 전반기 클레이 시즌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였지만 엄청난 활약으로, 1973년 8월 23일 처음으로 집계된 ATP 세계 랭킹에서 8위에 랭크되었고 최종적으로 11위를 기록하며 마무리 한다. 1973년 최종 기록은 우승 1회, 준우승 5회, 그랜드슬램 4강 진출 1회로 현재 투어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실력을 보여주었고 유망주 시절 받았던 기대에 완벽히 부응하였다.
1974년 필라델피아 그랑프리에서 8강에 진출하였으나 미국의 테니스 전설 아서 애시에게 패한다. 이어 출전한 봉골리아 그랑프리에서도 8강에 진출하였으며, 런던 그랑프리, 바르셀로나 그랑프리, 상파울루에서 각각 16강, 8강, 16강에 진출한다. 물론 그렇게 나쁜 기록은 아니었으나 작년 전반기 결승 진출 6회를 기록했던 것에 비해 다소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플로렌스 오픈 우승, 바스타스 오픈 준우승을 제외하면 특별한 활약이 없었으며, 특히나 그동안 쉽게 이겨왔던 보리를 3번 만나 3번 모두 패하였다.
1975년 지난해의 부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고 1973년 11위, 1974년 34위로 내려간 랭킹은 53위까지 더 하락하게 된다. 그러나 클레이 시즌 프랑스 오픈에서 다시 한 번 4강 진출을 일궈내고 , 오스트리아 키츠뷔엘에서 열리는 제네랄리 오픈에서 우승, 마드리드 오픈에서는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의 테니스 전설 기예르모 빌라스를, 4강에서는 비에른 보리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체코의 노장 얀 코데시[9]에게 패하며 준우승 한다. 이어 출전한 바르셀로나 오픈에서는 8강에서 마누엘 오란테스를 꺾었으나 결승에서 비에른 보리에게 패하며 시즌 2번째 준우승을 기록한다. 11월 출전한 스톡홀름 오픈에서 8강에서는 아서 애시를, 결승에서는 지미 코너스를 완벽하게 제압하며 시즌 2번째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잇달아 출전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오픈에서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기예르모 빌라스에게 패하며 3번째 준우승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50위권에 머물렀던 세계 랭킹은 14위까지 올랐고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마스터스 컵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린다.
1976년 로마오픈, 바르셀로나 오픈에서 각각 4강 진출을 기록하며 준수한 스타트를 밟았고 세계 탑 10을 회복한다. 스톡홀름 WCT에 출전하여 8강에서 비에른 보리를 꺾었고 4강에서는 일리에 너스타세에게 패했지만 이 경기 이후 세계 8위에 복귀한다. 5월 열린 로마 오픈에서 우승하며 시즌 첫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이어 출전한 프랑스 오픈에서 8강에서 비에른 보리를 꺾고 결승에 진출, 오픈 시대 이래 이탈리아인의 첫 결승 진출이자 첫 우승을 일궈냈고, 이는 아직까지도 이탈리아인의 유일한 그랜드 슬램 타이틀로 남게 되었다.[10] 이 이후 크슈타드 오픈 준우승을 제외하면 별 다른 기록은 없었고 이 해 세계 4위까지 오르며 이탈리아 선수 최고 랭킹을 달성하였고 연말 랭킹은 7위로 마무리 한다.
1977년 4명의 선수만을 초청하여 치르는 펩시 그랜드슬램[11]에 참가하였으나, 비에른 보리와 마누엘 오란테스에게 각각 패한다. 4월 참가한 휴스턴 WCT 전까진 별 활약이 없었으나, 1라운드에서 세계 1위 지미 코너스를, 2라운드에는 호주의 테니스 전설 켄 로즈웰을, 4강에서는 미국의 베테랑 플레이어 에디 딥스[12]를 결승에서는 미국의 테니스 악동 비타스 게룰라이티스를 꺾는 등 지옥의 라인업을 뚫고 우승에 성공한다. 이 우승은 파나타의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그랑프리 시리즈 우승이다. 이후 롤랑가로스 8강 진출을 제외하면 별 활약이 없었고, 세계 랭킹 23위로 1977년을 마무리 한다.
1978 연초 지속적으로 하위라운드 탈락을 기록하였고, 5월 독일에서 열린 네이션스 컵 4강 진출 전까지는 좋지 못한 성적을 보였다. 그러나 고향 로마에서 열린 로마 오픈에서 결승에 진출하였고[13], 롤랑가로스에서는 2라운드 탈락이라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으나, US 오픈에서는 4라운드에 진출하며 커리어 최고 기록을 갱신한다.[14] 이후 도쿄 오픈에서 쉽게 선수들을 제압하며 우승하였고, 볼로그나 오픈에서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미국의 피터 플레밍에게 2세트 패를 당하며 준우승한다.
1979년 딱 한 번 푸에르토리코에서 개최된 라운드 로빈 형식의 도라도 비치 WCT에 참가하여 마누엘 오란테스를 제외한 4명의 선수에게 모두 패하며 1승 4패의 처참한 시작을 밟는다. 그러나 3월 참가한 밀란 WCT에서 4강에 진출하였고, 독일에서 열린 네이션스 컵에서 우승하며 트로피를 들어올린다.[15] 프랑스 오픈에는 3라운드 패배에 그쳤지만, 윔블던에서는 8강에 진출하며 커리어 하이를 갱신하였다. 그러나 이후 별 활약 없이 꽤 오랜만에 타이틀 없이 시즌을 종료한다.
1980년 일리에 너스타세, 아서 애시, 마누엘 오란테스와 같이 1970년대 테니스를 주도했던 전설들이 하나 둘 부진하는 가운데 플로렌스 오픈에서 우승, 제네바 오픈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하였고 바르셀로나 오픈에서는 4강 진출을, 파리 오픈에서는 준우승을 기록하면서 본인의 마지막 저력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1981년 몬테카를로 오픈에서 4강 진출을 기록하였으나, 세계 곳곳을 다니며 투어에 참가하는 것보다는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챌린저 오픈에 더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탈리아의 도시 산 베네데토에서 열린 첼린저 오픈에서 우승하며 커리어 첫 챌린저 타이틀을 획득한다.
1982년 30대 초중반의 나이를 견디지 못하고 12승 18패라는 초라한 승률을 기록하였고, 세계 랭킹은 100위권 바깥으로 나가게 된다.
1983년 9경기에 출전하여 2승 7패를 기록하였고, 1984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섬에 위치한 팔레르모 오픈을 끝으로 이탈리아 테니스 전설의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4. 선수 총평
아직까지도 그랜드슬램 우승자가 나오지 않는 이탈리아 테니스의 자존심을 보여준 인물이며, 세계 1위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1970년대 세계 테니스의 한 휙을 그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16]동시대 스타들과의 전적을 통해 알아보면, 아서 애시와 1승 6패, 지미 코너스와 2승 9패, 비에른 보리와 6승 10패, 일리에 너스타세와 3승 10패, 마누엘 오란테스와 8승 8패를 기록하였다.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인물들과의 전적이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모두 승리를 얻어봤다는 점에서 상당한 실력자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26번의 결승 진출을 이뤄냈고 10개의 타이틀 획득, 이 가운데에는 로마 오픈처럼 당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현재 마스터스 급으로 인정받는 타이틀이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그의 위상은 꽤 높음을 알 수 있다.
5. 참고 링크
[1] 2024년 야닉 시너가 세계 3등을 기록하기 전까지 47년간 이탈리아 남자 테니스 최고 순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2024년 시너가 세계 랭킹 1위에 오름에 따라 이탈리아 선수로서는 2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마테오 베레티니가 최고 6위, 파비오 포니니가 최고 9위로 뒤따른다.[2] 슬램 타이틀은 고사하고 결승 진출 기록 역시 유일하게 갖고 있었으나 후배 마테오 베레티니가 2021년 윔블던 결승전에 진출하며 45년만에 "유일"이라는 타이틀은 사라졌다. 더불어 야닉 시너가 3년 뒤인 2024년 호주 오픈에서 우승을 거두며 48년만에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함에 따라 '유일 우승'이라는 타이틀 역시 사라졌다.[3] 파나타의 유일한 호주오픈 참가 기록이다.[4] 오픈시대 이후 이탈리아인 최초의 그랜드 슬램 우승[5] 마스터스 1000 시리즈의 전신[6] 1977년 함부르크[7] 1975년[8] 현재의 케나다 네셔널뱅크 마스터스 1000[9] 그랜드 슬램 타이틀 3개를 보유한 전설이다.[10] 결승 진출 기록 역시 유일한 기록이였지만, 2021년 마테오 베레티니가 윔블던 결승에 진출하며 결승 진출자는 2명으로 늘었다.[11] 1976년 시작된 이벤트로 1월 초에 개최되었으며 단 4명의 선수만이 참가하였으나 타이틀로 인정해 주었다. 4명의 선수만 참가했지만 세계에서 손 꼽히는 선수들만에게 자격이 주어졌고 당시 그랜드 슬램의 총 상금이 200,000 ~ 250,000달러였는데 이 대회의 총상금은 무려 200,000달러로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금을 감안하면 감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금을 주는 대회였다. 1976년을 시작으로 1981년까지 단 6번 개최되었으며 최다 우승자는 1977-1980년, 4년 연속 우승을 기록한 비에른 보리였고, 일리에 너스타세와 존 메켄로가 각각 1번씩 우승했다.[12] 22개의 싱글 타이틀을 획득하였으며, 세계 랭킹 5위까지 올랐던 미국의 베테랑 선수이다.[13] 결승에서는 비에른 보리와 5세트 풀접전 끝에 아쉽게 패하였다.[14] 더군다나 1라운드 상대는 지속적으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마누엘 오란테스였다.[15] 타이틀로 인정해주지 않는다.[16] 아직까지도 오픈시대 이후 이탈리아 선수들의 기록을 언급할 때 종종 등장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