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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22:16:43

아가토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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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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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bfff><colcolor=black> 아가토클레스
Ἀγαθοκλῆς
파일:아가토클레스.jpg
생몰년도 기원전 361년 ~ 기원전 289년
출생지 시칠리아 히메라
사망지 시칠리아 시라쿠사
지위 시라쿠사 참주
국가 시라쿠사
가족 카르티노스(아버지)
안타드로스(형)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첫째 아내)
알키아(둘째 아내)
테옥세나(셋째 아내)
아르카가토스(장남)
헤라클레이데스(차남)
아가토클레스(삼남)
아르카가토스(사남)
라나사(장녀)
테옥세나(차녀)
시라쿠사의 참주
재위 기원전 317년 ~ 기원전 289년
전임 민주정
후임 히케타스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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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쿠사 12대 참주. 1만 명에 달하는 민중을 학살하거나 추방하고 권좌에 오른 뒤 고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카르타고의 본거지인 아프리카를 침공하여 한때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으나 끝내 실패했다.

2. 생애

이탈리아 남부 레기온 출신의 카르티노스의 아들이다. 형으로 안타드로스가 있었다. 카르티노스는 고향에서 추방된 뒤 시칠리아 히메라로 이주하여 그곳의 여인과 결혼해 그를 낳았다. 당시 히메라는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던 시칠리아 서부에 속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시라쿠사로 이주했다. 카르티노스는 시라쿠사에서 시민권을 받은 뒤 도공으로 활동했다. 그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았으며, 나중에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원을 숨기는 대신 오히려 거리낌없이 밝혀 민중과의 친밀감을 드높였다.

그는 성년이 되었을 때 군대에 입대하여 병졸로 활동하다가 나중에는 장교로 발탁되었다. 기원전 337년 티몰레온의 뒤를 이어 시라쿠사의 스트라테고스가 된 다마스는 아그리젠토에 대한 전쟁을 벌였다. 이때 그는 상당한 용맹을 떨쳐 다마스의 호의를 얻었다. 다마스가 사망한 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미망인과 결혼했고, 그 덕분에 시라쿠사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당시 시라쿠사는 티몰레온 사후 민주파와 과두파간의 오래된 갈등이 또다시 전면에 나타나고 있었다. 과두파가 민주파를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한 뒤 600명으로 구성된 의회를 수립해 도시를 통치했다. 이때 그의 형 안타드로스가 장군으로 선출되었지만, 그는 민회에서 웅변가로 활약해 민주파의 거두로 성장했다. 이로 인해 지배층에게 밉보여서 이탈리아 본토에서 성공적인 원정을 펼쳤으나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이에 반감을 품고 주요 과두 정치인인 소시스트라토스와 헤라클레이데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소시스트라토스와 헤라클레이데스는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시라쿠사에서 추방했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로 가서 용병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를 통해 권력 기반을 다져서 시라쿠사로 귀환하려 했다. 그러나 첫번째 시도는 실패했다. 그는 칼라브리아의 주요 도시인 크로톤을 민주파와 연계하여 장악하려 했으나 완전히 실패했고, 몇몇 추종자들과 함께 타란토로 달아나야 했다. 타란토인은 처음에는 그를 용병으로 받아들였지만, 정치 활동을 노골적으로 전개하자 차츰 불신했고, 나중에는 도시에서 쫓아냈다. 그 후 과두파에 의해 도시에서 축출된 민주파 인사들을 규합하던 그는 아버지의 고향인 레기온에서 기회를 잡았다. 당시 레기온은 민주파가 장악했지만 시라쿠사 과두파의 맹공을 받고 있었다. 그는 레기온 수비대에 가담해 최선을 다해 싸운 끝에 시라쿠사군을 격퇴했다. 이 패배의 여파로 소시트라토스와 헤라클레이데스의 입지가 좁아진 끝에 축출되었고, 민주파는 권력을 되찾았다.

시라쿠사에서 축출된 과두파 인사들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시라쿠사를 도모하려 했다. 이에 민주파는 그를 불러들여 카르타고를 막게 했다. 이리하여 귀환할 수 있었으나, 시민들은 그의 야심을 불신하여 그 대신 코린트 출신 장성을 지휘관으로 세우기로 했다. 코린트에서 파견된 아케스토리데스는 과두파와 화해하고 카르타고와 평화 협정을 맺고자 했다. 민주파는 이를 수용해야 했고, 온건한 과두파 인사들이 집권했다. 아케스토리데스는 아가토클레스를 위험한 인물로 여기고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아가토클레스는 시라쿠사에서 달아난 뒤 사병을 육성한 후 레온티노이 시에서 세력을 구축한 후 시라쿠사에 맞섰다. 시라쿠사 정부는 아가토클레스의 위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위협을 느끼고 카르타고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르타고 사령관 하밀카르가 군대를 이끌고 레온티노이로 접근하자, 그는 하밀카르와 협상해 철수시켰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두 장군은 개인적인 동맹을 맺고 각자 시라쿠사와 카르타고의 참주가 될 때까지 후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카르타고군이 철수해버리자 시라쿠사는 고립되었고, 시민들은 과두 정치인들을 위해 목숨을 걸 의지가 없었기에 아가토클레스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그는 참주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기원전 319/318년에 귀환한 뒤 스트라테고스에 선임되었다. 그는 자신을 계속해서 막아서는 600인회를 제거하기 위해 비그리스 시칠리아인과 시라쿠사인 사이의 대립과 도시 빈민과 부유층 사이의 갈등을 이용했다. 외적에 대한 방어를 구실로 빈민 출신의 시칠리아인과 그리스인 전사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를 모아 오직 자신의 명령만 받들게 했다.

기원전 317년, 아가토클레스는 반대파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한 뒤 40여 명의 과두정치 인사들이 자신을 음해하려는 계획을 모의했다고 비난하고 이들을 체포했다. 그의 사병들은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고, 그는 이에 호응하여 체포된 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후 군악병들이 전투 신호를 알리는 나팔을 불자, 사병들이 즉각 도시 안을 휘저으며 학살을 자행했다. 상류층이라는 이유만으로 4,000명이 살해되었고, 6,000명이 넘은 이들이 도시를 탈출해 아그리젠토로 피신했다. 남겨진 재산은 시라쿠사 정부에 귀속되었다. 그 후 민회를 소집한 그는 과두파의 책략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티몰레온처럼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추종자들이 나라를 지켜달라고 호소하자 못 이기는 척하며 받아들인 뒤 무한한 권한을 가진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스(strategós autokrátor)를 맡았다. 그는 이 직책을 원하는 만큼 맡을 수 있었다. 이후 부채 탕감 및 토지 분배를 안건으로 제시해 빈민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그렇게 참주에 오른 뒤, 그는 시라쿠사에 적대하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제압하는 과업을 수행했다. 아그리젠토, 겔라, 메사나가 연합군을 결성하고 스파르타 출신의 아크로타토스를 선임했지만, 그는 별다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내부 분열만 일으키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주했다. 그러나 시라쿠사군 역시 메시나를 점령하지 못했다.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상황에서 카르타고가 개입했다. 기원전 314년, 카르타고 사령관 하밀카르가 평화를 중재했다. 카르타고의 영향권 밖의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자치를 인정받았지만, 패권은 시라쿠사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아가토클레스는 카르타고가 자국의 패권을 인정하겠다고 한 것에 고무되어 세력 확장을 본격적으로 단행해 여러 성읍을 점령했다. 기원전 313/312년, 그의 추종자들이 메시나에서 과두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그의 군대를 도시 안으로 입성시켰다. 뒤이어 타우로메니온 시도 그의 손에 들어갔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뒤이어 시라쿠사군이 아그리젠토로 공격하려 하자, 아그리젠토의 지도자 데이노크라테스는 카르타고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서야 상황이 위급하다는 걸 알게 된 카르타고인들은 하밀카르가 일처리를 잘못 했다고 비난하고 전쟁을 단행했다.

기원전 311년, 카르타고인들은 함대를 파견해 아가토클레스를 압박하여 아그리젠토에서 철수하게 했다. 시라쿠사군은 이에 맞서 칼타기론 지역의 갈라리아에서 아그리젠토군을 격파했다. 기원전 310년, 130척의 전함과 14,000명이 넘는 육군으로 구성된 카르타고군이 하밀카르[1]의 인도 하에 시칠리아로 이동했다. 도중에 폭풍우로 인해 60척의 배가 가라앉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하밀카르는 상륙 후 용병을 고용하고 그리스 동맹군과 합류해 군대를 보충할 수 있었다. 기원전 310년 6월, 히메라 전투에서 발레아레스 제도의 투석병들의 활약에 힘입은 카르타고군이 승리했고, 아가토클레스는 7,000명의 병사를 잃고 패주했다. 이에 시칠리아의 거의 모든 도시 국가들이 카르타고의 편에 섰고, 아가토클레스는 시라쿠사로 후퇴한 뒤 카르타고군에 포위되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끝장이라고 여긴 그는 일생일대의 도박을 감행하기로 했다. 기원전 310년 8월 14일, 60척의 배와 1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항구를 떠난 그는 해질녘까지 추격해오는 카르타고 해군을 가까스로 피했다. 당시 그의 군대에는 시라쿠사 시민과 그리스 용병 외에도 삼니움, 에트루리아인, 켈트인도 있었다. 그들은 시칠리아 북쪽 해안을 따라 우회하다가 서서히 남쪽으로 이동하더니, 6일간의 항해 끝에 카르타고 인근의 튀니지 서해안에 상륙했다. 함선들을 지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배를 전부 불태우게 한 뒤 카르타고로 직공했다.

아가토클레스가 이리 나올 줄은 상상도 못한 카르타고인들은 경악했다. 도시 건국 이래로 대규모 적군이 중심부를 공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카르타고 시에는 군사 요새가 불충분했고 정규 병력도 적었다. 아가토클레스는 각지를 약탈하여 상당한 재물을 긁어모았다. 카르타고인들은 4만 보병, 1,000 기병, 2,000 전차병으로 구성된 병력을 긁어모았다. 이들은 적보다 훨씬 많았으나 훈련과 전투 경험은 부족했다. 뒤이은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적의 기세에 짓눌려 카르타고 성벽 뒤로 물러났다. 이리하여 카르타고군이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하고 있을 때 카르타고 역시 시라쿠사군에게 에워싸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카르타고 정부는 하밀카르에게 이 소식을 알리며 일부 병력을 보내라고 명령했고, 하밀카르는 5,000명을 파견했다. 한편, 아가토클레스는 타인스를 포함하여 카르타고 인근의 여러 해안 마을과 도시들을 점령했다. 여기에 리비아의 왕 아이라마스와 동맹을 맺기도 했다. 해안을 정복한 후, 그는 내륙으로 진군하여 카르타고를 압박했다. 카르타고인들은 수차례 반격을 시도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한편 시칠리아에서도 상황이 반전되었다. 기원전 309년, 아가토클레스의 형제 안탄드로스의 지휘를 받은 시칠리아인들이 야습하려고 접근해오는 하밀카르의 카르타고군을 역습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하밀카르는 포로로 잡힌 뒤 처형되었고, 그의 수급은 아가토클레스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시칠리아 도시국가들은 순식간에 카르타고를 버리고 시라쿠사 편을 들었다.

이렇게 모든 게 잘 풀리는 듯했으나, 연회 석상에서 아들 아르카가토스가 연회 자리에서 어느 고위 장교와 말다툼을 벌인 끝에 살해해버린 사건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희생자의 친구들은 복수를 원했고, 많은 장병들이 아르카가토스를 죽이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아가토클레스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역시 죽여야 한다고 여겼다. 카르타고인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반란을 모의하는 장교들을 초대해 자기들 편에 서면 거액의 보상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가토클레스가 군대를 설득해 마음을 바꿔 자신을 따르게 하고, 카르타고인들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여러 전투를 치렀지만, 판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병사들이 그를 기꺼이 버리려 했던 데에는 아르카가토스의 일탈행위에 분노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아가토클레스는 자금이 부족해서 급여 지급을 차일피일 미뤘다. 현지 주민들을 약탈했다간 민심을 잃어버려서 입지가 위태로워지므로 그럴 수도 없었다. 급료 지급을 제대로 해주지 않으니 병사들이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횡행했다. 그로서는 어떻게든 추가 병력을 확보하여 카르타고를 완전히 제압해야 했다. 이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해 키레나이카 총독으로 임명된 마케도니아인 오펠라스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는 오펠라스가 자신을 돕는 대가로 카르타고 본토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오펠라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아테네에서 수많은 용병을 모집해 약 11,000명의 전사와 함께 서쪽으로 진군해 2달에 걸쳐 사막을 가로지르는 힘겨운 행군 끝에 겨우 합류했다.

그러나 아가토클레스는 겨우 도착한 오펠라스를 반역죄로 고발하여 처단한 뒤 오펠라스의 군대를 자기 소유로 삼았다. 이후 수년 간 아프리카의 영역을 자기 것으로 굳히고 카르타고 시를 점점 더 고립시켰다. 그러나 해상 봉쇄에 필요한 함대가 아직 부족했고, 육지 쪽에서 공격하는 것 역시 카르타고 시민들이 그 사이에 세운 강력한 요새 때문에 가망이 없었다. 이에 시라쿠사로 가서 함대를 가져오기로 하고, 2,000명의 병사를 데리고 시라쿠사로 향하면서 아프리카 내 시라쿠사군을 아들 아르카가토스에게 맡겼다. 한편, 카르타고 함대는 본토가 털리고 있는 와중에도 시라쿠사를 계속 봉쇄했다. 아그리젠토와 데이노크라테스 시의 과두 정치파는 여전히 강력했으며,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자치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인기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라쿠사 함대를 차출해 아프리카로 보내는 건 불가능했기에, 그는 몇년 간 시라쿠사에서 발목이 묶였다.

그러는 사이, 아르카가토스의 상황은 극적으로 악화되었다. 장병들은 아가토클레스가 엄격히 금지했던 약탈 행위를 거리낌없이 자행했고, 현지 주민들은 이에 반감을 품고 카르타고 편을 들었다. 카르타고군은 이 때를 틈타 3만 병력을 일으켜 공세를 개시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전략적 재능이 없던 아르카가토스는 1,000명의 기병을 포함하여 13,000명의 병력을 상실하는 참패를 당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입지는 급격히 위태로워져 자칫하면 몰살당할 위험에 처했다.

한편, 아가토클레스는 에트루리아와 동맹을 맺고 18척의 함대를 지원받은 뒤 마침 사령관이 사망하여 어수선해진 카르타고 함대를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카르타고 함대는 봉쇄를 풀고 철수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아그리젠토의 적군을 상대로 공세를 펼쳐 상당한 성과를 거둬들였다. 그 때 아프리카에서 아들이 완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기원전 307년 가을에 아프리카로 서둘러 돌아왔다. 아프리카에 도착해보니, 12,000명의 보병과 1,500명의 기병만 있었다. 여기에 리비아 동맹병 10,000명이 추가로 있었으나 그들의 충성심은 의심스러웠다.

그는 카르타고 진영을 공격해봤으나 3,000명의 병력만 잃고 실패했고, 리비아 동맹병 1만 명은 전원 탈영했다. 이에 시칠리아로 퇴각하려 했지만 군대를 싣고 갈 함대가 없었다. 이에 전군을 해안가로 집결시켜서 수비에 전념하게 한 뒤, 자신은 기원전 307년 10월~11월에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시칠리아로 가서 함대를 조달하려 했다. 그러나 남겨진 병사들은 그가 자신들을 버렸다고 여기고 반란을 일으켜 아가토클레스의 두 아들을 살해하고 장군을 뽑은 뒤 카르타고인들과 항복 협상을 벌였다. 카르타고인들은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거나 카르타고의 영향권에 있는 시칠리아 서부에 정착시켜주겠다고 제안했고, 병사들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직 소수의 지휘관만이 아가토클레스에게 충성을 끝까지 바치다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아프리카 전역이 처참한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새로 모으고 자금을 조달했다. 동맹 도시 세게스타에서 강압적인 징발에 반발한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그는 10,000명의 주민을 하루만에 모조리 살해하고 아이들을 노예로 팔았다. 이런 그의 강압적인 조치에 반감을 품은 부관 파시필로스가 일부 병사들과 함께 과두 정치파에 망명하고 여러 도시가 그에게서 독립했다. 이제 그는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반대 세력에 대한 양면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원전 306년 카르타고와 협상한 끝에 전쟁 전과 동일한 조건으로 경계를 짓고, 300달란트의 은과 200,000부셸에 해당하는 금을 카르타고에 바치는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했다.

이렇게 카르타고와 타협한 뒤, 그는 가용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과두 정치 지지자들과 전쟁을 벌였다. 토리온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데이노크라테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뒤 사로잡은 수천 명의 포로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때 생포된 데이노크라테스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 화해하고 부관이 되었다. 이후 데이노크라테스는 이전의 동료 파시필로스를 죽이고 아그리젠토를 그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아가토클레스는 시칠리아 동부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다. 기원전 305년 또는 304년에 디아도코이들이 각지에서 왕을 칭하는 것을 본떠 왕을 칭했다. 하지만 자신이 민중파라는 걸 잘 알았기에 궁궐이나 성을 짓는 것을 삼갔고, 왕관을 쓰지 않고 화환만 썼다.

한편, 주화에서도 그의 절대 권력이 명백히 드러났다. 기원전 310년까지는 '시라쿠사인'만이 모든 주화에 조폐국으로 지명되었지만, 기원전 310년부터 306년까지 은화 뒷면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며, 승리의 여신 니케의 이미지와 함께 승리의 표식이 새겨졌다. 나중에는 은화 주조에 그의 이름이 항상 새겨졌고, 시라쿠사인들은 오직 청동 주화의 조폐국으로서만 표현되었다. 그가 왕을 칭한 뒤에는 주화에 왕의 칭호가 새겨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디아도코이들과는 달리 주화에 자신의 얼굴을 새기지 않았다.

기원전 304년, 아가토클레스는 리파라 섬을 습격하여 주민들에게 시라쿠사에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비슷한 시기에 루카니아인들로부터 공격받은 타란토 시민들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즉시 개입하여 칼라브리아 일대를 석권했다. 그러나 루카니아인들의 저항이 워낙 거세서 인력과 물자 손실이 갈수록 불어나자, 그는 전쟁을 중단하고 시칠리아로 귀환했다. 기원전 299년, 그리스와 이탈리아 남부 사이의 항로를 통제하고자 그리스 서부 코르키라(코르푸) 섬을 점령하고 마케도니아 왕 카산드로스 함대를 격파했다. 말년에 카르타고에 대한 대규모 원정을 감행해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마음먹고 200척의 함대를 갖추었지만 원정을 감행하기 직전인 기원전 289년에 사망했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첫번째 아내에게서 아르카가토스와 헤라클레이데스를 얻었다. 두 아들은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으나 원정 막판에 장병들의 배신으로 피살당했다. 삼남 아가토클레스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끝난 뒤 남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군 사령관으로 등장한다. 한편, 그는 두 번째 아내 알키아와의 사이에서 아르카가토스를 낳았으며, 딸 라나사도 아마 알키아의 소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기원전 295년경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테옥세나 공주와 세번째로 결혼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아내 베레니케 1세가 전남편 필리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그는 테옥세나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얻었지만, 사망 직전에 예상되는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테옥세나와 두 아들, 그리고 지참금을 이집트로 돌려보냈다.

그는 딸 라나사를 에페이로스 왕국의 군주 피로스 1세와 결혼시키고 코르기라 섬을 지참금으로 주었다. 라나사는 나중에 피로스 1세와 이혼하고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결혼한 뒤 코르기라 섬을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넘겼다.

그는 통치 말기에 삼남 아가토클레스를 후계자로 선택하고 에트나 산 근처 군대 사령관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그 군대의 원래 사령관은 아가토클레스의 장남 아르카가토스의 아들이자 아가토클레스의 손자인 아르카가토스였다. 아르카가토스는 숙부에게 지휘권을 양도하는 대신 살해해 버렸다. 그는 이 소식에 격노했고, 아르카가토스의 후계자 자격을 박탈했다. 기원전 289년에 아가토클레스가 사망한 뒤, 손자 아르카가토스 역시 얼마 안가 살해당했다. 시라쿠사인들은 참주의 재산을 몰수하고 동상을 모조리 제거했으며, 그가 정복한 도시들은 대거 독립했다.


[1] 아가토클레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협의한 하밀카르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