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 심재현(沈載現) |
창씨명 | 아오마츠 타다마사(靑松忠正) |
본관 | 청송 심씨[1] |
출생 | 1918년 10월 13일[2] |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연지리 평동마을 | |
사망 | 1950년 7월[3][4] (향년 31세)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심리 원전마을 괭이바다 | |
묘소 |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연지리 천왕봉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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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8년 10월 13일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연지리 평동마을에서 아버지 심수열(沈守烈, 1876. 11. 12 ~ 1957. 1. 16)[5]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돈선(金敦善, 1890. 10. 27 ~ 1962. 2. 10)[6] 사이의 4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성군 고성읍 성내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그는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남달리 뛰어나고 총명했다고 하며, 소학교를 거쳐 1938년 고성농업실수학교(固城農業實修學校)[7]를 졸업하고 은사 이구희(李久喜) 선생의 주선으로 동료 학생들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현 소재 이사하야(諫早)농업학교[8]에 진학했다.
그 뒤 이사하야농업학교에 진학하여 학문에 열중하던 중, 일본인 학생들의 심한 멸시와 민족적 차별에 강한 반감을 품고 한국어 사용이 금지당한 것에도 분노를 느꼈다. 그러던 1939년 11월에 심재인의 하숙집에 박근철, 이상만(李相晩), 이재관(李在官) 등이 모여 일본인 학생인 테라사키 유키오(寺埼行雄)에게 박근철이 구타까지 당하고 '조선인이면서 건방지다'는 질책을 받은 것에 대한 분노를 토로했다. 이들은 이렇듯 자신들이 업신여겨지는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첫째, 조선 사람이 이렇게 일본인에게 멸시당하고 있는 원인은 조선이 일본에 비하여 문화수준이 낮으며 일본의 식민지가 된 때문에 일본 정부는 조선 사람에 대하여 교육을 시행하지 않고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관청의 상석(上席)은 모두 일본인이 점령하고 있고, 급료도 내지인(일본인)에게는 한국인의 배액을 지급하고 있으며 소학교(초등학교)도 내지인은 모두 입학시키고 있으나 한국인은 불과 몇 할 정도만 입학시키고 있으며, 졸업자의 취직도 한국인에 대하여는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고 모든 영달도 불리하게 되어 있다.
셋째, 이와 같은 차별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한국인이 분기하여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떠나 독립해야 된다고 각오하며 모든 것은 민족적으로 관철해야 한다.
둘째, 관청의 상석(上席)은 모두 일본인이 점령하고 있고, 급료도 내지인(일본인)에게는 한국인의 배액을 지급하고 있으며 소학교(초등학교)도 내지인은 모두 입학시키고 있으나 한국인은 불과 몇 할 정도만 입학시키고 있으며, 졸업자의 취직도 한국인에 대하여는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고 모든 영달도 불리하게 되어 있다.
셋째, 이와 같은 차별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 한국인이 분기하여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떠나 독립해야 된다고 각오하며 모든 것은 민족적으로 관철해야 한다.
이후 1940년 4월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후나코시정(船越町)에 소재한 임우칠(林友七)의 집에서 이상만(李相晩)·박근철 등과 함께 비밀결사 재일학생단(在日學生團)을 조직하고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과 농업정책 등에 반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독립운동의 방안을 협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41년 간조농학교를 졸업하고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로 이주하여 우쓰노미야 고등농림학교(현 우쓰노미야대학 농학부)에 진학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일본에서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귀국한 동지들을 통해 국내에 조직 거점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42년 2월 경상북도 예천군에서 몇몇의 동지들이 밀회를 하다가 심부름하던 아이의 실수로 조직문서를 분실하였고, 이것이 당시 예천경찰서 고등계 소속 조선인 형사 타카마츠(高松)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조직이 노출되면서 결국 국내와 일본에 있는 동지들이 일망타진당했다.
이로 인해 일본에서 체포된 그는 조선에 송환되어 1942년 11월 13일 대구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미결 기간동안 온갖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육군형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미결 구류 통산 360일)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4년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는데, 고향 고성군으로 돌아오는 동안에 몇 군데의 의원을 들러 수액을 맞고 응급처방을 받기도 했다. 그 뒤 8.15 광복을 맞아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1948년경 사회주의자로 내몰려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가족들은 논밭을 팔아 그를 구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으나, 끝내 생사조차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마산형무소 재소자 및 국민보도연맹원 700여 명과 함께 창원군 구산면 심리 원전마을로 끌려갔고, 그곳 앞바다인 속칭 '괭이바다'에 수장되어 목숨을 잃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심재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으며, 2009년 2월 2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심재인이 1950년 6.25 전쟁 직후 마산형무소에 상주하던 마산지구CIC와 마산지구 헌병대, 마산경찰서 소속 경찰들에 의해 희생된 마산형무소 재소자 및 국민보도연맹원 중 한 사람임을 밝혀냈다.[9]
3. 여담
- 고성군 영현면 출신의 진주 강씨 강분선(姜粉善, 1917. 11. 6 ~ ?)[10]과 혼인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 장남 심진표(沈鎭杓, 1945. 7. 7 ~ )[11]는 2007년 4월 25일 재보궐선거에서 경상남도의회 의원 고성군 제2선거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 당선되어 경상남도의회 의원을 역임한 바 있다.
- 차남 심의표(沈宜杓, 1948. 1. 12 ~ )[12]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1974년 KBS에 입사하여, KBS부산방송총국장, KBS비즈니스 감사, KBS 이사 등을 역임했다. 2008년 KBS 이사회 사장 후보 5명에 포함되기도 했다.
- 맏손자 심성민(沈聖珉, 1978. 6. 29 ~ 2007. 7. 31)은 2007년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1] 안효공파-좌의정공 통원(通源)파 25세 재(載) 항렬.(족보)[2] 청송 심씨 대동보에는 10월 1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6.25 전쟁 직후, 마산형무소 재소자로서 살해된 사람들 중 신원이 확인된 359명 중 한 사람이다.[4]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46년 6월 27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차남 심의표(沈宜杓, 족보명 심형보沈亨輔, 1948. 1. 12 ~ )가 1948년 1월 12일생이므로 이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5] 족보명 심수섭(沈守燮).[6] 김홍주(金洪柱)의 딸이다.[7] 현 경남항공고등학교.[8] 현재의 나가사키현립 이사하야농업고등학교.[9] 2009 상반기 조사보고서(3권)-2부(4.부산)에서 337쪽 진실규명대상자 및 521쪽 신원이 확인된 마산형무소 재소자 명단에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0] 강형숙(姜亨淑)의 딸이다.[11] 족보명 심진보(沈鎭輔).[12] 아명 심일민(沈逸民). 족보명 심형보(沈亨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