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5:29:24

신상균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12년 10월 23일,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일성과 동갑인데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그래서 김일성이 신상균을 동갑이라고 부르면서 아꼈다고 한다.

해방 직후부터 1947년까지 함흥상공협동조합 총무과장으로 일했으며 이후 함남일보사 업무부장으로 취임하면서 사회주의 건설 선전을 맡았다. 1951년에 내각간부학교로 진학, 1952년 외무성 경리부장에 임명되는 등 재정 전문가 경력을 밟았다.

1957년 내각사무국 지도원에 배치, 1958년에 김일성을 직접 만나 교시를 받고 내각사무국 경리부장에 임명되었다. 김일성 관저에서 젊어서부터 일한 덕분에 김정일의 측근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1973년에 내각사무국 부국장 겸 3사무국장에 임명되었고 이후 금수단의사당 사무국장으로 옮겨 금수당의사당, 국제친선전람관 건설에서 큰 공을 세워 김정일을 흡족하게 했다고 한다.

1974년에 중앙위원회 위원에 보선되었다. 1977년,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78년 조선로동당 재정경리부장에 임명, 1978년 6월에 중앙인민위원회 국장을 겸하였다. 이후 중앙인민위원회 부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런데 실수를 한 것인지 뭔지는 몰라도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다. 조선대백과사전에서 1974년에 후보위원으로 보선된 것을 죽을 때에는 위원이었다는 이유로 위원 보선이라고 대충 적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속단할 수 없으니 조선대백과사전의 저술을 따르기로 한다. 어쨌거나 중앙위원회 및 중앙인민위원회에서 사업하면서 김일성을 숭상하는 여러 위인전을 집필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이전부터 김일성 위인전을 쓰려고 했으나 글을 써본 적이 없어 미루고 있다가 6차 당대회를 즈음하여 김씨 일가 후빨 위인전을 쓰는 것이 '매우 절박한 시대적과제'(...)임을 자각하여 당에 자신이 위대성 저서를 쓰겠다고 자처하였으며 밤을 세우고 코피를 줄줄 흘려가면서 집필에 몰두해 주변을 감동시켰다 카더라.

이런 아첨행위가 헛되지 않았는지 1982년 4월,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7년 10월, 75세 생일으 ㄹ기념하여 로력영웅칭호를 받았으며 1992년에 김일성훈장과 로력영웅칭호를 또 받아 이중수훈자, 이중로력영웅이 되었다. 1988년 3월,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다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90년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당중앙위원회 위원, 중앙인민위원회 부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직하던 중인 1997년 8월 7일 20시 30분, 85세를 일기로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당중앙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당과 국가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면서 당과 수령의 권위를 백방으로 보장하며 나라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일떠세우고 경제적위력을 강화하는데 온갖 지혜와 정력을 다 바폈다. 신상균동지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위대한 주체사상으로 무장하고 우리 당에 무한히 충실했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중앙인민위원회 부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2021년 5월 22일자 로동신문은 <시대와 혁명앞에 지닌 력사적의무를 자각하고: 일편단심 당과 수령을 받든 충신들의 한생에서>라는 기사를 통해서 신상균을 '티없이 깨끗한 충성심으로 한생을 살아온' 과거의 충신이라고 칭송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이후 2022년 7월 11일자 로동신문도 <한 경제일군이 받아안은 생일선물>라는 기사를 게재하여 신상균과 김일성에 대한 썰을 풀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