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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3-10 13:08:02

신두성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영월 신씨[1]
출생 1890년 2월 17일
경상도 기장현 하북면 산막방 가동리
(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가동마을)[2]
사망 1959년 9월 24일[3]
묘소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모전리 공동묘지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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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0년 2월 17일 경상도 기장현 하북면 산막방 가동리(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가동마을)에서 아버지 신영수(辛永壽, 1871. 2. 16 ~ 1918. 7. 21)[4]와 어머니 남양 방씨(南陽 房氏) 방남서(1867 ~ 1933. 6. 4)[5]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전국적인 3.1 운동 소식과 인근 기장면의 3.1 운동 소식을 접하면서 정관면에서도 만세 시위를 계획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신두성을 비롯한 김윤희(金允熙)·정지모(鄭智謨)·오해환·오진환·김종복·박일봉(朴一鳳) 등이 김종복의 사랑방에 모여 비밀리에 시위를 계획하고 거사일을 장안면 좌천리 장날인 4월 9일로 정하였다.

1919년 4월 9일 거사 당일, 이른 아침부터 좌천리 장터에는 각처에서 많은 장꾼이 모였다. 신두성은 김윤희 등 5명과 함께 장터 중앙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불렀다. 이에 호응한 500~600명의 군중들도 일제히 만세를 불렀으며 경찰의 제지를 물리치고 장터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시위가 더욱 고조되고 시위 군중이 점점 늘어나자 일본 제국 경찰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서는 야만적인 무력 탄압과 발포로 시위대를 해산시켜 이 과정에서 많은 시위자들이 다치고 체포되었다. 시위 군중들은 붙잡힌 주동자를 석방시키기 위해 좌천주재소로 가서 일본 군경과 투석전을 벌였다. 그 결과 체포된 주동자들이 석방되었으며 시위 군중은 좌천리에서 정관면으로 돌아오는 내내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일본 경찰이 다시 주동자들을 체포할 때 함께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아 부산형무소에서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9년 9월 24일에 별세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판서공파(判書公派) 34세 성(星) 항렬.[2] 영월 신씨 집성촌이다.[3] 음력 8월 22일.[4] 족보명 신재수(辛在壽).[5] 방중화(房重華)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