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9:16:06

식민지 근대성론

1. 개요2. 식민지 수탈론,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3. 식민지 근대화론 및 뉴라이트 사관4. 이분법의 타파 및 식민지 근대성

[clearfix]

1. 개요

일제 강점기 시기의 역사를 바라보는 두 반대되는 역사관인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정 및 통합하려는 움직임이다. “수탈 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상을 구성하려는 목적을 가지며[1], 식민지 조선 사회에는 “개발과 수탈”의 양면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2] 근대화론과 수탈론 모두 정당한 면과 비판할 점이 존재하며, 이분법에 심취하여 무조건적으로 상대 입장을 반박 및 비난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쟁이 있으며,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2. 식민지 수탈론,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

일본이 조선의 지배를 위해 만든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역사관으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며 인적, 물적 수탈을 자행하였다는 이론이다.[3]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 교육자들 역시도 식민지 수탈론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이후 서술될 뉴라이트, 식민지 근대화론 등의 이론과는 완전한 대척점에 있으며 당시의 경제 상황, 독립 운동을 보는 시각 등 많은 부분에서 완전히 궤를 달리한다. [4] 식민지 수탈론과 같이 제국주의에 대한 노골적 반감을 드러내는 이론으로는 내재적 발전론과 자본주의 맹아론이 있다.

내재적 발전론은 해방 직후인 1960년대 식민사관 비판론의 연장선에서 형성된 역사학적 관점이다. 한국사가 정체되었다는 식민사관의 논지를 비판하며 한국이 내재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가능성을 제기 및 강조한다. 민족주의사학과 마르크스주의사학이 제기한 반식민사학적 시각에 영향을 받아 조선 후기 실학의 재발견 등을 근거로 해당 주장을 전개한다. 식민사학의 타율성과 정체성론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를 위해 민중적 요소와 역사적 발전의 내재적 필연성을 강조한다.[5]

자본주의 맹아론에 관한 내용은 자본주의 맹아론 문서 참조.

3. 식민지 근대화론 및 뉴라이트 사관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의 지배 체제 아래 있었던 일제 강점기가 결론적으로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주장이다. 자세한 내용은 식민지 근대화론 문서 참조

뉴라이트 사관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기반으로 조선을 폄하하고 일제를 재평가하며 권위주의 독재자를 찬양하는 경향을 보이는 역사관이다. 자세한 내용은 뉴라이트(대한민국) 문서의 4.1 참조.

4. 이분법의 타파 및 식민지 근대성

앞서 언급했듯 식민지 근대성론은 수탈론과 근대화론의 이분법을 타파하고자 하는 새로운 역사관이다.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수탈론과 근대화론 모두 비판받을 만한 점이 있음을 시사한다.

수탈론의 경우 일제 강점기를 단순한 경제적 착취의 시기로 규정하여 일제의 행위를 전적으로 부정적인 관점에서 평가한다. 하지만 식민지 공업화를 연구하는 일부 연구자들은 식민지 시대의 공업 발전과 해방 이후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의 연결성을 탐구하고 있다. 그들은 그 시기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들 중 일부는 필연적으로 식민지시대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수탈론에 심취할 경우 한국자본주의의 기원이 식민지 시대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치부하여 역사를 보는 눈을 가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처럼 식민지 근대성론을 주장하는 학자들 중 일부는 ‘수탈론’에 대해 일제의 수탈을 ‘원시적 약탈’로 규정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수탈론자들에 대한 비판 중 하나의 예시에는 토지 약탈의 서술에 대한 비판이 있다. 수탈론자들은 토지신고 과정에서 불법적 토지신고와 무신고지에 대한 약탈이 이루어졌고, 불법적 소유권 변동에 대한 농민의 분쟁 제기가 무시당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무신고지에 대해서는 정해진 신고 기간이 지난 이후에도 토지신고서를 접수하였으며, 별도의 조사를 통해 지주가 밝혀질 경우 신고를 권유했다. 결국 무신고지는 전체 토지의 0.05%에 불과하고, 이 대부분이 분묘지와 잡종지여서 실제 주인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토지신고서와 결수연명부(일제가 신고누락을 방지하고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납세자 및 납세액을 계산한 장부)를 대조하였으므로 불법적 신고가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또한 토지의 국유지화에 대한 농민의 분쟁 제기 원인 중 다수는 광무사검의 공토 확보 방식, 그리고 그 이면의 조선후기 토지지배방식의 잔존에 의한 것이지 일제가 시행한 ‘사업’의 결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사업’에서의 분쟁지 처리에서는 국유로 사정된 비율이 경성부 60%, 파주군 8.9%, 김해군 44%였고, 승복하지 않을 경우 불복신청을 할 수 있었다. 불복신청지 중 46.6%가 심사대상이 포함되었고, 이 중 92.1%에서 불복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이를 통해 조선총독부가 분쟁지 처리에서 일방적으로 유리한 입장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6]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일제 시대에 있었던 발전을 과장 및 미화하려 했다는 내용의 비판이 주를 이룬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여러 가지 자료들을 근거로 일제 시대에 이루어졌던 경제적 근대화를 주장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 대부분이 ‘본국’으로 통칭되었던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것이었지 당시의 조선인들은 경제적 근대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비판한다. [7]

일례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일제 시기 조선의 의료 체계에 큰 발전이 있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 근거로 그들은 일제 강점기 동안의 조선의 의사 수가 유의미하게 증가하였다는 자료를 제시하지만[8], 실제 조선인들에게 근대식 의사는 사실상 접근이 불가능했고, 오히려 조선인들이 접근 가능했던 전통 의사(이하 의생)을 박해하여 의사와 의생 수를 합친 수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또한, 강점 기간 동안 관립, 도립 의원을 증설하였다는 자료를 제시하여 당시의 의료 발전을 뒷받침하지만 <조선총독부통계연보>의 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도립 의원을 이용하는 사람은 일본인 환자들이 압도적이었다.[9]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더 자세한 비판은 식민지 근대화론 문서 항목 3~4 참조.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은 해당 문서 외에도 많은 매체에서 다루고 있으니 관련 뉴스, 논문, 도서 등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처럼 식민지 근대성론은 이분법에서 벗어나 식민지 근대화론과 수탈론에 대해 모두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다.

[1] 이기훈, 오혜진, 이태훈, 이혜령, 이혜인, 조형근, 천정환, 홍종욱. (2021). 좌담 : 식민지근대성론의 역사와 현재. 역사비평,, 10-53, 10.38080/crh.2021.08.136.10[2] https://www.jeolla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577923[3] https://www.jeolla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577923[4] https://www.joongang.co.kr/article/16967[5] 김정인(2017) 식민사관 비판론의 등장과 내재적 발전론의 형성,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제125호, 7-44 기반으로 작성[6] 조석곤(1997)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넘어서: 식민지시대의 재인식, 창작과비평 1997년 여름호, 355-370 기반으로 작성[7] 이준식(2017) 식민지 근대화론이 왜 문제인가?, 내일을 여는 역사 2017년 봄호, 20-36 기반으로 작성[8] http://yeoksa.blog.fc2.com/blog-category-31.html[9]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뉴라이트 역사학의 반일종족 주의론' 비판"의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