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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5:06:00

스켈트 해전

파일:스켈트 해전.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스페인 해군3.2. 바다의 거지들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네덜란드 독립 전쟁 시기인 1574년 1월 29일 줄리안 로메로(Julián Romero)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해군과 로데베이크 판 보이스(Lodewijk van Boisot) 장군이 이끄는 '바다의 거지들'이 맞붙은 해전. 라이머스와알(Reimerswaal) 해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스페인 해군은 자위더르 해전에 이어 이 해전에서도 패배하면서 해상권을 네덜란드 반군에게 내준다.

2. 배경

1572년 4월 네덜란드 북부의 홀란트와 제일란트 주민들이 알바 공의 폭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빌럼 판 오라녀를 지도자로 추대했을 때, 왈헤렌 섬의 대다수 도시들도 호응했다. 하지만 미델부르크(Middelburg)만은 펠리페 2세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했고, 펠리페 2세가 대리인으로 삼은 알바 공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 미델부르크는 스페인 병력의 진주를 허용하고, 네덜란드 반군 세력의 확장을 막아섰다.

그러나 1573년 7월, 미델부르크의 상황이 위태로워졌다. '바다의 거지들'과 영국 해군이 연합하여 해상을 봉쇄하면서, 보급이 끊겨버린 것이다. 이후 도시는 장장 6개월 이상 포위되어 식량난과 전염병에 시달렸다. 알바 공은 이들을 돕기 위해 스페인 해군을 파견하려 했지만, 1753년 10월 11일 자위더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구원에 실패했다. 그 후 알바 공은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스페인으로 소환되었고, 1573년 11월 17일 브뤼셀에 도착한 신임 총독 루이스 데 레퀴상스는 11월 29일 총독으로서 선서한 뒤 곧바로 미델부르크 시를 구원하기 위한 작전에 몰두했다.

레퀴상스는 베르겐에서 75척에 달하는 함선을 모으고, 지휘관으로 줄리안 로메로를 선임했다. 이에 로메로는 "저는 육상에서의 전투는 자신 있지만, 해상에서 싸운 적은 없어서 함선을 이끌 재목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지만, 레퀴상스는 그 외에는 적임자가 없다며 함선 지휘를 맡겼다.[1] 또한 식량을 가득 실은 또다른 함대를 앤트워프에 집결하여 산초 다빌라 제독이 관할하게 하였다. 1574년 1월 말, 두 함대는 플러싱 인근에서 연합한 뒤 미델부르크를 구원하기 위해 북상했다.

한편, 네덜란드 반군 역시 스페인 해군을 요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췄다. '바다의 거지들'의 지휘관 로데베이크 판 보이스는 스켈트 강을 따라 항해하여 베르겐의 맞은 편에 진영을 세웠다. 빌럼 판 오라녀는 친히 진영을 찾아가서 장교들을 모아놓고 "미델부르크 시를 스페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부디 압제로부터 시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라고 권고했다. 이에 장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자유를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릴 각오로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빌럼은 그들의 전의가 굳센 것에 만족하여 델프트로 돌아간 뒤, 당시 스페인 육군에게 포위된 레이던 시를 구원할 준비를 착수했다. 이후 미델부르크를 둘러싼 양측의 해전이 막을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스페인 해군

3.2. 바다의 거지들

4. 전투 경과

1574년 1월 29일, 로메로의 스페인 함대는 베르겐에서 출항하여 스켈트 강을 따라 나아갔다. 그들은 항구를 떠나면서 출항을 지켜보는 총독 레퀴상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예포를 발사했다. 그런데 불미스런 일이 벌어졌다. 예포 중 하나가 잘못 발사되면서 배 한 척이 산산조각나고, 그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이 전원 죽어버린 것이다. 함대는 이 일로 전의가 크게 꺾인 채 천천히 항해했다. 산초 다빌라가 이끄는 함대는 로메로의 함대가 적을 몰아내는 걸 확인한 뒤 뒤따라갈 예정이었다.

한편 로데베이크 판 보이스가 이끄는 바다의 거지들은 라이머스와알 해협에서 전투 태세를 갖추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당시 보이스 제독은 열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어서 부관이 대신 지휘했지만, 전투 직전에 "나는 아직 입으로 깃털을 날릴 수 있다"면서 지휘를 재차 맡았다. 이윽고 스켈트 강을 통해 바다에 진입한 스페인 함대는 왈헤렌 섬 앞바다의 라이머스와알 해협에서 대규모 함대를 발견했다. 스페인군은 이들을 아군이라고 착각하고 별다른 경계 없이 북상했지만, 곧 적군이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전열을 형성했다. 보이스 제독은 적이 전열을 채 정비하기 전에 공격하기로 하고, 전 함대를 이끌고 달려들었다.

로메로의 첫번째 전열 함대는 넓은 측면으로 함선을 돌린 뒤 함포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바다의 거지들은 상당한 희생을 입었고, 보이스 제독은 한쪽 눈을 잃었다. 그러나 워낙 다급한 나머지 탄약을 낭비해버려서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소진해 더 이상 포격을 가할 수 없었다. 바다의 거지들은 이 틈을 타 적 함선에 달라붙은 뒤 승선하여 모조리 도륙했다. 그들은 배틀액스, 파이크, 권총, 단검을 적극 활용하여 적군을 모조리 쳐죽이고 시신을 바다로 던졌다.

스페인 해군은 전열을 제대로 짜지도 못하고 습격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반격도 못해보고 붕괴되었다. 15척의 배가 나포되었고, 1,200명에 달하는 장병들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반면 바다의 거지들의 피해는 2척이 침몰하고 300명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수준에 그쳤다. 로메로는 하마터면 사로잡힐 뻔했지만, 쪽배를 타고 가까스로 빠져나와 해안가로 몸을 피했다. 로메로는 강둑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레퀴상스를 찾아가 패전을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일찍이 선원이 아니라 육지의 전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일 100척의 함대를 주셨다면, 이것보다 더할 나위 없이 나았을 겁니다."

5. 결과

스페인 함대는 스켈트 해전에서 참패한 뒤 베르겐으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산초 디발라의 또다른 함대도 패전 소식을 접하자 안트베르펜으로 퇴각했다. 레퀴상스는 낙담한 채 브뤼셀로 돌아갔고, 미델부르크는 1574년 2월 18일 네덜란드 반군에게 항복했다. 이리하여 왈헤렌 섬 전체가 네덜란드 반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레퀴상스는 반란군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고 빌럼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빌럼은 "모든 도시가 자치권을 누릴 수 있게 할 것"과 "모든 스페인군을 네덜란드에서 철수시킬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협상에 응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후 레퀴상스는 독일에서 병력을 징병한 뒤 1574년 봄에 레이던 시를 포위했다. 빌럼 판 오라녜는 레이던 시를 구원하기 위해 두 동생인 로데베이크 판 나소, 헨리크 판 나소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이에 레퀴상스는 레이던 시 포위를 풀고 빌럼 형제를 상대하러 갔다. 양측은 1574년 4월 14일 모케르헤이데 전투에서 회전을 벌인다.


[1] 로메로는 몽스 공방전 때 몽스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달려오던 빌럼 판 오라녜를 야간에 습격하여 거의 죽일 뻔한 적이 있었다. 또한 하를렘 공방전 때 앞장서서 성벽을 기어오르다 한쪽 눈을 잃기도 했다. 로메로는 네덜란드 주둔 스페인 장성들 중 전투 경험이 가장 풍부한 인물이었으며, 스페인 장병들은 전장에서 언제나 용맹하게 싸우는 그를 존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