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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13:26:20

스즈키 우메타로

파일:Suzukiumetaro.jpg
이름 스즈키 우메타로 (鈴木 梅太郎)
출생 1874년 4월 7일
일본 제국 시즈오카현 시즈하라 군
(現 일본국 시즈오카현 마키노하라시)
사망 1943년 9월 20일 (향년 69세)

1. 개요2. 생애3. 업적
3.1. 비타민 발견과 각기병으로부터 인류 구제
4. 잊혀진 업적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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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 시절 일본화학자.

2. 생애

스즈키 우메타로는 1874년(메이지 7년)에 시즈오카현 시즈하라 군(현 마키노하라 시)에서 스즈키 쇼조(鈴木 庄蔵)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1892년에 제국대학 농과대학(현 도쿄대학 농학부)에 입학하여 1896년에 졸업하였다. 1900년에 농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01년에 독일로 건너 가 베를린 대학에서 5년 동안 유학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도쿄 제국대학 농과대학 교수직을 지냈다. 이후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여러가지 연구 업적을 세웠다.

1943년 향년 69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3. 업적

3.1. 비타민 발견과 각기병으로부터 인류 구제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스즈키 우메타로는 세계 최초비타민을 발견한 화학자이다. 그가 발견한 종류의 비타민은 티아민(비타민 B1)이었다.

스즈키가 살던 시기는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매년 수십 만명의 사람들이 각기병 때문에 죽어나가던 시기였다. 각기병은 다리가 붓고 마비되어 걷지 못하게 되며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각기병의 원인은 당시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각기병에 걸린 사람들은 원인도 모른 채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해 사정이 가장 나았다는 일본조차 각기병 때문에 매년 2만 명 이상이 사망할 정도로 각기병이 만연해 있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비타민이라는 성분은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영양소였으며, 네덜란드의 생리화학자 크리스티안 에이크만이 각기병에 대해 연구하던 중 각기병 발병에 관여하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성분이 존재하리라고 이론적으로 예측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스즈키는 에이크만의 각기병 연구의 후행연구를 진행하다가 속겨에 각기병을 억제하는 성분이 있음을 직관하였고, 이 성분의 추출을 목표로 하여 수 년간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후 1910년 스즈키는 실제로 이 성분을 추출해내는 데 성공하여 이 성분을 '오리자닌(Oryzanin)'이라고 임시로 명명하고, 다음 해 도쿄화학회지에 「糠中の一有効成分に就て」(속겨 속의 제 1 유효성분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투고하였다. 스즈키는 오리자닌을 항각기 인자로 인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논문에서 해당 성분이 사람동물생존에 필수적인 미지의 영양소임을 강조하며 후대의 비타민 개념을 분명하게 주창하고 그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다. 후에 오리자닌은 비타민의 일종으로 밝혀졌고, 티아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비타민을 세계 최초로 발견해낸 것과 동시에, 각기병 예방의 길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그는 후속 연구에서 오리자닌이 각기병을 치료하는 데에 효력이 있음을 추가로 입증해내 각기병 치료법 또한 세계 최초로 고안해냈으며, 이로써 에이크만과 함께 인류 사회에서 각기병을 퇴출시키는 데에 기여를 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4. 잊혀진 업적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의 업적은 잊혀져서 그가 비타민을 세계 최초로 발견해냈고 각기병 퇴출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비타민은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라는 의미의 비유적 표현으로도 쓰이고 그만큼 인체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매우 중요한 영양소라는 사실은 오늘날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그 존재를 처음 발견해낸 것은 중요한 과학적 업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비타민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세계 생화학계에서는 비타민에 관한 연구가 폭발적으로 추진되어 오늘날 어떤 종류의 비타민들이 있고, 각각이 인체에서 어떤 중요한 기능을 하는지 낱낱이 알려져 인류의 보건 수준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또 스즈키는 각기병의 치료법 또한 최초로 설파했으며, 그 덕분에 20세기 초까지 매년 수십 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각기병은 오늘날 거의 종적을 감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본인들 중에서조차도 그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며, 하다못해 비타민을 세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자기네 나라 사람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일본인도 많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비타민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 폴란드계 미국인 생화학자인 캐지머 펑크(Casimir Funk, 1884–1967)라는 잘못된 정보가 제시되는 경우도 허다하다.[1] 펑크는 스즈키와 거의 같은 시기에 독자적으로 비타민 추출에 성공해냈으나 그 시기는 1912년으로 명백하게 스즈키보다 늦었고 비타민(Vitamine)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정착시킨 인물일 뿐 비타민을 가장 처음 추출한 인물이 아니다.

스즈키의 업적은 당대에도 세계가 알아주지 못했다. 충분히 노벨상을 받을만한 세기의 업적이었음에도, 노벨위원회는 1929년 노벨화학상 분야에서 비타민 발견 업적과 관련한 주제로 시상을 할 때, 스즈키가 아닌 에이크만과 영국인 생리화학자 프레더릭 홉킨스(Frederick Hopkins, 1861-1947)에게만 공로를 돌렸고 스즈키는 노벨상을 받지 못 했다. 스즈키가 작성한 논문의 독일어 번역본이 심사위에 제출될 때, 그가 발견한 비타민 B1의 개념이 '새로운 영양소'임을 어필하는 내용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때문에 스즈키의 업적이 노벨위원회에게 주목을 받지 못했고, 에이크만과 홉킨스가 노벨상을 받을 때 같이 내비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견이 많다.

번역본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노벨위원회에서 비타민 개념의 이론적 토대를 최초로 마련한 업적을 높이 사서 에이크만에게 상을 준 것이라는 반론도 있으나, 노벨위원회에서 보통 이러한 류의 과학적 업적에는 이론적 바탕을 먼저 제시한 사람과, 후행연구에서 해당 이론을 실제적으로 입증해 낸 사람을 같이 시상하는 관례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을 볼 때 별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혹자는 당시 서구인들이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시각이 팽배했던 탓에 일본인인 스즈키에게 상을 고의로 주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2] 이 역시도 입증할만한 근거는 없다. 상술한 독일어 역본에서 새로운 영양소로서 발견했다는 언급을 하지 않아 주목받지 못해 안타깝게 상을 놓쳤다는 설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 노벨상 시상에 대해 알력 때문에 받지 못했다는 설도 상당히 설득력 있게 주장되고 있다. 도쿄대학 의학부가 농학박사 따위가 자기네들을 제치고 먼저 일본 최초로 노벨상을 받는 꼴을 볼 수 없어서, 스즈키 대신 홉킨스를 노벨상 후보로 밀어준 결과 스즈키가 탈락하고 홉킨스가 대신 받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결핵, 콜레라, 티푸스와 같은 난치병들의 원인이 세균이라고 하나둘씩 밝혀지던 터라 세균학이 발흥하던 시기였고, 이러한 풍조에 맞춰 도쿄대학 의학부에서는 각기병의 세균원인설을 주구장창 지지하며 연구를 했었는데, 정작 각기병의 원인은 세균이 아닌 비타민이었고, 그 사실을 최첨단이라고 자부하던 의학부가 아닌 일개 농학부 박사가 밝혀냈으니 자신들의 위상에 금이 갈 만 했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당시 일본 의학계에서는 스즈키의 연구 결과에 대대적으로 태클을 걸고넘어졌다고 하며, 스즈키 대신 홉킨스가 수상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도쿄대 의학부를 필두로 한 일본 의학계의 방해 공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노벨상을 이런 식으로 라이벌 측에서 알력 다툼과 방해 공작으로 받지 못하게 만든 사례는 상당수 존재한다. 당장 대한민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만 해도 김영삼/이명박 정권에서 노벨평화상 반대/취소 공작을 벌였으니.[3]

뭐가 진실이건 간에, 스즈키의 노벨상 불발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 말한 요인들이 없었더라면 스즈키 역시 비타민 발견의 공로로 틀림없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기 때문이다. 결국 스즈키 우메타로는 오늘날에 일본인이 노벨상 수상을 안타깝게 놓친 몇 가지 사례 중 하나로써 대표적으로 소개되기도 한다.[4] 만약 그의 업적이 대대적으로 인정을 받았더라면, 스즈키 우메타로는 1949년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키보다 20년 더 이른 일본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을 것임이 자명하다. 그래도 1926년과 1928년에 제국발명협회로부터 각각 특별기념은사와 특등상패를 받고, 1937년에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명예상을 수상·1943년에 문화훈장을 받는 등 업적에 대한 보상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즈키의 이러한 업적들은 오늘날 들어서 그의 안타까운 노벨상 수상 불발 사연으로나마 소개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뒤늦게 일부 사람에게서 각별히 인지도를 얻고 있기도 한다하니 이를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5. 기타

여담이지만 비타민 A의 최초 발견 역시 스즈키 산하의 연구실에서, 일본인인 다카하시 가쓰미(高橋 克己, 1892-1925)에 의해 이루어졌다. 비타민 A는 간유(肝油)에서 처음으로 추출되었다.


[1] 심지어 구글에 검색해도 추천 스니펫에서 이렇게 나온다.[2] 노벨상은 국적에 상관없이 상을 주라는 노벨의 유언과는 달리, 초기에는 공공연하게 유색인종의 시상 차별을 행해왔으며, 실제로도 에이크만에게 노벨상을 시상하기 불과 3년 전에도 발생 메커니즘을 규명한 야마기와 가쓰사부로(山極 勝三郎)와 이치카와 고이치(市川 厚一)라는 일본 출신의 의학자 두 명이 매우 유력한 생리의학상 수상 후보로 오른 적이 있었는데, 노벨위원회원들 사이에서 “동양인에게 노벨상은 이르다”는 이유로 수상을 불발시키고 기생충이 암의 원인이라 주장한 다른 서양인에게 어거지로 상을 주었다는 의혹이 있다. 여담이지만 그렇게 어거지로 수상시킨 기생충 암 기원설은 현재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3]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영삼은 자신이 노벨평화상을 받고 싶다며 외교관까지 동원해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막으려 했다. 자세한 사항은 김영삼/부정적 평가 문서 참조.[4] 일본인 과학자들이 간발의 차이로 아쉽게 노벨상 수상을 놓친 사례가 몇 가지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노벨상/각국 수상 현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