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기 923년 6월 15일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3세와 가신이었다가 왕이 된 로베르 1세가 왕위를 놓고 맞붙은 전투였다. 승자와 패자 모두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했다.2. 배경
서기 879년 9월 17일, 단순왕 샤를 3세는 카롤루스 왕가 출신의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이 2세 말더듬이 왕과 프리울리의 아델라이드[1]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부왕이었던 루이 2세는 샤를이 태어나기 5개월 전인 879년 4월 10일 콩피에뉴에서 승하했다.이복형들인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는 샤를 3세가 부친 사망 이후 5개월 만에 태어난 것을 빌미로 삼아 계모인 아델라이드에게 간통 혐의를 뒤집어 씌우고, 샤를 3세의 왕위계승권을 박탈했다. 그러나 아델라이드는 가혹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간통 혐의를 끝까지 부인해 무죄 판결을 얻어냈으며, 그 덕분에 샤를 3세의 왕위계승권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복형들인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가 잇달아 사고로 인해 죽은 뒤에도, 샤를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이 저지되었고, 5촌 당숙인 동프랑크 왕국의 비만왕 카를 3세가 서프랑크의 왕위를 이었다. 아르눌프에 의해 카를 3세가 축출된 888년에도 샤를은 어리다는 이유로 대바이킹 전쟁의 영웅이었던 로베르 가문의 외드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이후 장성한 샤를 3세는 외드와 치열한 정쟁을 벌였고, 외드는 외아들이었던 아르눌이 12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결국 샤를 3세를 후계자로 인정했다. 898년 외드가 승하한 뒤, 샤를 3세는 비로소 서프랑크 왕국의 군주로 등극했다.
서기 911년, 샤를 3세는 동부의 로트링겐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지지해준 로트링겐 귀족들을 중용했고, 기존에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네우스트리아 지방의 귀족들을 홀대했다. 이에 분개한 귀족들은 자신들과 친밀했던 외드의 동생 로베르 1세를 추대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922년 6월 29일, 귀족들은 샤를 3세가 노르드계 바이킹과 싸우러 나간 틈을 타 로베르 1세를 서프랑크의 왕위에 추대했다. 로베르 1세는 다음날 랭스에서 대주교의 추도를 받으며 즉위식을 거행했다.
샤를 3세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로베르 1세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치러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샤를 3세는 로트링겐으로 도주해야 했다. 그 후 자신 덕분에 서프랑크 북부 노르망디에 정착하여 루앙 백국[2]을 세울 수 있었던 노르웨이계 바이킹 출신의 흐롤프(롤로)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롤로는 이를 수락하여 로베르 1세가 장악한 파리 인근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로베르 1세가 롤로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자, 샤를 3세가 이 틈을 타 수아송으로 진격했다. 로베르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친히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샤를 3세를 막으려고 했다. 이리하여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건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기록이 부족하여 양측의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전력이 분산된 로베르 1세의 군대에 비해 샤를 3세의 군대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샤를 3세는 개인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지휘권을 풀베르또와 하롤드 백작에게 위임했다. 그는 또 50명의 전사들에게 로베르 1세를 암살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이후 벌어진 전투 와중에 로베르 1세가 전사들에게 습격당해 죽으면서, 샤를 3세의 계획이 성공하는 듯했다.그러나 로베르 1세의 아들인 대(大) 위그[3]가 부친의 시신을 병사들에게 보여주며 적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고, 이로 인해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대 위그는 각지에서 몰려온 지원병을 규합한 뒤 반격을 가했고, 샤를 3세로부터 지휘권을 위임받은 풀베르또를 붙잡아 '왕을 살해한 혐의'로 처형했다. 이로 인해 사기가 뚝 떨어진 데다가, 샤를 3세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싸울 의향이 없었던 로트링겐 장병들은 전장을 이탈했다. 이리하여 수아송 전투는 로베르 1세 측의 승리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