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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3-13 00:11:44

수리야바르만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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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제국 제12대 국왕
수리야바르만 1세
សូរ្យវរ្ម័នទី១
<colbgcolor=#6B8E23><colcolor=#fff,#fff> 출생 생년미상
파일:크메르 제국 국기.svg 크메르 제국
사망 1050년
파일:크메르 제국 국기.svg 크메르 제국
재위 기간 크메르 제국 국왕
1006년 ~ 1050년 (44년)
대관식 1006년
전임자 우다야디티야바르만 1세
후임자 우다야디티야바르만 2세
종교 힌두교

1. 개요2. 가계3. 생애
3.1. 크메르 내전기3.2. 즉위 후3.3. 스리위자야 견제와 촐라 왕국과의 동맹3.4. 사망
4. 참고 항목

[clearfix]

1. 개요

크메르 제국의 11대, 12대 제왕. 앙코르 동쪽의 호족 출신으로, 본래는 제위에 즉위할 수 없었던 위치였으나 내전기에 승리하여 실권을 쥐었다. 이후 종교 관용 정책, 시암 침공과 영토 확장, 바이욘 금탑(金塔)을 비롯한 여러 문화유산을 건립한 치적군주, 명군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며 남인도촐라 왕국과 동맹을 맺어 그간의 악연인 스리위자야의 영향력을 말소시키는 등 제국 존속에 큰 기여를 하였다.

정식 왕호(휘)는 수리야바르만 1세, 별칭은 율법의 왕(律法之王, King of the Just Laws)과 열반왕 총 두개로, 전자는 내전 승리 직후 통치권의 정당성 강화를 목적으로 약 4천명에 달하는 현지 관료들을 왕궁에 초대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치른 것에서 기원하였으며 후자는 그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는 점에서 사후 열반에 들었다는 존칭이다.

2. 가계

수리야바르만 1세는 단지 호족 출신이기에 자야바르만 5세의 외조카 우다야디티야바르만 1세와 달리 자야바르만과 혈통적 관계가 전무했다. 현대에 전해지는 비문 기록에 따르면 수리야바르만 1세는 모계쪽 조상 중, 3대 제왕 인드라바르만 1세가 있다고 하지만 황후 비라락슈미가 4대 제왕 야쇼바르만 1세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등 정통성보다 힘을 우선시하는 앙코르 왕조의 집권 풍습을 생각하면 진짜 제왕의 피를 이었다기보다 정통성 강화를 위한 선전일 가능성이 높다.

앙코르계 왕조는 핏줄의 정통성이 한자문화권 왕조와 달리 압도적이지 않으며 정통성이 약해도 힘이 센 자가 정통성이 강한 걸로 간주되고 힘이 약한 자를 굴복시킨 후 즉위가 가능하며 즉위 후에야 자신의 정통성을 선언하여 입지를 굳히는 방식이다. 또한 부계뿐 아닌 모계에서도 왕실 조상이 있으면 정당성을 얻을 수 있고, 부모계에 황실 조상이 없으면 황실 가문의 여자와 결혼해 기존 황실과의 연을 맺어 정당성을 얻으면 된다. 수리야바르만 1세의 경우도 이러한 선전의 일종일 가능성이 높다.

3. 생애

3.1. 크메르 내전기

크메르 제국은 자체적인 기록을 체계적으로 남기지 못하고 비문 형식으로만 내려오기에 수리야바르만 1세의 상세한 기록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가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크메르 내전기 이후부터다.

1001년 10대 제왕 자야바르만 5세가 사망하고 그 뒤를 자야바르만의 외조카 우다야바르만 1세가 뒤를 이었으나 1년만에 갑자기 실종되어[1]크메르 제국은 큰 혼란에 빠진다. 상술했듯 힘만 세다면 즉위할 수 있다는 법칙으로 여러 호족들이 왕위를 노렸고, 그런 경쟁자들 중 자야바르만이란 자와 수리야바르만 1세도 있었다. 참고로 수리야바르만은 내전기에 이미 제국의 왕을 자칭한 상태였다.

이 중 자야바르만은 이 경쟁속에서 승리하여 왕으로 즉위했고 정당성을 가진 정왕(正王)이 되었으나 수리야바르만은 정왕에게 굴하지 않고 무려 9년간 저항하여 마침내 1010년 승리, 힘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그 정왕에 즉위한다. 패한 자야바르만은 전란속에 실종되었다고 한다.

3.2. 즉위 후

내전기에서 패권을 잡아 즉위한 수리야바르만은 상술했듯 자신의 정통성이 부족하다는걸 인지하고 있었기에 현지의 4천명 관료들을 왕궁에 초대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치르게 하였으며 긴 내전으로 황폐해진 제국을 수습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리고 대승 불교에 귀의함과 동시에 기존의 힌두교를 허용하는 등 관용 정책을 펼쳐 반발의 우려도 없앴으며 이를 증명하듯 힌두교 사원인 피미아나카스[2] 신전이 완공되었고 불교 사원인 밧액(Vat Ek)을 건설하였다. 또한 이 시기 두 종교의 화합이 이루어져 불교와 힌두교 신자들이 한데 모여 요가를 했다고 한다.

3.3. 스리위자야 견제와 촐라 왕국과의 동맹

해상 제국인 스리위자야는 크메르제국 바로 아래에 있는 국가이다. 이전에 크메르 왕실 왕자가 볼모로 가는 등 크메르제국과는 무시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동시에 위협이기도 했다. 수리야바르만이 막 내전을 끝냈을 당시 스리위자야 제국은 해상무역의 발달과 거대한 수마트라섬을 통치하던 잠비왕조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복속시킬 정도로 전성기를 구사하고 있었다.

수리야바르만은 이런 스리위자야에 위협을 느껴 남인도를 통치하던 촐라 왕국의 라젠드라 1세에게 호화로운 병거(兵車, 전차)를 선물하여 동맹을 맺었고 당시 남인도를 제패하던 촐라 왕국은 스리위자야에게 간섭하여 크메르 제국에게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하였으며 해상 무역에 소극적으로 만들어 스리위자야가 쇠퇴기에 접어드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1025년 촐라 왕국이 스리위자야의 끄다(Kedah)를 점령하면서 앙코르에 대한 스리위자야의 영향력도 소멸하였다. 당시 스리위자야는 두 개의 도시를 두고 수도를 주기적으로 천도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 외에 독자적으로 동부와 북부를 비롯해 메콩강, 라오스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3.4. 사망

수리야바르만 1세는 1050년 사망하였으며 그는 앙코르 왕조사에서 두 번째로 긴 49년동안 재위했고 생전 불교에 귀의했기에 열반에 들었다는 뜻으로 니르바나파다(Nirvanapada, 열반의 왕)로 추앙되었다. 사후 왕위는 야쇼바르만의 후손인 우다야디티야바르만 2세가 이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정복왕인 그가 사망한 후 크메르 제국은 참파의 발호로 잠시동안 혼란기에 빠졌으나 그와 이름이 똑같은 수리야바르만 2세가 그 혼란을 수습하고 재차 크메르 제국을 전성기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4. 참고 항목


[1] 피살당했다는 설도 전해진다.[2] Phimianakas, 하늘의 궁전이란 뜻이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때 건축되던걸 헐고 다시 재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