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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7-09 14:02:20

손육

孫毓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3. 창작물에서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 자는 휴랑(休朗)[1] 또는 중안(仲案)[2]. 북해군 평창[3] 또는 동관군[4] 사람. 손관의 아들.

2. 생애

손관이 전장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자 후사를 계승했고, 청주자사가 되었다.

벽옹비를 통해 진나라에서 278년에 박사를 지낸 것이 확인되며, 최종 관직은 경전석문에는 장사태수, 의림에는 예주자사, 의림에서 수지를 인용한 것에는 여남태수를 지냈다고 한다.

진나라 초기에 교묘(郊廟)[5]의 예에 대해 왕숙의 학설을 사용하고 정현의 학설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손육은 공조와 함께 왕숙의 학설이 옳다고 여겨 정현의 학설을 반박했다. 이로 인해 두 학파의 시비가 끊이지 않아 양한 시대의 전문성을 다시는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

3. 창작물에서

소설 삼국지 유봉전에서는 촉한이 낙양까지 위협할 정도가 되었고, 전투에는 전방에 나서려는데 장패가 손관이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죽은 것을 떠올리고는 후방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손육은 장군께서는 선친께 형님 같은 분이셨다면서 어찌 제가 모시지 않을 수 있겠냐면서 최소한 순(장순)이가 제 몫을 하기 전까지만이라도 곁을 지키게 해달라고 했다.

장패가 조카라 여기고 있다면서 백부인 손강도 자신을 돕고 있다고 하자 백부님은 홍농에 주둔해야 하니 장군께서 계신 낙양은 사람이 부족하 것은 매한가지 아니냐면서 곁에서 돕게 해달라고 했다.


[1] 경전석문, 벽옹비[2] 의림[3] 경전석문, 의림[4] 벽옹비[5] 주나라 때 천자가 남교와 북교에서 천지에 드리는 제사인 교제, 종묘에서 조상의 묘에 제사를 지낸 묘제를 함께 부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