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손순흥(孫順興) |
생몰 | 1908년 10월 16일 ~ 1956년 7월 25일 |
출생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 |
사망지 | 충청북도 영동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손순흥은 1908년 10월 16일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동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히로시마현에 건너가 노동에 종사한 뒤 귀국하여 1926년 영동군 황간청년회(黃澗靑年會)에 가입하여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공감하여 항일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1929년 4월 26일 영동노동청년회를 영동농민조합(永同農民組合)으로 발전적으로 개편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1930년 3월에 개최된 제2회 정기총회에서 농민조합의 자체발전과 운동을 확대하기로 결의하고 조직을 개편할 때 손순흥은 검사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운동 방침에 따라 그는 영동농민조합의 조직 확대에 힘을 쏟아 1930년 5월 영동농민조합 황간지부(黃澗支部)를 설치했다.이어 1931년 4월 농민조합 정기대회를 개최하면서 6백여 명 조합원의 결속을 강화하는 한편, 표면적으로는 합법적 농민단체로 위장하면서 비밀결사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황간지부원 김순화(金順化)·박개천(朴開天)·박기철(朴基喆)·방영준(方英俊)·김완수(金完洙)·박찬영(朴燦榮) 등 10여 명을 비밀결사의 요원으로 포섭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적우동맹(赤友同盟)을 조직하였는데, 이 때 그는 선전조직부의 일을 맡았다. 적우동맹은 일제 식민지통치를 전면 부정하고 지하 조직을 통한 농민운동의 활성화를 꾀하는 한편 소작쟁의·동맹파업 등을 배후에서 지도했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34년 6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7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동군에 은거했다가 8.15 광복 후 좌익 활동에 가담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가 1950년 보도연맹 학살사건 때 피살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로는 생존했으며, 1956년 7월 25일에 영동군에서 사망했다. 다만 그의 후손이 당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손순흥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