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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9 11:58:57

동현(중국)

소의 동씨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고속 출세2.3. 몰락과 죽음
3. 단수지벽

1. 개요


(기원전 22 ~ 기원전 1)

중국 전한의 정치가.

자는 성경(聖卿)이자 어사 동공(董恭)의 아들로, 양주 오군 운양현 출신이다.

그는 남자였으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전한의 13대 애제의 동성연인이 되어 총애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누나인 소의 동씨(昭儀 董氏) 또한 애제의 후궁이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동현은 기원전 22년에 어사 동공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렸을 때에 궁에 들어가 태자시중드는 태자사인(太子舍人)에 임명되었다. 이후 기원전 7년에 이르러 애제가 즉위하자 태자관위랑(太子官為郎)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동현은 세간의 주목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4년, 동현은 시간을 알리기 위해 전각 아래에 갔다가 우연히 애제의 눈에 띄게 되었다. 애제는 동현의 미려한 외모에 빠져들어 그 자리에서 동현을 불러들이고는 황문랑으로 승진시켰다. 이후 동현은 애제의 동성연인이 되어 큰 총애를 받았다. 덕분에 그의 아버지인 동공 또한 덩달아 출세하여 운중후에 봉해졌고 광록대부로 승진하였다. 그리하여 동현은 애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고속출세를 시작했다.

2.2. 고속 출세

동현은 부마도위시중이 되었으며 애제와 더불어 같은 수레를 타고 잠자리까지 함께 하였다. 동현은 정치가로서는 무능했으나 성품이 부드러우며 남의 기분을 맞추는데 능숙했기 때문에 동현의 총애는 날로 더해져갔다. 동현의 여동생 또한 애제의 부름을 받아 소의에 봉해져서 황후 다음 가는 지위의 후궁이 되었으며, 동현의 아내과 그 친정 또한 애제로부터 많은 재물과 벼슬의 혜택을 입었다.

애제는 자신의 무덤을 만들면서[1] 그 곁에 동현의 무덤까지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동현은 황제의 동성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함께 애제가 황궁 안에 마련해준 거처에서 생활하는 등의 특혜를 받았다.

애제는 급기야 동현을 제후로 삼으려 하였으나, 나이도 어리고 경력이나 능력도 일천한 동현에게 그만한 공로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동평왕 유운의 후궁제사를 지내면서 황제를 저주하였다"는 참소가 들어오자, 애제는 그 제보자가 동현이었다고 조작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동현은 하루아침에 역적을 적발한 공신이 되어 고안후의 작위를 받고 3천 호에 달하는 식읍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삼공에 해당되는 대사마에까지 봉해져 겨우 20살을 조금 넘은 나이로 정국을 좌우할 만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처럼 약관을 갓 넘긴 젊은이가 외모가 미려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몇 년도 되지 않아 삼공에 해당되는 대사마에 봉해지면서, 실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어느날은 흉노의 군주 오주류약제선우한나라에 들어와 조공하자 애제가 그를 위하여 연회를 베풀었다.[2] 당연히 그 자리에는 조정의 대신들이 배열하였는데, 우주류약제선우는 백관 중에서도 최고위직에 해당되는 대사마 동현의 나이가 너무 어린 것을 보고는 괴이하게 여기며 통역관을 통해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그러자 애제는 태연하게도 "대사마의 나이가 비록 어리나 대현의 지위에 있다."라고 답하였다. 오주류약제선우가 이 광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애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동현에게 경의를 표하고는 "한나라가 현명한 신하를 얻은 것을 경축합니다."라 말했다.

애제의 동현에 대한 총애는 그칠 줄을 몰라서 점차 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애제가 신하와 황족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던 중, 술에 취한 나머지 옆에 동현은 앉혀두고는 "내가 요순의 선례를 받들어 동현에게 선양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멘트를 던지는 초대형사고를 쳤다. 그러자 강직한 성격의 대신이었던 왕굉(王宏)은 참다 못한 나머지 "천하는 한고제의 것이지, 폐하의 소유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종묘를 계승한 몸으로서 자손에게 이를 물려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마십시오!"라는 직언을 던지며 일갈했다. 애제는 그 말을 듣고는 침묵하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좌중을 공포에 떨게 하였으나, 이치에 어긋나는 말도 아니었기에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일로 인해 애제는 다시는 왕굉을 주연에 부르지 않았다.

2.3. 몰락과 죽음

기원전 1년, 선양발언 파동이 불어닥친지 몇달이 지난 6월에, 동현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었던 애제가 끝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동현은 대사마의 직위에 있었을 뿐 아니라 애제로부터 막강한 권한을 받았기 때문에, 야심만 있다면 그 기회를 탐타 국정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현은 정치에 무능했기 때문에 그 후사를 어찌 처리할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노련한 정치가이자 황실의 최고원로였던 효원황후 왕씨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원후 왕씨는 애제의 즉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막강한 권력을 누렸으나, 과거의 앙숙이었던 소의 부씨의 손자 애제가 즉위한 후에는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애제가 죽자 원후 왕씨는 다시 권좌를 되찾고 싶었고, 애제의 총신이었던 동현은 제거대상 1순위가 되었다.

원후 왕씨는 애제가 죽은 직후에 곧바로 동현을 불러 장례를 어찌 치를 것인지 물었다. 예상대로 동현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하자, 원후 왕씨는 애제의 미움을 받아 정계에서 추방당했던 자신의 친족 왕망이 예법에 해박하니 그를 불러들여 이 문제를 논할 것을 권하였다. 어리석은 동현은 원후의 속내도 알지 못한 채 제안을 냉큼 받아들이고 말았다.

과연 왕망은 정계로 돌아오자마자 "황제가 병을 앓는 와중에도 몸소 간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현을 탄핵하였다. 자기 손으로 무덤을 판 줄조차 몰랐던 동현은 궁으로 달려와 관을 벗고 맨발로 사죄하였으나, 왕망은 원후 왕씨와 함께 조서를 써서 동현의 대사마 직위를 박탈하였다. 겁에 질린 동현은 그 날로 아내와 함께 자살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23세 정도에 불과했다.

동현의 가족들은 후환이 두려워 장례도 치르지 않고 동현과 그 아내의 시신을 관에 담아 묻어버렸으나, 왕망은 동현이 죽은 것으로 위장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여 그 관을 파헤쳐버렸다. 동현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왕망은 그 가족들을 모두 권좌에서 내쫓아버리고는 그 재산을 몰수했는데, 그 액수가 43억이나 되었다. 파헤쳐진 동현의 시신은 발가벗겨진 채로 옥중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동현의 밑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그에게 후한 은혜를 입었던 주후(朱詡)라는 사람이 관과 수의를 장만하여 이를 장사지냈다. 이를 알게 된 왕망은 분노하여 주후에게 누명을 씌워 죽여버렸다.

이후 애제의 사촌동생인 평제가 즉위했으나, 왕망이 그를 독살하고 제위를 찬탈하면서 전한 왕조는 몰락하고 15년간 신나라가 잠시동안 중원을 통치했다.

3. 단수지벽

애제가 동현을 얼마나 총애하였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하나 전해진다. 애제는 동현과 같은 침상을 쓰기도 하고, 낮잠도 함께 잤는데, 하루는 동현이 애제의 옷소매를 깔고 누워 잠이 들었다. 먼저 잠을 깬 애제는 곤히 자는 동현을 차마 깨울 수 없어 자신의 옷소매를 칼로 잘라버렸다.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바로 단수지벽(斷袖之癖)인데, 줄여서 단수(斷袖)라고도 한다. 이는 말 그대로 "소매를 자른다"는 뜻으로, "용양(龍陽)"의 경우처럼 남색행각을 의미한다.


[1] 중국 고대의 군주들의 무덤은 대부분이 그 생시에 미리 만들어졌다. 가장 유명한 진시황릉 또한 진시황 생전부터 이미 만들어지던 것이다.[2] 당시 흉노는 분열기를 거치면서 세력이 쇠약해져 예전의 강성함을 잃고, 한나라에 조공을 하던 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