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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7:07:40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


1. 개요2. 전개3. 의의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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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Sherman's March to the Sea)은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의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이 남부의 중심지인 조지아 주를 초토화시킨 전역이다. 서배너 전역(Savannah Campaign)이라고도 한다.

전역(campaign) 단위로 구분할 때는 바다로의 행진은 말 그대로 항구도시 서배너에 도착할 때까지로 보며,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노스캐롤라이나로 진군한 것은 캐롤라이나 전역(Carolinas Campaign)으로 따로 구분한다. 대규모 초토화 작전으로 남부의 저항 의지를 상실시킨 것은 같다.

2. 전개


1864년, 애틀란타를 점령한 셔먼과 북군 총사령관이던 율리시스 S. 그랜트남북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남부를 철저하게 파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당시 그랜트가 직접 통제하는 포토맥 군(Army of the Potomac)이 로버트 E. 리가 이끄는 남군 북 버지니아 군(Army of Northern Virginia)을 상대로 피터스버그에서 대치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북군 입장에서는 전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 셔먼은 조지아의 모든 산업적 기반을 파괴하기 위해 휘하 병력들에게 일부러 20일치 식량만 준비시키고, 나머지 필요한 식량 및 물건들은 모두 현지에서 조달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약탈하지 못할 정도로 크고 무거운 물건들은 모두 불태우도록 했다.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그때까지 철도에만 보급을 너무 의존해서 북부 육군이 제대로 진격할 찬스를 놓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남부의 전쟁 수행능력 말살에 주 목적이 있었다.[1] 이러한 약탈은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부담이 되었지만, 애틀란타의 점령으로 인해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재선되면서 부담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북군이 애틀란타를 점령하기 전에 남군의 후드 장군이 가저갈 수 없는 물자를 소각처분하다가 애틀란타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후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클라이맥스 장면에 이 모습이 재현된다.
{{{#!folding 셔먼의 명령서 일부 [ 펼치기 · 접기 ]
4. 아군은 행진하는 도중에 자유롭게 식량을 징발한다. 이를 위해서 각 여단 지휘관은 사려 깊은 지휘관들의 통제 하에 징발부대를 효율적으로 조직해서 행군로 근처에 있는 옥수수나 건초, 모든 종류의 고기와 야채를 비롯해서 10일간의 부대보급에 필요한 물자는 무엇이라도 징발하도록 한다. 병사는 절대로 민간인 주거지나 진입로를 침범해서는 안되지만, 정지해있거나 숙영하는 중에는 감자나 기타 야채 등을 반입할 수 있다. 징발대는 행군로에서의 거리를 불문하고 필요한 물자를 징발해오도록 지도를 받도록 한다.
5. 각 군단 지휘관은 풍차·가옥·목화밭 등등의 생산 시설 및 그와 관련된 건물을 파괴하는 데 주력한다. 주거 지역과 기타 생활 필수시설에 대한 가해행위는 금지한다. 단, 게릴라나 행진을 방해하는 집단 또는 교량을 파괴하거나 도로 시설을 훼손한다던지 기타 등등의 적대행위를 취하는 자에게는 이러한 제한사항에 해당이 없고, 이러한 파괴행위에는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6. 말·당나귀·마차를 비롯한 거주 관련 용품과 기병과 포병은 제한 없이 활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적대적인 부유층과 일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우호적인 빈민층과 노동자에게는 구분해서 대우해야 한다. 당나귀나 말은 징발부대는 짐차를 끄느라 지쳐있는 짐승과 교체하거나 여단 내지 대대급에서 운용하는 짐운반용 노새로 활용토록 한다. 징발부대 일체는 위협적이거나 모욕적인 언어 사용을 지양하고 장교들은 심사숙고해서 사실 확인서를 작성해주되 영수증은 작성해주지 않는다. 또, 각 가족에게 필수불가결한 분량을 이성적으로 고려해서 징발하거나 또는 제공하도록 한다.
7. 건강하거나 복무할 수 있는 흑인은 각 제대에 소속되어 복무할 수 있으나 지휘관들은 보급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1864년 11월 9일 미시시피 군사부 특별 야전 명령 120호. 윌리엄 T. 셔먼.}}}
셔먼의 미시시피 군사부(Military Division of the Mississippi)는 후방에 존 벨 후드 장군이 이끄는 남군 테네시 군(Army of Tennessee)을 두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에 셔먼은 컴벌랜드 군(Army of the Cumberland)을 이끄는 조지 H. 토머스 장군에게 존 M. 스코필드 장군의 오하이오 군(Army of the Ohio)까지 맡겨 후방에 남긴 뒤에 테네시 군(Army of the Tennessee)과 조지아 군(Army of Georgia)을 이끌고 11월 15일에 진군을 시작했다. 동원된 병력은 약 6만 2천여 명이었다.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장군의 테네시 군이 우익을, 헨리 슬로컴 장군의 조지아 군이 좌익을 맡아 움직이기 시작했고, 휴 킬패트릭 장군의 서부 기병군단 제3사단이 양익의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좌익의 조지아 군은 다시 둘로 나뉘어 메디슨과 오거스타 방향으로 움직였고, 우익의 테네시 군은 메이컨으로 진로를 잡았다. 셔먼 본인은 개인 호위부대로 북부를 지지하는 남부인들로 구성된 제1 앨라배마 기병연대(1st Alabama Cavalry)를 대동하고 슬로컴과 함께 이동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조지아를 방비하는 남군을 기만하는 데 성공했고, 조지아 주 의회는 '노예로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자'면서 지지를 호소했지만 셔먼이 접근하자 곧장 주도인 밀리지빌에서 도망쳤다. 조지아를 방어하는 윌리엄 하디 장군의 남군 역시 북군의 목표가 서배너인 것을 늦게 파악해 겨우 방어군을 그리스월드빌에 배치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월드빌에는 북군이 입성해 방어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고, 이를 눈치채지 못한 남군은 북군의 방어 진지에 돌격했다 참패하고 밀리지빌을 내주게 된다.

조지아의 연방 복귀를 선언한 셔먼은 밀리지빌에서 다시 진군하기 시작했고, 남군의 기병대가 북군을 막으려고 시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남군의 잔존 병력은 서배너에 집결했고, 이에 셔먼은 서배너를 포위하기 위해 찰스턴-서배너 간의 철도를 차단하려 했지만 남군의 반격을 받아 실패했다.

당시 서배너의 방어는 탄탄했고 식량 역시 풍족했던 상황이었기에, 셔먼은 해군의 보급을 받으려고 인근의 남군 해안방어 요새를 습격해 점령했다. 요새를 점령한 뒤 북군 해군에게서 식량과 공성포를 보급받은 셔먼은 서배너의 남군에게 서신을 띄워 항복을 요청했고, 하디는 항복을 거부한 뒤 서배너에서 철군했다. 그러자 이튿날인 12월 21일에 서배너 시장은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셔먼의 북군은 서배너에 입성했다.

셔먼은 링컨에게 '대통령 각하께 서배너와 150문의 대포 및 수많은 탄약과 목화 2만 5천 베일을[2]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립니다.' 라는 전문으로 서배너의 함락을 알렸고, 링컨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에 답신을 보냈다.
{{{#!folding 링컨의 답신 [ 펼치기 · 접기 ]
크리스마스 선물로 서배너를 점령해 주신데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애틀랜타를 떠나 대서양 연안으로 향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려움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는 말대로 저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성공과 그에 따르는 명예는 장군의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을 의심치 않으리라 믿습니다. 이로써 군사적인 이득을 얻었을 뿐 아니라 세계에 장군의 병력이 둘로 나뉘더라도 각기 적군 전체를 상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남군의 후드는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두려워하는 처지입니다. 다음 목표는 어디인가요? 그랜트 장군과 셔먼 장군이 결정하도록 한다면 더더욱 좋은 결과를 거두리라고 기대합니다. 장군 휘하의 병력과 장교들에게 저의 감사를 전해주십시오.}}}
이듬해 봄이 오자, 셔먼은 서배너를 떠나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가로질러 그랜트와 합류를 시도했고, 조셉 E. 존스턴 장군이 지휘하는 남군 테네시 군이 이를 막으려 시도했지만 이미 남군 테네시 군의 주력은 후드가 프랭클린-내슈빌 전역[3]에서 상실한 뒤여서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한 채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항복하게 된다.

3. 의의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은 셔먼의 전략가적 능력을 보여주는 전역으로, 애틀랜타 공략에 성공해 애틀랜타를 파괴하긴 했지만, 채터누가에서부터 애틀랜타까지는 보급로가 철길 하나 뿐이라 이 곳이 막히면 보급이 막힌 상태에서 자칫 남군에 포위되어 고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겼지만 다음 행보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후드 장군이 이걸 노리고 북군의 후방 보급로로 병력을 이동해 애틀랜타를 빠져나갈 셔먼을 상대하려는 상식적인 대응을 생각한 시점에서, 셔먼은 당시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정면돌파를 통해 바다까지 나가서 서배너 항구에서 해군을 통해 보급을 받겠다라는 파격적인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즉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의 원래 목적은 자신을 노린 후드의 남군이 취한 전술적 행동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안전하게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전진한다는 선제적인 의도였다.

여기에 셔먼은 한가지 목표를 추가했다. 셔먼은 이 행진을 통해 현대전을 정의하는 총력전에서 상대방의 전투수행역량과 의지를 뭉개버리는 초토화 전술을 구사해냈다. 이는 후대 전략폭격의 이론적 기반인 산업그물이론을 실천한 사례로 애틀란타에서 출발해 서배너에 이르기까지 셔먼의 북군은 민간인을 제외하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파괴해 남부에 충격을 선사했다. 이에 남군이 기병대를 통해 후방에서 북군의 물자를 약탈하자 북군은 더 신나게 약탈했다.

특히 식량은 셔먼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이었는데, 그야말로 작정을 하고 계획을 짰다. 셔먼은 1860년 인구조사 기록을 토대로 조지아에서 식량 생산이 가장 많은 지역들을 일부러 골라 지나갔고, 가을 추수가 시작될 무렵에 타이밍까지 치밀하게 맞춰서 진군을 시작했다. 어찌나 약탈을 체계적으로 잘했는지 북군 장병들이 숙영지에서 채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리고 간 고기들이 썩어가는 모습도 있었다.

조지아를 가로지르면서 지나간 곳을 인간계의 헬게이트로 만드는 동안 셔먼의 북군이 남긴 것은 철도선로뿐이었는데 이마저도 확실하게 못 쓰게 하려고 녹여서 나무에다가 둘러놓았다. 이 만행에 경악한 남부인들은 이렇게 망가진 철도들을 셔먼의 넥타이(Sherman's neckties)라고 불렀다. 사실, 이런 만행은 심리전도 있지만 이미 단일한 보급로 및 퇴로를 차단하려고 북상한 후드의 남군이 바다로의 행진을 선택한 셔먼을 추격하는 속도를 늦추기 위함도 있었다. 의도적으로 셔먼이 보급로를 끊었다고 할 수 있는 것.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44px-Destroying_CW_railroads.jpg
파일:/data24/2006/12/27/153/_march.jpg
파일:external/businessgrl16.files.wordpress.com/shermannecktie.gif
파일:external/www.thegranitesentinel.com/sherman_neckties.jpg
셔먼의 넥타이를 묘사한 사진과 그림들. "셔먼의 나비넥타이"(Sherman's bowties), "제프 데이비스의 넥타이"(Jeff Davis's neckties), "셔먼의 헤어핀"(Sherman's hairpins)라는 또 다른 명칭도 있다.

셔먼의 북군이 어찌나 심하게 남부를 파괴했는지 그 당시 남부가 입은 손실을 집계하니 1억 달러가 나왔다. 이를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100억 달러(10조 원 이상)에 달한다. 심지어 이 당시 입은 농업 손실은 거의 60년이 지난 뒤인 1920년대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 과정에 셔먼의 북군이 입은 피해는 100여 명의 전사자와 600여 명의 부상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군에 대해서도 최대한 달아나게 하거나 항복을 유도하는데 주력해서 많은 인명을 해치지는 않았다. 셔먼의 목적은 말 그대로 남부의 물자와 시설을 완전히 파괴하고 잿더미에 모든 것을 잃고 망연자실한 사람들'만' 남겨놓는 것이었다. 이는 남군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남부의 기반시설들이 초토화되고 자신의 가족들이 셔먼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에 두려워한 장병들이 대거 탈영해서 1865년 초반에 무려 10만 명이나 탈영했을 정도였다.

결국 셔먼의 초토화 전술에 시달린 남부의 망연자실한 시민들은 셔먼의 계획대로 전쟁을 지속할 능력과 의지를 상실했고, 이는 남부의 수도였던 버지니아리치먼드 근교에서 대립하던 리와 그랜트의 싸움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당장 앞서 서술했듯이 장병들이 고향을 지키기 위해 대거 탈영하기 시작했고[4], 그랜트의 북군과 대치하던 리의 남군은 커녕 수도인 리치먼드조차 식량과 무기가 다 떨어져서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다. 역사적인 명전투들이 벌어지던 동부 전역이었지만,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것은 의외로 서부 전역이었다.[5]

동부 전역에서는 북군 총사령관인 그랜트가 포토맥 군사령관인 조지 미드를 직접 통제하면서, 일견 무모해보일 정도로 리의 북 버지니아 군에게 계속 싸움을 걸었고 이 과정에서 종종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그랜트는 북군 최고의 강점인 무한한 보급 역량을 잘 살리고, 남군의 장점인 우수한 장교단을 봉쇄하고 약점인 빈약한 보급을 효과적으로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북 버지니아 군이 포토맥 군에 붙들려서 소모되어가는 동안, 서부 전역에서 셔먼이 남부 중심부를 휩쓸어버렸다. 이 일을 가리켜 링컨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랜트가 리라는 곰에게 손을 물려 있는 동안, 셔먼은 그 곰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 버렸군.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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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이러한 약탈의 최초는 셔먼이 아니라 필립 셰리든이 했다. 그래서 셰리든도 셔먼만큼 남부에서 증오를 많이 받았다. 적국의 국력을 망가트리기 위해 점령지를 파괴·약탈하는 행위는 고대부터 자주 있었고, 특히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는 쿨타임 돌 때마다 프랑스의 국력을 깎기 위해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했다.[2] 목화 원면 포장 및 운송단위. 미국 면화 업계 기준 1베일 = 500파운드 = 약 221kg.[3] 애틀란타 전역에서 패한 후드의 테네시 군은 셔먼이 서배너로 향하는 것을 알고 오히려 북부의 배후를 찌르기 위해 북상했다가, 셔먼이 남겨놓은 토머스의 컴벌랜드 군과 오하이오 군에 의해 프랭클린 전투와 내슈빌 전투에서 완전히 박살난다.[4] 이 점에서 남군은 민병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행태는 전형적인 민병대식 행태이기 때문이다. 정규군은 자신의 고향이 박살나더라도 후방에 국가라는 굳건한 존재가 있으므로 증원군이나 구원군을 파병하여 고향을 수복할 것을 기대할 수 있어 이를 악물고 전략적인 목표에 집중하지만, 민병대는 영웅주의적 생각에 빠져 자신만이 고향을 지킬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 전쟁의 전략적 목표보다는 자신의 고향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군에서 정신교육이라는 것을 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이 점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파르티잔의 성공과 체트니크의 실패를 가른 원인이 되기도 했다.[5] 그렇다고 동부 전역의 전투가 헛짓이었던 것은 아니다. 동부 전역에서 그랜트가 직접 통제하는 포토맥 군이 리의 북 버지니아 군을 붙잡아주었기에 셔먼이 서부 전역을 휩쓸고 다닐 수 있었다.[6]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남부 출신 미군 중에서는 신형 전차에 M4 셔먼이란 이름이 붙자 탑승을 거부하는 전차 승무원 나올 정도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다만 이 일화는 거짓말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M4라는 형식번호로만 불렀고 셔먼이나 스튜어트라는 명칭은 영국에서 쓰던 것이었다. 그 어디에도 남부 출신 미군들이 이 전차에 타기를 거부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 이 일화는 벨튼 쿠퍼의 책 『데스 트랩』에서 인용된 오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