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0C420><colcolor=#ffffff> 석성 石星 | |
이름 | 석성(石星) |
자 | 공진(拱辰) |
호 | 동천(東泉) |
출생 | 1537년 |
대명 북직예성 대명부 동명현 | |
사망 | 1599년 (향년 62세) |
대명 북경 순천부 | |
국적 | 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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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인물. 자는 공신(拱宸). 호는 동천(東泉). 임진왜란 당시 군권을 쥔 병부상서였으며, 위기에 빠진 조선에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파병 반대파와 만력제를 설득시킨 인물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임진왜란의 최대 공로자는 석성이며 이순신은 그 다음이라고까지 평가할 정도였다.2. 생애
1559년에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이과급사중으로 발탁되었으며, 1567년에 융경제에게 주색만 즐긴다면서 대신들이 제멋대로 군다고 상소했지만 융경제가 분노해 60대를 맞고 평민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부인 정씨는 석성이 사경을 헤멘 것으로 인해 기둥에 부딪혀 죽었으며, 1573년에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사면되고 등용되었다.이후 급사중, 대리사승, 남태부경 등을 역임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장거정과 사이가 나빠 그의 죄를 폭로하고 사직했으며, 장거정이 죽고 몇년이 지난 1587년(만력 15년)에 명 조정의 부름을 받아 공부 상서가 되었고, 태자소보가 추가되었다. 1591년(만력 19년)에 호부 상서, 병부 상서 등을 역임했으며, 1592년에 일본이 조선을 공격하면서 조선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석성은 조선을 구원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과 일본이 서로 짜고 쇼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최세신, 임세록 등을 통해 사실 여부를 확인한 이후에 조선에 원군을 보내게 된다. 이때 석성은 심유경이 일본의 정세를 잘 안다고 여겨 유격 장군의 칭호를 주어 보내면서 일본과의 평화협상을 진행시켰다.
심유경의 거짓말에 속아 일본과 화의한 것으로 여겼지만 1597년 2월에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공하면서 만력제가 분노했으며, 석성은 전쟁에서 많은 희생과 군비를 축내고 일본과의 협상에서 대국의 체면을 깎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가 1599년에 옥사했다.
결국은 사람 하나 잘못 본 탓에 생각도 못하게 조선과 명 양국에 크나큰 민폐를 끼치고 자기 자신까지 불행해진 인물... 화의라는 게 전투보다 더 어려운 일인데 이를 너무 쉽게 여겨 심유경의 농간에 너무 쉽게 넘어갔다는데 책임을 피해 갈 수가 없다.
석성이 조선에 원군을 파견할 것을 주장한 이유는 석성의 후처가 조선의 역관인 홍순언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일화가 있다.
홍순언이 젊은 시절에 통주를 지나다가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는 아버지가 경사의 관리였지만 부모님을 병으로 모두 잃어 가난한 신세가 되자 유곽에 팔려왔다. 홍순언이 300냥을 주어 그 여자에게 부모의 장례를 치르게 했는데, 그 여자는 석성의 후처가 되었다. 홍순언이 이후 종계 변무를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자 석성의 후처가 홍순언을 알아보고 이 때의 일을 석성에게 이야기했는데, 석성이 이를 듣고 종계 변무의 문제를 해결해주게 했다고 한다.[1]
그러나 잡기에 해당하는 국당배어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에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애초에 이 문서에서는 대놓고 나오니 알 수 있지만, 종계변무가 진행되던 시기에 석성은 장거정 때문에 낙향한 상태였다. 저 일화가 사실인지도 알 수 없으나, 설혹 사실이라고 하더론도 도대체 낙향한 인물이 종계변무에 얼마나 어떻게 관여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 아니라해서, 석성이 임진왜란 파병에 아무런 공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임진왜란 초기 명나라에선 일본과 조선이 짜고 친다며 조정의 의견이 분분했는데, 당시 병부상서 자리에 있던 석성만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겠다며 전심전력 조선을 돕고자 함을 보여줬다. 이것 뿐만 아니라 원군 파병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정조는 심지어 "우리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주고 칭송한다 하더라도 구원병 백 명에 대한 보답도 되지 않을 것이다." 라 말한 바가 있다.
그리고 석성이 감옥에 간 후 그의 장남 석담은 조선에 망명했다. 조선에 대한 석성의 도움이 지대했던 만큼, 석담을 수양군에 봉하고 편히 살게 했다. 현재 해주 석씨가 바로 석성의 후손으로 이후 조선에서 꽤 괜찮은 가문이 되었다. 조국에게는 어쨌건 그의 행동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확실히 도움이 됐다. 차남 석천도 1597년에 성주로 내려와서 성주 석씨의 원류가 되었다.[2]
3. 창작물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이 설을 차용해 조선에 호의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대체역사 소설인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조선 국왕이자 미래에서 온 주인공에게 인삼과 은으로 뇌물을 받아먹고 여진족을 정벌한 조선이 이미 모단강 유역까지 자기 영토로 인정받은 만큼 아예 송화강까지 넘겨주자고 제의하고, 여진족 상대가 귀찮았던 명 조정내에서 큰 지지를 얻어서 결국 조선이 먼저 요청한다면 송화강 유역을 조선 영토로 하사하겠다는 결정을 하게끔 유도한다. 하지만 만력제가 억지로 몽골 원정령을 내렸다가 참패하자 그 책임을 모조리 그에게 덤터기 씌워 처형해버렸다고 한다. 본인의 일가도 죄다 감옥이나 유배지에서 죽어 차남 1명만 겨우 살아남았다고..이것이
소설의 내용이다.
징비록에서는 이원발이 연기했다.
[1] 홍순언은 종계변무의 공으로 책봉된 공신인 광국공신 2등에 봉해졌다. 이 사실도 이런 야사가 나오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2] 비슷하게 조선으로 원군을 끌고 왔던 진린의 손자 진영소가 아버지인 진구경이 청나라에 항거하다 전사하자,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조선으로 망명해 원래 고향인 광둥에서 본관을 따와 광동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