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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22:50:12

석나리보개



石那里甫介
? - 1374년

1. 개요

원나라의 목호. 1834년 세워진 고려 정씨(생몰년도 미상) 열녀비에서는 '석곡리보개(石谷里甫介)', 조선왕조실록에는 석아보리개(石阿甫里介)로 적혀있다.

2. 생애

【열녀】 고려 정씨(鄭氏)는 직원(職員) 석나리보개(石那里甫介)의 아내이다. 합적(哈赤)의 난에 그의 남편이 죽었는데, 정씨는 젊고 아들이 없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안무사 군관이 강제로 장가들려 하니, 정씨가 죽기로 맹서하여 칼을 끌어 스스로 목찌르려 하므로 마침내 장가들지 못하였으며, 늙도록 시집가지 않았다. 일이 알려져 정려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제주목 정의현 조
정씨(鄭氏)는 나이 20에 남편이 죽었으나 절개를 지켰습니다. 족친(族親)이 그 뜻을 빼앗고자 하니, 정씨는 원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남편이 비록 죽었다 하지만 어찌 차마 그를 버리겠어요? 만약에 다시 와서 나에게 강요한다면 반드시 몸을 바다에 던져 죽고 말 것이라.’하고, 드디어 도망하니, 일가 친척이 그를 의롭게 여겼습니다. 정씨는 부도(婦道)를 온전히 하여 나이 70이 되었는데, 이 풍문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흥기(興起)합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3년 6월 11일 무오일 기사 중
정의(旌義) 사람 직원(職員) 석아보리개(石阿甫里介)의 아내 무명(無命)은 나이 20에 시집갔다가 9년 만에 남편이 죽고 자식도 없었으며, 부모와 노예도 없었으나, 곤궁과 기아(飢餓)를 달게 여겼고, 청혼하는 자들도 많았으나 끝내 절조를 고치지 않았다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0년 10월 28일 기사 중

석나리보개는 1365년 20세의 정씨(석나리보개 처 정씨)와 혼인했는데, 9년 후인 1374년 목호의 난 때 사망했다. 그의 아내인 정씨(鄭氏)는 자식이 없고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안무사 군관이 정씨와 강제로 장가들려고 하자, 정씨는 죽기로 맹세하면서 칼을 끌어 스스로 목찌르려 하므로 마침내 장가들지 못하게 하였고, 늙어서 사망할 때까지 혼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정씨의 일화가 알려지면서 1428년(세종 10년) 열녀로 추서하고 비석을 세웠으나, 어느 시점에서 없어졌다가 1834년에 다시 세워져 제주특별자치도 향토유산 제29호에 등록되어 있다.#

3. 매체에서의 등장

2019년 발간된 정용연 작가의 역사만화 목호의 난, 1374 제주에서 등장한다. 해당 만화에선 백호장의 직위를 가진 몽골인 후예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