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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7 15:59:02

서천등기소 학살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상세3. 이후

1. 개요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하던 북한군충청남도 서천군에서 시행한 학살극.

2. 상세

파일:서천 등기소1.png
▲ 서천 등기소 창고 정면[1]

파일:서천 등기소2.png
▲ 서천 등기소 창고 측면과 정면[2]

1950년 9월 27일 새벽 충남 서천군 서천등기소[3] 창고에서 북한군과 좌익에 의해 우익이고 지배계급으로 지목되는 기독교인, 반공주의자, 경찰 등 240~250명 가량이 학살되었다. 이 사건은 희생자들이 좁은 등기소 건물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불을 질러 불에 타죽었다는 점에서 북한군과 좌익의 잔혹한 죄상과 만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 사건을 직접 실행한 인물은 모두 11명으로 이 중 7명이 정치보위부 소속이고, 나머지는 남로당위원장, 내무서 부서장, 세포위원 등이었다. 가해자 중 한 명으로 서천경찰서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이명식의 판결문과 미 전쟁범죄 조사단 보고서(KWC#32)에 의하면, 이 학살사건을 모의한 사람은 남로당위원장 구재극, 정치보위부장 이병제, 내무서장 장한성, 검찰소장(성명불상), 인민위원장 이구몽 등 5인이고, 학살의 집행은 정치보위부에서 맡았다.[4]

다음은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책임이 김일성에게 있다는 근거이다. 위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김일성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요언(妖言)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1950년 6월 26일, 방송을 통한 김일성의 지시하달, 출처: "남북한 관계 사료집 22권"

3. 이후

국군이 다시 수복한 후 인민군에 부역하고 학살에 동참했다고 판단한 사람들 100여명을 집딘학살했다. 이와중에 억울한 죽음도 있었고 2012년, 62년만에 무죄를 받은 사례도 있었다. #
[1]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보고서 KWC 32 Exhibit E, No. 10[2]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보고서 KWC 32 Exhibit E, No. 12[3] 현재의 서천중학교 위치에 있었다.[4] 진실화해위원회,「좌익에 의한 서천등기소 창고 집단희생사건」,『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01, 2008, 246~248쪽; 이나미, 위의 책, 110~1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