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8ad85><colcolor=#000000> 서선 徐選 | Seo Seon | |
출생 | 1367년 |
사망 | 1433년 (향년 66세) |
본관 | 이천(利川) |
부모 | 아버지 서원(徐遠), 어머니 정윤 최홍의(崔洪義)의 딸 |
자녀 | 아들 서달(徐達) |
자 | 대숙(大叔)·언부(彦夫) |
호 | 해화당(海華堂)·신당(莘堂) |
시호 | 공도(恭度) |
종교 | 유교 (성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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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유학자, 관료.조선의 관료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했던 조선 초창기의 재원이다.
태조 집권후 이듬해에 사마시에 합격해 몇년후 문과에도 급제하여 이듬해 임관 했다. 그 이듬해인 1398년에 무인정사[1]가 발발했으니 관료 생활에 적응하기 전부터 파란만장하게 시작한 편이라 할 수 있다. 급제자이긴 했지만, 이당시는 아직 말단 관료 위치기도 했고, 춘추관기사관 자체가 실록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관리직인 만큼 별 영향은 없었을 것으로 보이긴 하다만.
이후에도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 할 즘 해서 문하주서[2]가 되어 딱히 정치와는 크게 관련 없는 직을 역임했다. 그러면서 능력이 뛰어났는지 이듬해 부터 바로 여러직을 역임하면서 정치에 참여 했다. 하지만 태종 3년에 사헌부장령으로 있다가 계사(啓事)[3]를 잘못하여 유배당한다. 아무래도 태종이 집권한지 아직 초창기라 불안정한 모습도 있고, 여러 행동등을 책잡다가 미움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능력은 괜찮았는지 3년뒤에 바로 복직한다. 하지만 1412년 우사간 역임중 또 말 실수를 하여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事)로 좌천 된다.[4] 임금과 관리들의 언행을 기록하는 사관직에 있었던 만큼, 아직 사관이 일거수일투족으로 기록하는게 익숙하지 않았던 태종이 따로 기록하지 말라고 한걸 극렬하게 거부한거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3년뒤에 다시 승진하며 복귀한걸 봐서는 능력 자체는 확실히 인정 받은 듯. 우부대언으로 임관 직후 동료들과 서얼의 차별 대우를 진언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
하지만 뭐가 또 잘못되었는지 중앙에서 정말 먼 곳의 지방관으로 임관[5]한다.
세종이 즉위하며, 고부 겸 청시부사(告訃兼請諡副使)[6] 자격으로 명나라의 사신으로 떠나고 귀국후 바로 한성부윤으로 임명된다.
세종 시기 직후에는 아예 관찰사[7] 자격으로 지방 관리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후 중앙행정직으로 재진출하여 사망때 까지 별일이 없었고, 사후 그간의 공을 인정 받아 정1품 우의정에 추증 된다.
태종때는 아직 한창 혈기 넘칠 때였었고, 그덕에 태종과 부딛치는 경우가 잦았던 걸로 보인다. 그 당대에는 고집있고, 맡은 일에 부지런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쪽같은 성격이라 말을 감추지 못한건지 종종 말실수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 아무리 외척을 단호하게 처형하고 조선시대 왕중 왕권이 가장 강했던 태종이라지만, 유능한 관리를 유배보내거나 좌천하는건 쉬운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서에 남은 기록만 최소3번이니 실제로는 더 많이 부딛쳤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세종 시기로 넘어 오면서 부터는 무려 22년차 관리 였기에, 노신까진 아니었지만[8] 세종도 함부로 다루긴 어려웠을 시기였을 것이다. 또한 이런 것과 함께 능력이 뛰어난 신하는 아껴주고 말 그대로 죽을때까지 부리는 걸 선호했던 세종이기에 태종 집권기에 비해선 더 무난하게 관리 생활을 한것으로 보인다.
공과가 뚜렸한 인물이지만, 워낙 자료가 적어 현대에는 적서제도의 시발점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2. 적서제도의 기안자
조선의 적서제도는 의심이 많았던 태종이 외척이나 친인적들 등 특정 인물들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서, 이를 살펴 1415년 당시 우부대언이었던 서선이 종친(宗親) 및 각품의 서얼 자손은 현관(顯官)의 직사를 맡기지 말자고 건의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시기가 참 공교로운데, 3년 뒤에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 된다. 즉, 이미 이전부터 세자로서 그 위치가 불안했던 양년대군에 의해 시작된거라 보는 견해도 있다는 거다. 태종 입장에선 세자 스스로가 만든 불안정한 입지와 이에 비견되어 양녕대군의 입지를 더 불안하게 하는 충녕대군이 있었다. 때문에 왕명의 출납을 관리하던 우부대언과 태종과의 사담중에 이에 빗대어 여러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고, 이를 듣다 못해 동료들과 내용을 정리하여 주청을 올린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적서에 대한 대우의 차등을 둔다는 발상은 그냥 나오기가 힘든 주제다. 일단 이런 발상을 하는 사람이 적서 문제 때문에 피해를 본 경험이 있거나 최소한 그걸로 누가 피해를 보는건 간접 경험해봤어야 하며, 또 그 문제에 공감까지 해야 한다. 또한 본인 스스로가 이에 대한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어야 스스로의 발상에 대해 꺼림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해당 사항을 문제시 할수 있을 환경적인 요인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이런 최소한의 조건 조차 없다면 자발적으로 꺼내기 무거운 주제기도 하거니와, 당시에 유학자 집안 기준으로 보자면, 호적에서 파일 각오도 해야 할 정도로 심각성이 큰 사안이었다.
보편적으로 사족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발상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이슈도 있었기에 부담되는 주게기도 했다. 이게 지금 시대에 시선으로 바라봐서 사족들에게도 큰 도움되는 거 아닌가 싶을지 모르겠으나, 막상 사족 입장에서도 마냥 도움되는 제도도 아니었다. 특히 명가의 집권자 입장에선 더더욱 그렇다. 자기 직계 후손중에 누가 더 괜찮은 인물이 나올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애초에 적서제도가 정착되기 이전엔 통상적으로 권력의 분산을 막기위해 장자계승 원칙 정도까지는 기본으로 깔고 보지만, 만일 장자가 사망하거나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다면 그 아래 형제중에 가장 인물이 나은 사람에게 권력이 이앙되는 구조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더 나이많은 쪽이 유리한 점은 있었지만, 적어도 조선식 서얼 차별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쨋든 당장의 집권자입장에서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이중 장남이 아니면 가장 나은 인물이 후계자가 되길 바랄테니까. 어차피 자기 피를 이었는데, 적장자가 아니라면 굳이 서얼 구분이 의미가 없다는 의미다.[9]
그래서 어느 집단이던 계승권을 혈족에게 넘기는게 가능한 집권자 입장에서는 좋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도 였다.
물론 이런건 아돌프 히틀러와 같이 그릇된 신념[10]을 가졌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의 한반도는 현재의 대한민국 처럼 민족주의가 발달한 곳이 아니었다.[11] 때문에 관련 개념에서 출발하는 순혈주의 자체는 지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편견[12]과는 달리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내 재산은 내 자식에게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정도 선이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집권자 입장에서는 뭐가 어떻게 되었든 내 후손이 물려 받는게 중요하지만, 피의 절반이 누구 것이든 크게 상관 하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오히려 이런걸 따지는 건 상위 계급층으로 올라갈수록 덜 했고, 아래로 갈수록 더 심해졌다. 특히 아예 왕권에 관련된다면 사실상 모친이 노비나 노예 출신이라고 해도 어쨌든 그 자식은 왕족으로 대우 받았다. 또한 적당히 조건만 맞으면, 굳이 반정같은게 없어도 왕권을 물려 받는 경우가 왕왕있었을 정도다. 조선 후기쯤 되면 적서제도고 뭐고 간에 여차하면 양자로라도 입적시켜서 왕권을 줄 정도였다.[13] 물론 사람인 이상 뒤에서 구설수에 오르는 정도는 있었겠지만, 일단 개념이 그러했다는 거다. 쉽게 말해 절대불가 라는 개념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방법은 있었다는 뜻. 의외로 꼭 왕권문제가 아니더라도 양자로 입적해서 서얼차별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알려진 경우도 많을 정도지만, 굳이 들어나지 않은 경우 까지[14] 따져 본다면 정말 많을 것이다.[15] 그럼에도 이게 재정된 이후 부터 조선이 망국이 될때까지 서얼 차별이 심각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태종의 여러 공과중에도 손에 꼽을 정도로 뼈아픈 과오라 평가 할 수 있겠다.
중국에 경우 딱 이정도에서 고착되었고, 이런 제도들에 영향을 받아 왔던 고려와 조선 극초기만 하더라도 왕실과 민가 할거 없이 딱 이정도 선에서 고착화 되었었다. 고려조 때 까지만 봐도 서얼 구분 없이 왕실 종친이기만 해도 중앙정치에 참여 하는 경우가 빈번했었다.
하지만 조선은 시작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개국 이후 태조의 후계로 정도전이 밀던 인사는 후처 자식, 그것도 후처의 장남도 아닌 차남이었다. 이런것은 과거의 법도로 보나 유학을 기반한 문화적으로 보나 여러모로 파격적 이었다. 하다못해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자면, 실제 이렇게까지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의 숙청이 있는게 보통이었다.[16] 당연히 당시의 정실 소생이었던 형제들은 입지에 불안함 뿐만 아니라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같이 느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언제 죽어도 이상할게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석이 세자가 된 이후 부터는 언제든 반란의 위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만 가지고 아무리 태조에게 신임 받던 정도전이라고 해도 그 자식들을 죄다 죽여서 당시 세자였던 이방석의 위치를 공고히 하자는 말을 할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이유로 피의 숙청을 대신 하여, 왕명으로 이와 유사한 효과가 나는 수단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결국 기존의 종법과는 다르게 왕실의 종법을 싹 무시하고, 세자를 제외한 왕의 자제들은 출사를 못하게 명령을 내린 것이다. 사실상 적서제도는 여기서 기원한거라고 봐야 한다. 물론 이때까지는 경국대전과 같이 아예 법제화까지는 못하고 아직 일회성 성격이 강했다. 그도 그럴게 적어도 한반도 내에서는 유례 없던 일이었으니까.
이렇게 이루진건 당면한 현실의 문제가 가장 큰 영향을 줬겠지만, 정도전 본인이 고려조정에서 관리 생활을 하며, 왕실 종친들이 정사 참여를 했을때 무슨 수를 써서든 개인의 치부를 쌓고 전횡을 일삼는 모습을 보고 느낀 부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도전이 살아서 계속 대권을 잡았었다면, 정황상 태종처럼 대놓고 외척을 사형 할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류의 차등 정책은 단순히 종친 수준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외척도 정사 참여가 불가능 하도록 제도화 했을 가능성도 존재 했다.
물론 이런건 적서차별과는 거리가 좀 크다. 애초에 당장 정도전 본인만 하더라도 외조모가 노비였었다.[17].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사족이나 평민들의 서얼 차별까지는 생각도 안했을 것이다. 사실 그럴이유도 없었고. 목적 자체는 어디까지나 와가의 권력이 문란해 지는걸 방지하는 거였을 테니까. 애초에 정도전이 지향하는 건 신권과 왕권이 서로 견제가 가능한 수준의 균형 잡힌 정치 체계였다.
이후에 역사의 기록대로 결국 이에 반발하여 1차 왕자의 난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그렇게 막으려고 했던 피의 숙청까지 있었으며 결국 정종을 거쳐 태종에게 대가 이어진다. 태종 입장에서는 이전에 정도전이 만들어둔 종법자체는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던 걸로 보인다.[18] 자기 스스로가 칼로 대권을 잡은쪽이었으니 당연히 후계에서 이런일이 발생하는 걸 크게 우려 했을 것이고, 또 스스로는 이미 대권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과거 자신이 차별 받던 시절을 고려 하지도 않았었던 것으로 볼수도 있다.[19]
문제는 당시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이다. 양녕대군의 세자 책봉 이후 초창기에 태종이 저지른 선위파동이 끝난 이후부터는[20] 계속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 줬었다. 물론 이런것과 별개로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 스스로가 유자로서의 교육을 받는 것 보단 밖에서 노는 걸 좋아했었고[21], 또 어느정도 나이가 차자 도성을 몰래 떠나 술과 여자를 탐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런 모습을 내외부에 보였던 기간이 최소 10년 이상이다. 태종 스스로도 10년쯤 이런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아무리 적장자를 사랑했다지만,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 졌을 것이다. 그래도, 태종의 장남 사랑은 당대 시선에서도 그렇고, 후대에서 평가하기에도 유별난 편이었어서 정말 어지간 하면 세자위에서 폐할 생각까진 없었던걸로 보인다.[22] 이런건 기록을 대충 보더라도 눈에 빤히 보일 정도였다. 태종은 어떻게든 장남의 권위를 세워주고자 여러모로 노력했었다. 적서제도의 등장은 이런 배경을 이해 해야 한다.
애초에 이미 문과 급제를 시작으로 조선의 중앙행정에 근접해서 관리 생활을 시작했으며, 거기서 경력이 쌓이며 능력을 인정 받던 핵심 관리 였고, 때문에 이미 나름 자리도 잘 잡아가서 엘리트 관료였던 서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적서제도 같은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정도의 감정 이었을 공산이 크다.[23] 반대로 명문가의 후예였던 서선 입장에선 정말 쓸모 없는 짓으로 느꼈을 공산이 더 크다. 아니 오히려 집안에서는 선비가 되어서 그게 뭐하는 짓이냐며 욕먹었을 수도 있다. 그도 그럴게, 유학에서는 적장자를 우선하기는 하지만 딱히 서얼차별을 두둔하는 내용은 없고, 애초에 왕을 제외한 만민은 평등하다는 걸 기본으로 깔고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유학 자체가 상명하복에 기초를 두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군신관계에서나 그런거다. 때문에 장유유서와 같이 평민들간에 관계에서는 따로 배려하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 하는 것이다. 만민이 평등하다고는 했지만, 적어도 어른은 공경해야 한다는 거다. 유학은 길가에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어 노숙하고 구걸하는게 일상인 거지도 배워서 익히면 유자가 될수 있다는 개념이다. 애초부터 조선에 국학인 유학만 놓고 보자면, 서얼차별을 옹호할한만 근거는 커녕 오히려 비판 받을 여지가 더 크다. 당연히 아직 적서제도가 등장하긴 전에 이걸 단순히 왕실에만 어쩔수없이 적용하자는 식도 아니고, 사족들에게 까지 그대로 적용하자고 했을때 같은 유학자 들에게서 받을 비난도 만만한게 아니었을 것이다. 즉, 사족 개인이 아무런 이득 없이 발의할만한 건이 못된다는 것이다. 이후에 발생한 문제들만 봐도 알겠지만, 단순히 파급이 크다 수준에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사족을 더 붙이자면, 이를 관리 감독 해야 하는 의무마저 발생하니, 관리 입장에서는 더더욱 골치아파 진다. 이리되나 저리되나 서선입장에서는 당시에 차기 왕이 될 가능성이 제일 컸던 세자 양녕과 태종의 눈에 든다는 걸 제외하고는 딱히 이득이라 할만한게 없었다. 즉, 이 이유가 가장 컸을 것으로 보인다.[24]
결국 이런 기미 자체는 태종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따로 직접 적인 지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왕의 지근거리에서 업무를 보던 우부대언 위치에서 눈치것 태종의 무언의 의사를 받은 거라 봐야 할것이다. 서선도 사실상 왕실의 비서실장 성격이 강한 승정원 소속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별개로 왕이 필요하다니까 하는 인식으로 진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기준으로 말하자면 자꾸 위에서 귀찮게 하며 눈치 주니까 한다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애초에 서선의 의도 자체는 뭔가 새로운걸 하자는게 아니라 기존에 왕실 종법을 더 견고이 하고 확장 하자는 모양새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적장자 우선 주의와 이걸 왕실에만 적용하자고 주장하기에는 당시 논란이 컸던 양녕대군을 겨냥한게 눈에 빤히 보이는 수준이었기에 서얼차별 내용과 이를 사족에게까지 적용하는 걸 포함해서 당시의 동료들과 의논하는 모양새로 왕이 뭐라 그런건 아니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이런걸 만들어 봤습니다 하고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발의한거라 보는게, 정황상 더 매끄럽다.
무엇보다 이걸 승정원 소속이 주청 한거 자체도 뜬금 없다. 보통 이런건 사헌부에서 발의하고 의정부에서 검토하는 식으로 흘러가는게 일반적이다.[25] 원래 우부대언이 속한 승정원은 왕명의 출납만을 담당하지 그외 다른걸 넘보는건 월권이기 때문이다. 아니 더 확실히 말하자면, 월권을 넘어 전횡으로 볼수도 있다. 현대에 비유하자면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앞으로 귀화인들은 공무원으로 임관 못하게 법으로 재정 합시다 라고 건의 한 것과 같은 수준에 이야기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당대에도 꾀나 많은 뒷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26] 이게 별일 없이 무난히 넘어갔다는 것에서 부터[27] 이미, 서선의 자발적인 주청이었다기 보다 태종의 의사가 상당히 컸다는 걸 반증하는 것 이기도 하다. 이미 대부분의 대신들이 굳이 크게 딴지 걸 필요성을 못느낄 만큼 대종 본인이 자주 그런 의사를 보이고 있었다는 뜻일테니까. 물론 서선의 공명심도 이를 발의하는데 한몫 했을 것이라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애초에 서선이 언급한 왕실 종법상 종친이나 각품의 서얼의 참정 금지는 명문화 된 수준 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왕실 족보내에서는 이미 정도전이 대권을 잡았던 시절 부터 서선이 이걸 주청할때까지 무려 20년 가까이 그것도 아주 착실히 실행되고 있는 상태 였다.[28] 애초에 종친이 정사에 참여 하고 말고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이는 결국 태종과 그 후계자들 정도였기에 이쪽에 더 무게가 실릴수밖에 없다.
때문에 발의 자체는 서선이 이를 같이 연구했던 동료들을 대표로 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이러한 의중 자체는 태종으로 부터 기원했다고 보는게 맞을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제 막 좌천지에서 복귀했던 서선 입장에서도 함부로 꺼내기 힘든 주제였으며, 동시에 굳이 꺼낼 이유가 없는 주제였고, 특히 이게 사헌부가 아닌 승정원 관리 입에서 튀어나왔다는 점에서 더 그런 의심이 들수밖에 없다.
결론은, 적서제도의 발의 자체를 서선을 중심으로 볼게 아니라 태종을 중심으로 살펴 봐야 한다는 뜻이다.
태종 입장에선 적서 차등이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 될 경우 적장자 우대에 대한 여론에 강한 힘이 실려 당시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에 위치를 높힐 것으로 봤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적서를 법적으로 차등하는 게 명확하게 제도화 되는 과정에서 조차 앙녕대군의 태도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3년 뒤에 참다 못한 태종도 결국 세자위를 폐하기에 이른다.
이미 결과가 나온 후대의 시선에서 살펴 보자면, 태종으로 부터 비롯된 조성 왕실의 적장자 사랑은 여러모로 아이러니 한 점이 많다.
사실 역대 왕의 집권을 살펴 보면, 조선왕조에 스물일곱 명의 왕 가운데 적장자로서 온전하게 왕위를 계승하여 집권이나마 한 임금은 문종, 단종端宗, 연산군燕山君, 인종仁宗, 현종顯宗, 숙종肅宗, 순종純宗 뿐이다.
27명 중 고작 7명만이 적장자로서 집권하였다는 말이다.
이것도 그나마 따져 보면,
문종은 단명하여 6년의 재위도 못채웠고, 재위 직후나 삼년상, 그리고 그걸 마친거 까지 생각해 보면 실무 자체는 2년도 못채웠다는 결론이 난다. 일반적인 평도 재위 기간의 치적보단 세자 기간의 치적을 보는 편인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단종은 사실 재위 내내 김종서의 섭정이나 마찬가지 였는데 그 기간조차 4년을 못채우고 반정후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연산군은 두말할 필요없는 암군으로 적장자라는 것 자체가 의미없게 보일지경으로 집권 하였으며, 해당 명분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시호 조차 못받았다.
인종에 경우 재위 시작후 고작 1년 반만에 열병으로 사망해 제대로 집권을 한 기간은 반년이 채 되질 않는다.
현종도 집권자체는 오래 했지만, 18세의 어린나이로 시작해 33세를 일기로 단명한 편이다.
순종에 경우 사실상 나라가 망한 상태였고, 그것도 고작3년 채웠으며, 그 3년도 본인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보기 민망할 정도고, 직후 일제 식민 지배가 바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적장자의 의미를 찾기 힘들다.
즉, 사실상 적장자로서 그 의미와 특혜를 오롯이 누렸던것은 숙종 뿐이었고, 넓게 봐줘야 18대왕인 현종이 끼는 정도라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이와 별개로 숙종에 경우 적장자가 정상적으로 장기집권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 주긴 했다. 당대에나 후대에 그 치적 만큼이나 인성적으로 저평가 받을 정도였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무려 46년이 넘도록 통치를 했을 정도니 적장자의 위세 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한번 뒤집어 졌었어도 이상할게 없는 정치를 한 왕이었으니까. 영조가 더 장기 집권 하긴 했으나 정치 맥락은 많이 달랐으며[29] 왕권 자체도 영조 집권 시기를 숙종 시기에 비교하기에는 그 비교가 감히 민망할 정도로 손색이 매우 크다. 영조에 경우 오래 산 만큼 후반기에는 왕권이 매우 강력하긴 했지만, 그나마 강력했던 시절조차 제약이 심한편 이었다. 달리말해 그만큼 조선에서 적장자가 가지는 상징성과 특혜가 컸다는 뜻이다. 이에대한 자세한 내용은 숙종을 참고.
결국, 고금을 막론하고 비하기 힘든 수준에 차별과 함께 이로인해 인적 공백마저 발생 하였으며, 사실상 서얼을 한등급 아래 사람으로 두는 시선을 고착화 하는 등의 사회적 문제만 남기고 막상 그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왕실에서 조차 별 소득 없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다.
3. 연혁
1393년(태조 2년) 사마시에 합격
1396년에 문과에 급제
1397년 부봉사(副奉事)
1398년 춘추관기사관
1400년 문하주서
1401년 주부(注簿) 병조좌랑·이조좌랑 겸 지제교, 감찰 등을 역임
1402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역임
1402년 죽산(竹山)에 유배.
1405년(태종 5) 전사시영·세자시강원좌문 역임
1406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역임
1408년 동부대언·경연참찬관·보문각직제학·지제교(知製敎)·춘추관편수관 겸 군기감사, 지공조사를 역임
1411년 우부대언 겸 군자감사, 지호조사 역임
1412년 좌부대언·집현전직제학 겸 판사재감사·지형조사를 역임
1412년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事) 역임.
1415년 우부대언(右副代言) 역임.[30]
1417년 충청도관찰사로 임관
1419년(세종 1년) 고부 겸 청시부사(告訃兼請諡副使)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 귀국하여 한성부윤 임관.
1420년~1425년 경기도·경상도·전라도 등의 관찰사와 형조·예조·이조의 참판 등 내외직 역임
1427년 형조판서 역임
1429년 판한성부사로 절일사(節日使)가 되어 명나라에 출구 후 이듬해 귀국
1431년 좌군도총제 역임
1433년 사망
사후 우의정에 추증 및 이천의 설봉서원(雪峯書院)에 제향.
[1] 1차 왕자의 난[2] 기사관과 같은 맥락으로 문하부의 문서나 기록을 관리하는 직이다[3] 임금에게 서면 또는 언사로 아뢰는 행위[4] 도호부사가 종3품이기 때문에 품계 자체는 승진으로 보거나 같은 품계 내에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긴 하지만, 중앙 행정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좌천성격으로 배치된거라 본다.[5] 한창 왕권이 강했던 시기라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무려 기록상으로만 3번이나 보일 정도인걸 보면 태종과는 뭔가 잘 안맞았거나, 그냥 그런거 신경 안쓰고 마이웨이로 해야 하는 말을 대쪽같이 한걸수도 있다.[6] 풀어 말해 이전 왕의 부고를 알리고 새 임금이 즉위하니 허가를 구하는 사절직이다. 하지만 직위 내용중에 포함이 되었을 뿐이고, 당시 태종은 세종 즉위 후 5년은 더 살았으며, 그 기간내내 태상왕 자격으로 암중 지배를 했으니, 실제로는 새왕이 즉위 했다고 보고겸 해서 간 것이다.[7] 앞서 언급된 좌천 성격의 임관 과는 결이 다르다. 무려 종2품이다. 여기부턴 윗줄 품계라고 해봐야 고작 3개 밖에 없다. 현시대로 치자면 도지사 내지 군수급. 사실상 다음 단계 승진을 위해 공을 쌓는 과정에 들어선거라 보면 된다.[8] 사실 당시 평균 수명이나 일반적으로 자녀를 보는 나이가 16~18임을 감안하면 세종이 무시 못할 적잖은 나이긴 했다.[9] 물론 외가의 도움을 받는 문제도 있기 때문에 외가의 힘이 센쪽이 이어 받을 확률이 높았을 뿐이다. 당연히 자기 보다 아래라고 생각되는 이가 후계를 이을 경우 이를 순순히 받아 들이는 경우가 더 드믈었을 거다. 그래서 가장 나은 인물을 찾아가는 과정이 내전 형태일 경우가 많았던 것이고. 단순히 서얼이라 가문 내에서 내전을 일으키고 하는건 아니었다.[10] 게르만 민족이 가장 우월하다는 우생학을 의미한다[11] 한반도 거주민의 민족주의는 일제침략후 그 경향성이 크게 강성해 졌고, 독립 운동 과정에서 활발하게 퍼졌으며, 해방 직후에 절정에 달했다. 애초에 한반도에 정착된 민족자결주의라는 것 자체도 3.1운동 직전에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받아 들여져 대중에게 비밀리에 전수되었고, 제대로 된 정착은 해방 이후였다. 그나마도 일부 지식인들이 당시 기준으로도 다소 편향된 사고를 가지고 급진적으로 주장했던게 남은 정도고.[12] 옛날에는 순혈주의가 극심했으니 적서차별이 더 심했을 것이라는 편견[13] 해당 사례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고종이다. 고종은 따지고 보자면 단순히 방계 수준을 넘어 이씨왕조와는 남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에 촌수를 가진 인척이었다. 윗대에서 이전 왕조로 양자로 들어가고 고종이 철종의 양자로 입적하며 눈가리고 아웅한것. 당장 한국의 민법 기준으로도 근친혼 기준을 6촌 이내로 정의하는데, 단순히 고종의 친아버지인 이하응만 보더라도 당시 왕이었던 철종과 무려 16촌 사이였다. 사실 이정도면 관련이 없는 남남이라 봐도 무방한 관계다.[14] 당연히 안걸리려고 노력을 했을테니 못해도 드러난 것에 몇배 이상이었을 것이다.[15] 물론 당시 기준으론 범법이긴 했다. 아무나 그러는 것도 아니었을 테고, 적어도 지방 유지 정도는 되는 이가 했을테니 걸려도 적당히 모른척 넘어가 주는 식이었긴 했겠지만[16] 아무리 서얼 차별이 크게 없었다 손 치더라도 막내가 그것도 단순히 큰 가문에 주인정도도 아닌 왕의 다음 후계 자리에 내정된거다. 당시의 정도전 입장에선 차라리 이성계가 보다 일찍 사망했다면 더 과격하게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실록에 기록으로 보나 당시 정황으로 보나 딱히 피를 보는 것에 두려움을 가진 인물도 아니던걸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귀결일 것이다. 물론 이성계가가 있어 겨우 현상 유지하던 상황이었기에 당시 이성계가 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내전이 일어났다고 하여 정도전이 이방원 일파를 이길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냐에 대해선 다시 계산해야 하겠지만.[17] 실록이든 야사든 간에 정도전과 관련된 기록에서는 이것이 그에게 있어 상당한 콤플렉스였음을 자주 시사한다[18] 본인이 왕자군 시절에 느꼈을 차별 문제를 집권 이후에도 똑같이 느꼈다면 진작에 없에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이런 차별에 맞서 칼로 대권을 잡았지만, 결국 고스란히 이용했다는 걸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수 있겠다.[19] 이런 의사가 구구절절 들어날 정도로 세자를 제외한 자식들에 대한 제한을 크게 했다는게 당시 조선왕조 실록에서 자주 들어난다. 물론 쓸모가 없어진 공신들이나 형제들을 쥐잡듯 잡아 가둬둔 건 덤이다.[20] 혹자는 태종의 선위파동이 스트레스를 유발해서 애가 엇나간거 아니냐 하는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21] 관련 문제로 어린 시절부터 태종에게 혼났다는 기록이 여럿 남아있다[22] 사실 어떻게 보더라도 엽색가라 평가할 수밖에 없는 행동양식과 이를 동반한 행동들만 없었어도 요즘 일진들 수준의 일탈 정도 였으면 어떻게든 무마하고 넘어갔을 공산이 컸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한가지만 가지고 따진자고 가정해도, 이에 대해 무기징역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짓을 한번도 아니고 10대 중반부터 지속적으로 저질렀기에 폐위에 까지 이른것.[23] 일단 본인이 생각하기에 이건 꼭 해야 하는 말이라 생각 하면 직언을 올리는 편이었던 것으로 평가되는 서선이기에 더 그랬을 공산이 크다.[24] 가뜩이나 유배나 좌천도 잦았던 서선이었기에 어느정도 눈치는 볼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능력이 좋았던것도 있었겠지만, 이정도로 눈치것 행동하는 점도 있었기에 유배나 좌천 이후에도 금방 다시 임관되어 중앙에 불려 온것이라 볼수 있다.[25] 대부분의 대하드라마에서 왕에게 딴지 거는 역할을 괜히 사헌부 관리들이 독식하는게 아니다. 사헌부라고 하면 좀 생소하게 느껴질수도 있는데, 대하드라마를 보면 대간들의 간언이나 상소와 관련된 대사가 많이 등장한다. 이 대간들이 바로 사헌부 소속 관원들이다. 애초부터 사헌부가 그런거 하라고 마련해둔 기관이기도 하고.[26] 이런 배경을 고려한다면, 굳이 서선이 제일 앞에서 총대를 맨 건 과거 사헌부장령이었던 이력도 참작 되었을 것이다.[27] 다시 강조하지만, 승정원 소속이 할말도 아니었고, 해서도 안되는 행위다.[28] 일단 태조의 명이었기에 태종이 집권한 뒤, 굳이 이 명령을 거둬 들이지 않고 잘써먹었다. 이 명분으로 자기 형제들과 그 자제들도 권력의 근처에 못가게 할수 있었다. 태종이 못하게 한게 아니라 태조께서 왕명을 내리신거니 나도 어쩔수 없다 정도의 자세였다는 거다.[29] 굳이 비교하자면 숙종은 닥쳐 내맘데로 할거야 정도의 늬앙스라면, 영조는 선을 정말 잘 탄 왕이라는 늬앙스다.[30] 이때 태종에게 적서제도의 기반이 되는 주청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