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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5 13:15:29

서군


1. 개요2. 주요 다이묘3. 문제점
3.1. 지휘체계의 혼란3.2. 이시다 미츠나리3.3. 모리 일족의 분열
4. 세키가하라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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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西

모리 테루모토,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한 다이묘들의 연합군. 역신 도쿠가와를 치고 도요토미를 지킨다는 기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모리가 천하를 좌지우지케 하려는 야망을 가진 안코쿠지 에케이, 진짜 도요토미를 지키려던 미츠나리와 여러 다이묘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결성되었다. 도쿠가와의 동군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맞붙었지만 패배하여 망했다.

2. 주요 다이묘

3. 문제점

3.1. 지휘체계의 혼란

바지사장인 모리 테루모토와 이시다 미츠나리 사이에서 지휘체계가 혼란했다. 게다가 시마즈와 코바야카와는 이시다의 명을 듣지도 않았다.[9] 특히 미츠나리와 안코쿠지 에케이가 너무 나서는 것은 모리 일족[10]에게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3.2. 이시다 미츠나리

타인을 무시하고 한번 적은 영원한 적으로 여기는 미츠나리가 실질적 총대장을 맡은 것이 가장 큰 패인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 당장 미츠나리가 성격이 좋았다면 칠본창을 위시한 무단파 장수들과 협력하여 도요토미 가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번 적은 영원한 적'으로 여긴 탓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배반할 것으로 보일 때 적극적으로 협상하지 않았다.[11] 시마즈가 군사를 적게 끌고 오고, 틀린 작전을 냈다고 무시하여 시마즈가 전투에 불참하다시피 한 것도 미츠나리의 성격 탓.

그런 상황에서 군재도 바닥. 세키가하라의 학익진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왜 날개에 코바야카와를 투입해야했는가?[12] 위에서 써놓았듯이 미츠나리도 히데아키가 믿을만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놔두었다.'

여러모로 서군 최대의 패인.

3.3. 모리 일족의 분열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세 사람 사이에 조금이라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세 사람 모두 멸망한다고 생각해라."
- 모리 모토나리, 세 아들에게 남긴 교훈장에서.

코바야카와 가문은 히데아키가 가문을 계승한 이래 사실상 모리 본가로부터 떨어져 독자 가문으로 취급되었다.

모리 테루모토안코쿠지 에케이킷카와 히로이에를 무시한 것도 크게 한 몫했다. 히로이에는 모리의 존속을 위해서는 도쿠가와를 지지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에케이와 테루모토는 이를 무시한 것. 이에 히로이에는 동군과 내통하는 선택지를 고르게 된다(...)

4. 세키가하라 이후

다시 영지를 되찾은 타치바나 무네시게같은 경우가 있긴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1] 바지사장.[2] 동군에 참여하려 하였으나 길막당하여 서군에 가담[3] 동군에 참여하려 했으나 지각하여 서군에 가담[4] 동군과 내통[5] 동군으로 배반[6] 동군으로 배반[7] 본거지인 우에다 성을 지킴[8] 모가미 요시아키의 데와를 침공. 게이초 데와의 전투 발생.[9] 시마즈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강건너 불구경. 코바야카와는 원래 이시다가 배치해놓은 군을 밀어내고 마츠오 산을 점거하고 전투에도 참여안하다가 배반. 물론 코바야카와는 동군과 내통 중이기는 했지만.[10] 특히 킷카와 히로이에[11] 히데요리의 후견인으로서 간파쿠 직과 기나이의 대영지를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 뒤로는 손을 놓고 있다시피 하였다.[12] 물론 히데아키가 마츠오 산에 진을 친건 히데아키의 독단이기는 했으나, 미츠나리는 히데아키에게 마츠오 산에서 물러나라고 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