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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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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湘西會戰(샹시 전투)
일본어: シ江作戦(즈장 작전)
]]영어]]: Battle of West Hunan(후난 서부 전투), Battle of Xuefeng Mountains (설봉산맥 전투)
샹시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중일전쟁의 일부
파일:3ac79f3df8dcd1002dbae1b1728b4710b9122f7f.jpg
▲ 샹시 전역도
파일:01300000178518122165511548855.jpg
▲ 진지를 건설하고 있는 미군 병사들
파일:검은 든 국민혁명군 병사들.jpg
▲ 검을 들고 있는 국민혁명군 병사들
파일:30424a4a6e373030.jpg
▲ 노획된 일본군 무기들
날짜
1945년 4월 9일 ~ 1945년 6월 7일
장소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후난성 중서부
교전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US_flag_48_stars.svg.png 미국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대만 국기.png 허잉친
파일:대만 국기.png 왕야오우
파일:대만 국기.png 탕언보
파일:대만 국기.png 왕징주
파일:대만 국기.png 랴오야오상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이치로 반자이
결과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의 승리
영향
일본군의 대중국 공세 역량 상실
병력 파일:대만 국기.png 20만 명
- 항공기 400대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약 10만명
피해규모 파일:대만 국기.png 20,660명 사상[1]
- 미국인 조종사 11명 전사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일본측 통계; 약 27,000명 사상
- 중국측 통계: 35,805명 사상[2]

1. 개요2. 배경3. 전력
3.1. 일본군3.2. 국민혁명군
4. 경과
4.1. 전투 초기4.2. 우양 공방전4.3. 우강 공방전4.4. 부용산 전투4.5. 전투 중반4.6. 국민혁명군의 반격
5. 결과6. 참고 문헌

1. 개요

중일전쟁 말기인 1945년 4월 초부터 6월 7일까지 벌어진 전투. 위시-어베이 전투와 같은 시기에 진행된 일본군의 최후의 대중국 공세였지만 국민혁명군의 반격으로 끝내 실패했다.

2. 배경

1945년 초, 일본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한 이래 8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투입했으나 중화민국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 막대한 전쟁비용을 낭비했다. 또한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단행한 후 태평양 전쟁을 개시했으나 전황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급기야 1945년 3월 이오지마 전투에서 패해 미군이 일본 본토에 지속적인 폭격을 가하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말았다. 또한 믿었던 동맹국 나치 독일독소전쟁에서 참패를 거듭하고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프랑스 전선에서도 밀려 독일 본토까지 공략당해 패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는 이무리 낙관적인 일본인이라 해도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이 어려운 시국에서도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다른 전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인 중국 전선에 희망을 걸었다. 대본영은 미군이 중국 전선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중국을 하루빨리 제압한 후 중국에 파견된 100만에 가까운 대군을 타 전선에 파견한다면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또한 일본군은 미군의 지원을 받은 중국 공군이 핑한 철도의 남쪽 구역에 위협을 가하는 것이 거슬렸다.

이에 1945년 1월 22일, 지나 파견군의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는 랴오허커우와 즈장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랴오허커우 공격에는 북지나 방면군 소속 4개 사단과 2개 여단이 동원될 예정이었고, 즈장 공략에는 중지나 방면군 소속 제20군 2개 사단(116사단, 47사단)이 투입될 예정이었다. 오카무라 대장은 이 두 방면에서 공세를 한꺼번에 벌인다면 국민혁명군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으며 적의 저항을 보다 쉽게 분쇄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1945년 3월 21일, 북지나방면군이 먼저 랴오허커우 공세를 개시하고 중지나 방면군은 4월 9일에 뒤따라 즈장 공세를 개시한다.

3. 전력

3.1. 일본군

(3) 제 64사단: 후네히키 타다시 사단장. 1943년 5월 중국에서 독립 혼성 제12여단을 기초로 조직됨. 116사단, 47사단의 공세를 돕는 역할 수행.
- 보병 제 69여단 4개 보병대대.
(4) 제 68사단: 쓰쓰미 미키오 사단장. 1942년 2월 중국에서 독립 혼성 제14여단을 기초로 조직됨. 116사단, 47사단의 공세를 돕는 역할 수행.
- 독립 보병 제 65대대
- 독립 보병 제 115대대
- 독립 보병 제 116대대
- 독립 보병 제 117대대
(5) 제 34사단: 반 다케오 사단장. 116사단, 47사단의 공세를 돕는 역할 수행.
- 보병 제 34연대
- 기병 제 34연대
- 야포 제 34연대
- 공병 제 34연대
- 군수 제 34연대

총병력: 5개 전투사단 약 10만 명.

3.2. 국민혁명군

(2) 제4전구: 왕야오우 사령관, 구유달(邱維達) 참모장, 뤄행리(羅幸理) 부참모장
1) 제18군: 후롄(胡璉) 군장
- 제 11사단: 양보타오(楊伯濤) 사단장
- 제 18사단: 친타우셴(覃道善) 사단장
- 제 118사단: 타이푸(戴樸) 사단장
2) 제 73군: 한준(韓浚) 군장
- 제 15사단: 량치유(梁祗六) 사단장
- 제 77사단: 탕성하이(唐生海) 사단장
3) 제 74군: 시중성(施中誠) 군장, 장영보(張靈甫) 부군장.
- 제 51사단: 주지도(周志道) 사단장
- 제 57사단: 리옌(李琰) 사단장
- 제 58사단: 채인걸(蔡仁傑) 사단장
- 제 191사단: 소중광(蕭重光) 사단장
- 제 196사단: 조옥호(曹玉珩) 사단장
4) 제 100군: 리톈샤(李天霞) 군장
- 제 19사단: 양음(楊蔭) 사단장
- 제 63사단: 쉬즈위(徐志勗) 사단장
5) 직할 부대
- 제 6사단: 쟈오지핑(趙季平) 사단장
- 제 13사단: 친리싼(靳力三) 사단장
- 제 6열 종대: 진광중(陳光中) 사령
(3) 공군: 제10항공 집단군. 왕징주(王敬久) 사령관.
- 공군 제 1전대
- 공군 제 2전대
- 공군 제 3전대
- 공군 제 5전대
(4) 미군: 제14 공군

총병력: 28사단 약 20만명, 항공기 400대

4. 경과

4.1. 전투 초기

1945년 4월 9일, 일본군 제 47사단의 우익을 맡은 4000여 명과 제 116사단이 란텐을 공격했다. 란텐 부근에 주둔한 73군장 한준은 아직 일본군의 병력이 다 모이지 않았고 수일 후에 병력 집결이 완료되면 총공격을 펼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한준은 일본군에게 기습 공격을 가하기로 결심했고 73군 소속 2개 연대 주력군을 파견했다. 일본군 47사단은 국민혁명군의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했고, 일본군 증원부대가 아군을 돕고자 급파되었다. 한준은 이 공격을 통해 일본군의 예기를 꺾었을 뿐만 아니라 제 47사단의 전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4월 14일, 일본군 47사단은 쯔수이강 도하를 강행했다. 한준은 휘하 부대에게 적의 도하를 막는 척하다가 일부러 패퇴하라고 지시했고, 일본군은 예상보다 쉽게 도하를 성공했다. 일본군 주력군이 도하를 막 마칠 무렵, 중국군은 중포를 동원해 일본군이 도하할 때 사용한 부교를 포격해 모조리 격파해버렸고 동시에 폭격기가 투입되어 일본군에게 폭탄을 퍼부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 47사단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워낙 갑작스런 공격을 당해서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각 연대들이 개별적으로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4월 15일에야 부교를 재건하고 그날 밤에 하나로 모일 수 있었다.

이후 국민혁명군 73군과 대치하고 있던 일본군 47사단은 소양현 이남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116사단으로부터 "지나군에게 포위되었으니 구원 바란다."라는 급보를 접했다. 이에 47사단은 73군을 격파한 후 116사단과 합류하고자 했으나 미군으로부터 최신 무기를 지원받은 73군의 강력한 화력으로 일본의 공격은 모조리 막혔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 30일 전투가 교착 상태에 처하자, 한준은 반격을 명령했고, 77사단이 일본군 47사단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15사단은 측면 기습을 맡았다. 5월 2일 제15사단이 일본군 47사단의 부교 위치로 갑작스럽게 침입하자, 일본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곧 패주했다.

그후 가까스로 군대를 재정비한 47사단은 1개월 가까운 기간 동안 흑전포, 월광산, 양계 몇 곳을 장악했지만 거의 진척이 없었고, 73군의 결사 저지로 인해 임무를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4.2. 우양 공방전

1945년 4월 12일, 일본군 제34사단이 시닝을 공격했고 국민혁명군 제74군 제 58사단 1개 대대가 이에 맞서 싸웠다. 양측은 사흘 동안 싸웠고, 1개 대대에 불과한 수비군은 적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4월 15일, 34사단은 68사단 58여단의 증원을 받고 시닝을 다시 공격했다. 시닝 수비 대대는 수백명의 일본군을 전사시켰지만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하고 패주했다. 이리하여 시닝을 장악한 일본군은 수일 동안 휴식을 취했다.

4월 21일, 일본군 제68사단 58여단 4000여 명은 시닝에서 출발해 메이커우로 진군했다. 4월 23일 일본군이 쯔수이 강을 건너던 중 국민혁명군 제27집단군 제 94군 소속 제 44사단의 급습을 받았고 일본군 2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이후 일본군은 강을 몇차례 건너려 했지만 강을 절반 정도 건넜을 때 중국군의 급습을 받아 번번히 패했다. 이에 일본군은 방향을 돌려 우양으로 진격했다.

4월 27일, 일본군 68사단이 우양을 공격했다. 우양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군은 2일간 전투를 치렀으나 워낙 전력이 열세라서 우양현 대부분을 상실했다. 우양이 위급하다는 정보를 입수한 44사단은 즉시 진군하여 4월 29일 우양 근방에 도착해 일본군을 급습했다. 한창 우양을 공략하고 있던 일본군 68사단은 갑자기 중국군의 기습 공격을 받자 우양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44사단과 상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중국군의 강력한 전투력으로 인해 격파되었다. 27집단군 지휘관 탕언보는 일본군 68사단을 섬멸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94군에게 적을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94군은 즉각 황핑현과 전위안현에서 군대를 동원해 우양으로 진군했다.

4월 30일, 94군 증원부대가 우양 인근에서 일본군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일본군은 이틀 동안 94군과 소규모 전투를 치른 후 퇴각했다. 중미연합공군 2개편대가 퇴각하는 일본군을 며칠 간 폭격했고, 중국 육군도 일본군의 후미를 바짝 추격했다. 5월 1일, 제13연대가 우양의 포위를 가볍게 풀었고, 중국군은 사기가 하늘까지 치솟은 채 일본군이 점령했던 영토를 탈환했다.

4.3. 우강 공방전

1945년 4월 27일, 일본군 제 68사단 별동대는 전차 100여대와 포병 연대를 앞세워 우강에 주둔한 국민혁명군 제74군 제 58사단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사흘 동안 공세를 감행해 58사단의 2개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하지만 우강현 최후의 방어선은 매우 강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이를 돌파하지 못했고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5월 1일, 일본군은 가능한 모든 화력을 우강성의 서문 쪽으로 집중시켰고, 수백명의 특수부대가 성벽을 폭파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특수부대원 대부분이 사살되었지만, 몇몇 부대원들이 성벽 근처에 도달해 폭발물을 폭파시켰고, 성벽에 12개 이상의 구멍이 뚫렸다. 그러자 도시 수비대와 주민들은 수백개의 모래주머니를 던저 이 구멍들을 모조리 메꾸고 일본군의 진입을 차단했다.

일본군은 특수부대의 임무가 실패했다는 걸 확인하고 보병 돌격을 감행했다. 일본군 보병들은 사다리를 세우고 성벽을 기어올라갔으나 수비군이 미국제 화염 방사기를 동원해 이들을 모조리 불태워죽였다. 또한 수비군은 기관총을 동원해 돌격해오는 일본군에게 맹렬히 난사해 수많은적을 쓰러뜨렷다. 일본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지만 여전히 우강성을 공략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비군 역시 많은 사상자를 입었기 때문에 이때 마침 우양을 막 되찾았던 44사단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44사단 1개 부대가 우강으로 급파되어 일본군의 후미를 공격했고, 우강 수비군도 모두 도시 밖으로 나와 일본군을 협공했다. 일본군은 크게 패하고 장교들은 무사도 정신을 내팽개치고 병사들을 저버린 채 도주했다. 중국군은 이들을 추격했고, 일본군은 다수의 병력을 상실한 채 원래 기지로 도주했다.

4.4. 부용산 전투

한편, 일본군 116사단은 5천 명씩 3개의 군대로 나누고 3개의 진군로를 따라 진군을 개시했다. 제1로군은 1945년 4월 17일에 쯔수이강을 도하하여 국민혁명군 제 100군 주둔지로 진격했다. 그들은 1400명의 별동대를 타오화춘(桃花坪) 동쪽 교외 및 남쪽 교외로 우회시켜 도시 수비군 57연대 1대대를 포위한 후 전멸시키고자 했다. 일본군은 처음에 부용산(芙蓉山) 외곽의 암구포(岩口铺)를 공격했고, 암구포를 지키고 있던 수비군 장교 및 병사 196명은 천여 명의 일본군과 12일간 교전했다. 그 결과 소대장 이하 장병 17명이 전사했고 31명이 부상당했다. 반면 일본군은 타츠오 유고로우 대위를 비롯한 19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 29일에야 부용산과 인접한 사자산에 거점을 마련한 일본군은 10일 만에 국민혁명군 진지를 우회해 부용산으로 진입했다. 이후 벌어진 부용산 전투에서, 일본군은 3천 명의 주력부대와 포병 및 공병 여단을 앞세워 공세를 전개했지만 뜻밖에도 수비군의 진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일본군 일지는 이에 대해 "적의 모든 무기가 미제를 쓰고 있어 매우 강력한 화력을 퍼부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을 압도한 까닭은 단순히 미제 무기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례로, 일본군이 부용산을 우회하여 동구현을 공격했을 때, 동구현 수비를 맡은 제19군 57연대 1대대는 극도로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산등성이에 진지를 촘촘이 쌓았고, 진지 앞쪽에 지뢰를 설치했다. 또한 화망을 매우 밀집된 형태로 구성해 일본군이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일본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동구현에 들어오자, 수비군은 즉시 안전한 곳으로 철수했다. 그렇게 동구현을 장악한 일본군이었지만, 중국군이 이미 동구현 주위에 집결하여 일본군을 포위해버렸다. 게다가 보급이 좁고 험난한 산길을 통해 이뤄지다보니 원활하게 이뤄질 리 만무했고 중국군 유격대의 습격이 종종 벌어지면서 일본군은 실로 괴로운 처지에 놓였다.

한편 일본군 116사단 제2로군 109연대는 4월 18일 부용산을 우회해 룽후이현 일대로 진군했다. 4월 21일, 109연대는 룽후이현 수비를 맡은 국민혁명군 제19사단과 교전했다. 19사단 소속 56연대는 정면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55연대는 우회하여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적의 저항이 강하자 일단 후퇴했다. 당시 일본군은 고지대를 점령했기 때문에 국민혁명군 포병대는 적을 향해 정확히 맞출 수 없었다. 따라서 보병대는 포병대의 별다른 지원 없이 높은 위치에 자리잡은 적을 상대로 돌격해야 했다.

4월 22일부터 23일까지, 55연대와 56연대는 몇개 대대를 출동시켜 고지대에 위치한 일본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56연대장 유광우(刘光宇)는 직접 총검을 들고 병사들과 함께 돌진했고, 양측은 서로 죽고 죽이는 공방전을 벌였다. 마침내 일본군은 중국군의 기세에 눌려 고지를 상실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4월 23일, 100군 별동대가 짙은 안개가 낕 틈을 타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미군의 전투 방식을 채용하여 대규모 포격을 가한 뒤 보병이 돌격하여 박격포로 일본군의 방어 진지를 정밀 타격했다. 일본군 109연대는 하루 만에 크게 패하고 대부분의 장병들은 산지로 퇴각했다.

4월 21일, 일본군 116사단 제3로군이 고사시(高沙市)와 산먼진(山门镇)을 공격했다. 이후 일본군과 수비군 제 57사단은 4일 동안 격전을 벌였다. 4월 25일, 116사단 주력부대가 도착하여 공세를 개시했지만 중국군의 저항에 가로막혀 전투가 교착 상태로 접어들었다. 4월 하순, 국민혁명군 제 50사단, 19사단, 63사단이 강구, 청산계, 송산, 규동에서 일본군과 20일 밤낮으로 전투를 벌였다. 5월 12일 일본군 잔여병 100여 명이 151연대에게 포위되어 13일 낮 12시에 괴멸되었고, 중국군은 27일 만에 700여 명을 사살하고 왜구묘에 합장했다. 국민혁명군 역시 400여 명이 전사해 합장되었다.

이 시점에서 일본군의 다방면에 걸친 공격 작전은 실패했고 대다수 병력은 겨우 30km 이하의 거리만 진격했으며 전방에 있던 제109연대는 여전히 중국군에게 포위되었다. 게다가 국민혁명군에게 아직 많은 예비대가 있어서 이들이 언제라도 일본군을 포위 섬멸해버릴 수 있었다. 5월 4일, 허잉친 총사령관은 제 1단계 방어 작전을 종료하고 제 2단계 반격 작전을 개시했다.

4.5. 전투 중반

중국군이 반격 작전을 집행하기로 결정할 무렵, 일본 제20군 사령부 내에서는 군대를 철수시킬 지의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중국군에게 큰 타격을 받은 116사단장 우치다 긴노스케와 47사단장 와나나베 히로시는 공동으로 전투를 중단하고 철수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일본군 좌익과 우익 공격이 이미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 공격도 중국군의 저항으로 손해가 막심하고 109연대가 포위된데다 중국 유격대와 공군이 보급로를 위협하니 더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군 사령부는 여전히 철수령을 내리지 않았다.

5월 1일, 94군은 5사단을 주력부대로 삼아 일본군 68사단을 공격했고 26군 제44사단이 작전에 협력했다. 5월 2일, 5사단이 일본군 진지를 습격해 반나절만에 대부분의 일본군 진지를 점령했고 일본군은 후방으로 퇴각했다. 제44사단 역시 일본군을 압박해 몇 킬로미터 내외로 밀어냈다. 5월 3일, 국민혁명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일본군 58여단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때 5사단과 44사단은 소수의 미군 무기만 장착하고 있어서 화력은 일본군보다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접 무기를 채택하고 육탄전을 벌였다. 이때 제5사단의 부사단장 추샹상(邱行湘)이 돌격대로 이뤄진 15연대를 구성해 친히 이들을 지휘했다. 15연대는 현지 소수민족의 안내에 따라 산길을 통해 일본군의 진지 후방으로 돌아가 일본군 사령부를 급습해 장교 200명을 사살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 58여단의 지휘체계가 마비되었다.

또다른 돌격대는 일본군 포병대로 몰려들었고, 일본 포병대는 대포를 내던지고 도망쳐 모든 대포가 국민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국민혁명군의 공세로 일본군 전체 여단이 무너졌고 115대대를 제외한 모든 군대가 전멸했다. 115대대는 곧 국민혁명군에게 포위되었고, 5월 6일 115대대는 94군 소속 측면군에게 습격받았다. 이때 115대대 병사들은 대대장의 반격 명령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모두 버린 채 산으로 뿔뿔이 도망쳤다. 결국 115대대 절반이 국민혁명군에게 살해당하거나 부상당했고 거의 모든 장교들이 전사했다.

한편, 58여단이 포위되었을 때 신녕에 주둔하고 있던 제34사단은 상부로부터 즉각 58여단의 잔여부대를 구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34사단은 적의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병력을 차출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후 국민혁명군 94군은 58여단을 섬멸한 후 34사단을 공격했고, 34사단이 즉시 퇴각하면서 신녕을 수복했다.

일본군 116사단은 상황이 극도로 안좋아지자 5월 1일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했고 120연대와 133연대가 퇴각로를 확보하기 위해 청암, 철산에서 국민혁명군을 잇달아 공격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 57사단 170연대가 이들의 15차례에 걸친 공격을 모조리 막아냈고 청암에서만 적군 1600여 명을 사살했다. 이로 인해 116사단은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5월 4일, 109연대를 구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우치다 긴노스케 사단장은 지금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116사단 전체가 전멸할 가능성이 크다며 상부에게 철군을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는 동시에, 그는 116사단 전체에게 철수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5월 6일, 장제스는 허잉친에게 총공격을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장제스가 허잉친에게 보낸 전보는 일본군 정보부에게 포착되어 오카무라 야스지 중국 방면군 총사령관에게 전해졌다. 야스지는 상황이 이토록 안좋아진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5월 10일, 우치다 사단장은 116사단 전군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에 116사단은 즉각 월계에서 후퇴하여 동구현 부근으로 향했다. 이때 109연대가 우치다 사단장에게 구원을 호소하자, 그는 군대를 다시 월계로 되돌린 후 109연대를 구원하게 했다.

국민혁명군 제4전구 사령관 왕야오우는 일본군의 이같은 움직임을 확인하고 74군과 18군을 동구현으로 파견해 116사단의 철수를 막게 했다. 또한 100군에게 먼저 109연대를 섬멸한 후 일본군 116사단을 몰아붙이라고 지시했다. 이때 58여단과 34사단은 완전히 궤멸되거나 격파되었으며 47사단과 64사단은 적과 교전하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에, 116사단은 스스로 생존할 길을 열어야 했다.

한편, 109연대는 10여 일동안 100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공격당해 사상자는 70%가 넘었으며 천여 명의 잔여 병력이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다. 109연대장은 더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민혁명군에게 투항하려 했다. 그러나 100군은 이들이 거짓 항복하려 한다고 여기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12일, 100군은 총공격을 개시하여 먼저 중포로 포격을 제압한 후, 다시 중형 박격포로 정밀 타격했다.포격 이후 2개 사단 국민혁명군 장병들이 돌격했다. 일본군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중국군이 미제 무기들을 동원해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이니 밀릴 수밖에 없었다. 109연대는 저항할 힘이 없어 진지가 곧 몇 동강이 났고, 대다수 진지의 사병들은 조금 더 저항하다가 거의 괴멸되었다. 결국 5월 13일, 109연대는 완전히 궤멸되었고 사부로 유지 연대장을 비롯한 대다수 병력이 전사했다.

5월 10일, 국민혁명군 제 74군 제 58사단은 동구현으로 진입해 동구현 외곽에 주둔한 일본군과 교전했다. 이와 동시에, 18군 1개 부대는 백마산과 산채시를 수복하고 산문을 공격하여 적의 퇴로를 봉쇄하고자 했다. 일본군은 이 상황을 인지하고 즉시 주력군을 산문과 동구현으로 보내 이를 저지하게 했다. 5월 10일 18군 제11사단 32연대가 산문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116사단 본부의 지원을 받고 반격에 나섰지만 32연대에 의해 모조리 격퇴되었다. 5월 13일, 32연대는 산문을 수복하고 말 300여 필을 노획했으며 적병 천여 명을 사살했다.

한편, 74군 임시 6사단은 5월 12일에 동구현 외곽의 모든 일본군 기지를 점령했다. 이후 4전구 사령관 왕야오우는 군대를 하루동안 휴식시킨 후 일본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실수였다. 일본군 116사단은 적이 공세를 멈춘 틈을 타 서둘러 퇴각했다. 제4전구는 뒤늦게 산문을 점령한 후 일본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지만 이 정보를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74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5월 13일, 74군은 동구현을 공격하여 겨우 5시간만에 수복했다. 이때 동구현을 점령한 6사단은 보병연대 2개, 공병연대 3개, 포병연대 2개, 기병연대 1기를 포함한 116사단이 동쪽으로 도주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6사단은 병사들의 피로를 무릎쓰고 곡바로 추격했지만 후방 방비를 담당한 일본군에게 차단당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74군 군장 시중성(施中誠)은 모든 기동 부대에게 적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중국 항공기 35대도 파견되어 일본군에게 폭격을 떨어뜨렸고, 중국군은 116사단 후미의 천여 명을 섬멸했다. 그러나 국민혁명군은 116사단을 완전히 전멸시킬 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에 아쉬워했다.

4.6. 국민혁명군의 반격

116사단이 도주하는 동안, 국민혁명군은 아직 후퇴하지 못한 적들을 계속 쳐부셨다. 일본군 34사단은 가까스로 도주한 잔여 병력을 받아들여 전력을 어느정도 회복했다. 이후 34사단은 철수를 개시하려 했지만 그러려면 부용산맥을 넘어야 했다. 이에 34사단은 217연대를 파견해 부용산을 공략하게 했다. 217연대는 5월 20일 116사단 120연대와 133연대, 기타 2천여 명의 증원을 받고 21일 새벽에 부용산의 사자 바위 고지를 공략하기 위해 천명이 넘는 부대를 파견했다. 수비대는 즉각 반격했고 중국 공군 항공기 10대도 일본군에게 소사를 가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5월 21일 밤, 217연대 전체가 강을 건너 사자바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자바위 요새는 일본 포병 사격에 의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고, 수비군은 몇시간 후 부용산 후방 기지로 퇴각했다. 5월 22일 새벽, 일본군은 12개의 박격포 외에 4개의 산포대와 4개의 보병대를 사자 바위로 이동시켰다. 이후 화포의 준비를 완료한 일본군은 다시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무려 2,000발 이상의 포탄을 발사해 부용산 요새를 절반 이상 파괴했고 지뢰를 제거해 진군로를 개척했다. 뒤이어 일본군 1개 대대가 부용산 진지를 공격했지만 수비군은 힘을 다해 저항했다. 일본군은 10번에 걸쳐 돌격했지만 결국 진지를 빼앗지 못했다.

1945년 5월 22일 밤. 일본군 제 217연대 예하 1000명이 야습을 개시했다. 이때 부용산의 3개 진지를 사수하는 병력은 불과 200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30미터 폭의 지뢰밭 및 2개의 철조망을 세우고 일본군에게 맹렬히 저항했다. 탄약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접근해왔을 때 수류탄을 던지고 백병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6차례 공격해 가까스로 공략에 성공했지만 돌격 지휘를 맡았던 한 중대장이 포탄 한발에 맞아 사망하고 병사들은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이후 일본군은 부용산의 대다수 지역을 점령했다. 그때 74군 제 6사단 1개 부대가 도착하여 일본군은 공격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앞서 점령했던 3개의 고지대 진지에서 저항했으나 패배한 후 후방으로 퇴각했다. 일본군 제2대대 300명은 국민혁명군에게 포위되어 2시간 동안 전투를 치른 끝에 83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소로를 통해 패주해 6사단 1기병연대의 추격을 받았다. 2대대 잔여병들은 쯔수이 강변에 이르러 강을 건너 도망치려 했으나, 6사단 기병대가 그전에 도착했다. 2대대 병사들은 물에 몸을 던져 도망쳤는데 익사자와 물 속에서 사살된 자는 100명이 넘었고 수십 명만이 가까스로 강 건너편으로 도주했다. 이 시점에서 사흘에 걸친 부용산 전투는 일본군의 참패로 끝났다.

이후 국민혁명군은 적을 매섭게 추격해 상당한 포로를 획득했고 6월 7일에 추격을 중지했다. 이로서 샹시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국민혁명군은 샹시 전투에서 2만 66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중 7,737명(군사관 823명 포함)이 전사했다. 일본군의 손실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본정부는 처음에 공식적으로 11,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중 5천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나중엔 15,000명이 "질병으로 인해" 사상되었다고 발표했으며 이 질병으로 인한 희생자와 앞서 발표했던 11,000명의 사람들이 겹치는 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는 일본군이 이 전투에서 1만 5천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국민정부의 전과 발표 역시 과장된 것이 아닌 지 의심을 사고 있다. 국민정부는 전투 종료 후 36,358명의 일본군을 사상시켰고 그중 12,498명을 전사시켰고 장교 247명을 체포했으며 화포 24문, 소총 1,300대, 기관총 100개, 말 347마리를 탈취했다고 주장했다. 노획 장비 및 말의 경우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역사가들은 국민정부의 적병 사살 및 사상자 숫자는 다소 과장되었다고 보며, 샹시 전투에서의 일본군의 사상자는 2만 7천명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한편 일본 제1국의 전후 복구에 관한 보고서에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 1945년 3~6월까지 중국 전선에서 확인된 전사자 수는 15,000건 이상이며 부상자 수는 5만명을 상회했다. 이 숫자는 샹시 전투와 함께 치러졌던 위시-어베이 전투를 포함한 일본군 20군전체의 사상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샹시 전투에서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일본이 샹시 전투에서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동 시기에 함께 치러진 위시-어베이 전투는 비록 최종적으로 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목표지인 랴오허커우 공략 및 비행장 파괴는 달성했다. 그러나 샹시 전투는 목표지로 삼았던 즈장 근처엔 가지도 못하고 막대한 인명 피해만 입고 완패당하고 말았다. 이로서 일본군은 더이상 공세를 개시할 여력을 상실해버렸고 중국 전선은 일본이 8월 15일 항복할때까지 교착 상태가 되었다.

6. 참고 문헌


[1] 7,817명 전사[2] 12,498명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