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8:58:45

삼성동 토성

삼성리 토성에서 넘어옴

파일:삼성리토성 표지석(강남문화원 제공).jpg
영동대로변에 위치한 표지석.

1. 개요2. 학설
2.1. 위치에 관한 이견
3. 발굴 조사4. 보고서 및 연구자료5. 같이 보기6. 기타

1. 개요

파일:삼성동토성위치.jpg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일대에 위치한 삼국시대 토성 유적. 과거에는 삼성리 토성으로 불렸다. 한성백제 시기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있다. 경기고등학교의 이전과 함께 강남과 잠실 개발이 시작되어 많은 부분이 파괴되는 바람에 현재 남은 부분은 거의 없다. 해발 60m 남짓한 경기고등학교봉은사 일대 구릉지와 동북쪽 한강 면에 접한 해발 70m의 청담배수지공원(삼성배수지) 구릉에 잔존 토성벽의 흔적이 남아있거나 추정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1982년까지 성벽이 일부 잔존했다고 전한다.

파일:경기고등학교(1990).jpg
1990년 촬영한 경기고등학교ㆍ봉은사 일대 전경 [1]

파일:경기고1.jpg [2]

파일:삼성배수지1.jpg
舊 청담배수지공원, 現 삼성배수지 (삼성ㆍ봉은배수지). 과거 해발 83m에 달하는 구릉지였으나 1979년에 '청담배수지'로, 2013년에 '삼성배수지'가 들어서며 공원화 되어 현재는 해발 70m 높이로 삭평되었다.[3] 배수지를 지으며 원지형을 크게 훼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어[4] 기대를 받았다. 인근에서 가장 고지대이며 구릉 사면부에 봉은중학교봉은초등학교가 위치한다. 학교 부지도 토성 범위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동토성은 조선시대부터 한성백제기의 토성으로 막연하게 인식되어 왔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쳐 일부 수습된 유물을 통해 그 존재가 알려졌다. 그러나 70~80년대 단 한차례의 고고학적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올림픽대로와 지하철의 개설, 경기고등학교의 이전, 봉은사 사역의 확대가 진행되었다. 청담배수지 일대의 경우에도 잠실 개발에 따라 토취장(土取場)이 되어 토성터에 대한 토취가 이루어지면서 토성의 80~90%가 멸실되었다. 그리고 청담배수지 조성, 봉은초등학교 및 봉은중학교 등이 들어서면서 현재는 거의 원형을 찾아 볼 수 없게 완전히 자취를 잃어버렸다.
< 최병식, 『서울 한강유역을 지켰던 강남 삼성동토성』, 강남문화원, 2019, p.203 인용 >
많은 사람들이 '수도산'을 봉은사 뒷산으로 일컬으나, 보고서에서는 삼성배수지를 수도산으로 일컫기도 한다. 이에 혼동의 우려로 이 문서에서는 수도산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다.

2. 학설

2.1. 위치에 관한 이견

파일:삼성동토성설1.png

파일:설2.png [6]

가장 큰 쟁점으로 여겨진 부분이다. 그간 개인 답사 정도에 그쳐왔을 뿐, 이렇다 할 만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강남 도시 개발이 시작되었고 이미 1500년이 흘러 성터로 전락한 토성은 영구히 파괴되어 흔적조차 사라졌다. 당시 성터를 관찰하고 자료로 남긴 사람은 일제강점기 연구자와 방동인(1974), 민덕식(1982)[7]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은 『2016년 삼성동토성 시굴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학자 간 위치 견해를 정리한 것이다.

민덕식은 논문(2013)에서 1982년 답사하며 보았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필자가 1982년 봄에 삼성동토성을 조사할 때는 남벽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당시 정상에는 청담배수지가 건립되어 있었고, 청담배수지가 있던 북벽 쪽은 이미 파괴되고 없었다. 동벽도 江邊二路(현 올림픽대로)를 만들면서 잘리어 없어지고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는데, 본래 동벽 밖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서벽은 건물을 짓기 위해 한창 파헤치고 있던 중이었다. 이곳 땅속에 묻혀있던 암반들이 파괴되어 널려 있었다. 본래 서벽 밑에는 암반이 갈려 있었던 것인데 건물의 지반을 만들기 위해 이 암반들을 파괴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남벽은 일부의 성벽이 남아 있었다. 남벽은 끝부분이 수직으로 절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벽 안의 상태를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필자는 이곳에 오래 거주하시던 노인 분들의 안내를 받아 없어진 성벽의 위치를 일일이 확인할 수가 있었다. 노인 분들의 증언으로는 북벽은 정상부 바로 아래 있었으며 북벽 밖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었고, 동벽은 강변2로가 지나가는 부분에 있었다고 하였다. 서벽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창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에 필자가 직접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때 남벽 안쪽 정상부 아래에는 판자집이 있었다. 성안에서는 이곳만 약간 편평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집이 들어선 것이다. 이곳에는 와편들이 산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옛 건물지도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우물도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으로부터 남벽까지는 꽤나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필자는 닥점마을로 하여 약간 골짜기를 이룬 남벽 중앙부를 통해 삼성동토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 길이 사람들이 삼성동토성 안으로 다니는 길이었다. 여기에 삼성동토성의 남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략)
1995년 6월에 삼성동토성을 다시 찾아가 보니 옛 모습은 완전히 없어져 있었다. 정상부의 청담배수지는 그대로 있었으나 성안에는 봉은중학교, 서쪽에는 힐탑빌라, 동심아파트, 북벽 밖으로는 청담배수지 입구시설,봉은초등학교, 홍실아파트 등 건물들이 들어차 있어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청담배수지를 기준으로 어렴풋이 윤곽을 가늠해 볼 수가 있었다.
< 민덕식,『서울 三成洞土城에 대한 연구』,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3, p.3~5 인용 >

종합하면 삼성배수지와 경기고 일대가 이어진 하나의 성이었거나, 삼성배수지와 경기고에 각각 독립된 성으로 존재했을 두가지의 가능성이 남는다. 강남문화원 발간자료에 후자의 입장을 취한 서술이 있다.
삼성동토성은 현재 성벽의 흔적이 멸실되어 현황을 찾아볼수는 없지만 연구결과에 따라 두 개의 토성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강안에 접하여 봉은증학교 일대에 축조된 토성과 남쪽 뒤에 경기고등학교가 있는 구릉을 감싸고 축조된 두 개의 토성이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강안성과 배후 구릉의 토축성의 배치는 도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과 동일한 형태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았을 때 삼성동토성은 한성백제기 풍납토성으로 진입하는 한강의 배후에 위치하여 최종적으로 도성을 방어할 수 있는 거점성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 최병식, 『서울 한강유역을 지켰던 강남 삼성동토성』, 강남문화원, 2019, p.159 인용 >

3. 발굴 조사

서울시가 한성백제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하여 2016년 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경기고등학교 일원의 구릉 사면과 봉은초등학교ㆍ청담배수지공원(삼성배수지) 일대 구릉을 트렌치 조사하였다. 이 중 경기고등학교 구릉 정상부는 대부분 훼손되어있었으나[9] 사면부에서 판축토루, 성토구조물 흔적이 담긴 유구층과 백제토기 파편 유물이 발견되었다. 1500년 백제성의 구전이 진실로 밝혀진 셈이다. 기대를 모았던 봉은초ㆍ청담배수지공원 일대는 이미 훼손이 심하여 발굴에 실패하였다. 시굴지에서 초기 철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파일:삼성동토성+1.png 파일:삼성동토성+2.png
파일:삼성동토성+3.png 파일:삼성동토성+4.png
성벽 잔존 구간 및 추정지 (봉은사, 경기고 사면1, 경기고 사면2, 삼성배수지)
[10]
파일:삼성동토성+발굴1.png 파일:삼성동토성+발굴2.png
파일:삼성동토성+발굴3.png 파일:삼성동토성+발굴4.png
2016년 시굴 조사 당시 작업 사진
[11]
파일:삼성동토성+학술1.png 파일:삼성동토성+학술2.png
파일:삼성동토성+학술3.png파일:삼성동토성+학술4.png
2016년 발굴 직후 학술 자문 회의 사진
[12]
발굴지 선정 및 시굴 트렌치, 출토유물 등 기타 상세사항은 아래 시굴조사 보고서의 IV. 조사내용 및 조사방법 참고

4. 보고서 및 연구자료

삼성동토성의 성지(城址)는 언주면 삼성리 봉은사 동북쪽에 있다. 총 길이는 170간(間)으로 높이 약 1간의 토루(土壘)가 산허리를 에워싸고 한강에 임하고 있다.[13]
-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1942) -
백제성 가에 풀과 나무 거칠어
천추의 지나간 자취를 어랑(漁朗)에게 물어보니
머리 돌려 흥망사는 대답 않고
앞 여울로 내려가며 저녁볕에 낚시하네”
- 저자도(楮子島),『南漢志』 -
백제성을 삼성동토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주류이다. 토성 추정지인 삼성배수지가 공원을 조성하며 토삭되었음에도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고지대임을 고려한다면 강 건너편 옥수동 강안에 위치했던 당시의 저자도에서도 충분히 보였을 것이다.



이 중 한성백제박물관 보고서와 강남문화원의 발간자료는 유사한 내용과 논조를 담고 있다. 시간이 없다면 택일하여 살펴보자.

5. 같이 보기

답사기 및 칼럼(기사)을 소개한다.

6. 기타


[1] #[2] #[3] 착공은 1977년/ 2011년[4] 출처: 삼성동토성 위치추정 연구(2016)[5] 이도학 주장[6] 출처: 삼성동토성 위치추정 연구(2016) / 2016년 삼성동토성 추정지 시굴조사 보고서[7] 1982년 개인답사 후 2013년에야 기억을 토대로 자료를 남겼다.[8] 민덕식은 이 논문에서 '방동인이 능선을 성벽으로 오해하였다'며 삼성배수지~경기고 포괄설을 일축하였다.[9] 학교 시설이 들어서 있는 부지이다.[10] 출처: 최병식, 『서울 한강유역을 지켰던 강남 삼성동토성』, 강남문화원, 2019, p.109~119 사진 인용[11] 출처: 2016년 삼성동토성 추정지 시굴조사 보고서, 한성백제박물관, 2018, p.151[12] 출처: 2016년 삼성동토성 추정지 시굴조사 보고서, 한성백제박물관, 2018, p.149~150[13] 1간은 180cm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