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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3:32:45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산티아고 카니사레스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사모라상.jpg
1992-93 · 2000-01 · 2001-02 · 2003-04
베스트팀
파일:유럽 축구 연맹 로고.svg
}}} ||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파일:카니사레스.jpg
<colbgcolor=#eee><colcolor=#000> 이름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Santiago Cañizares
본명 <colbgcolor=#fff,#191919>호세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루이스
José Santiago Cañizares Ruiz
출생 1969년 12월 18일 ([age(1969-12-18)]세)
스페인 마드리드
국적
[[스페인|]][[틀:국기|]][[틀:국기|]]
신체 181cm / 체중 79kg
직업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소속 유스 칼보 소텔로
레알 마드리드 CF (1985~1988)
선수 레알 마드리드 CF C (1988~1989)
레알 마드리드 CF B (1989~1990)
레알 마드리드 CF (1988~1992)
엘체 CF (1990~1991 / 임대)
CP 메리다 (1991~1992 / 임대)
RC 셀타 데 비고 (1992~1994)
레알 마드리드 CF (1994~1998)
발렌시아 CF (1998~2008)
국가대표 파일: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46경기 (스페인 / 1993~2006)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기록
4.1. 우승 기록4.2. 개인 수상
5. 사생활 / 은퇴 후

[clearfix]

1. 개요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스페인 출신의 골키퍼로, 발렌시아에서 최전성기를 보냈다.

2. 클럽 경력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마드리드 팬이자 마드리드 유스팀 선수로 성장하게 된다. 1988년에는 마침내 1군으로 승격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스타 군단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이제 막 유스에서 콜업된 풋내기가 주전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은 일이었고 엘체 CF, RC 셀타 데 비고와 같은 여러 중하위권 팀을 전전하면서 경험을 쌓아야만 했다. 그리고 1994년 마침내 친정팀이었던 레알로 복귀하지만 이 시기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 수문장 자리는 전차 군단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던 백전 노장의 보도 일그너. 일그너와의 치열한 주전 경합 끝에 마침내 97-98시즌 주전 자리를 차지하는 듯 싶었지만[1], 정작 그 시즌의 꽃이라고 할 수 있었던 유벤투스 FC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주전으로 나선 것은 보도 일그너. 그리고 그 시즌이 끝난 후 카니사레스는 결국 발렌시아로 이적한다.

2.1. 발렌시아 CF

그리고 이적한 발렌시아에서 마침내 카니사레스는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대폭발시킨다! 두 차례의 라리가 우승과 슈퍼컵 우승, 그리고 두 차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2]까지 카니사레스는 찬란했던 발렌시아의 전성기를 주역으로 함께 한다.


[3][4]

이후에도 발렌시아에서 쭉 선수생활을 지속하던 카니사레스는 2000년대 중반이 되면서 바르샤와 레알의 리그 독점이 시작되어도 계속해서 주전으로 남아 발렌시아의 상위권 유지에 힘을 보탰다.

비록 나이가 30대 후반이었어도 수준급의 선방과 안정감을 보여 발렌시아 팬들에게는 카시야스보다 더욱 좋은 골키퍼라 불렸다.

하지만 2008시즌을 끝으로[5] 39살의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쿠만 부임 전까지 라리가 최고의 골키퍼 중 한명이었다가 감독 잘못만나 그대로 은퇴했으니 발렌시아 팬입장에선 쿠만은 말 그대로 원수일 것이다.

이후 카니사레스가 은퇴하고 나서 발렌시아는 한동안 대체 골키퍼를 찾는데 고생하며 힘을 쓰게 된다.

3. 국가대표 경력

1993년 11월 덴마크와의 월드컵 예선 경기서 처음 선출된 이래[6] 카니사레스는 2006년까지 13년의 세월을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과 함께 한다. A매치는 총 46경기 출전.

각각 세 차례의 FIFA 월드컵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에 출전하지만 주로 서브골키퍼의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때 주전이던 안도니 수비사레타 대신에 나간 한국과의 첫 경기에서 2실점으로 2대 0으로 앞서가던 경기를 무승부를 거둔 것을 시작으로 월드컵과 인연이 없는 편. 특히나 2002년 한일 월드컵때가 특히나 카니사레스 본인에게는 아쉬웠을텐데, 주전 골키퍼로 낙점을 받은 상황이었지만 대회 직전 집에서 실수로 향수병을 떨어뜨렸는데 누가 축구 선수 아니랄까봐 순간적으로 깨지면 파편들이 튀어 상처입을까 그 향수병을 주발로 트레핑 해버려 힘줄을 다치는 어처구니없는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아야만 했다.[7]

덕분에 당시 21살이었던 이케르 카시야스가 혜성같이 등장. 사실 카시야스는 20살도 안 된 나이에 챔피언스 리그 결승을 뛰는 등, 엘리트 코스를 걷던 선수였지만, 2002년 월드컵 직전 시기만 보면 클럽에서는 세자르와 힘겨운 경쟁을 하고, 대표팀에서는 카니사레스에 확실히 밀려 있는 백업이었다. 카시야스가 본격적으로 도약한 계기가 카니사레스가 부상당한 2002년 월드컵부터였던 걸 생각하면 저 부상을 계기로 스페인 국가대표팀의 골키퍼 세대교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4. 기록

4.1. 우승 기록

4.2. 개인 수상

5. 사생활 / 은퇴 후



[1] 리그 38경기 중 28경기에 선발로 출장[2] 99-00, 00-01 두 시즌 연속으로 결승에 나가지만 첫 번째 도전은 친정팀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두 번째 도전은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저지당한다.[3] 이 영상은 뮌헨과 발렌시아의 00-01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하이라이트이다. 보면 알겠지만 이게 경기 하이라이트인지 골키퍼 하이라이트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카니사레스와 올리버 칸 두 레전드 골키퍼들의 거의 일기토 수준의 선방쇼였다.[4] 승부차기 패배 직후 눈물을 쏟은 카니사레스를 올리버 칸은 자신이 98-99 시즌 겪은 캄프 누의 비극을 떠올리면서 위로해주는 등 여러모로 훈훈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캄프 누의 비극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한 이유는 이때 경기 15분전 카니사레스의 모친의 부고가 전해졌고, 올리버 칸이 이를 위로해주던 것이었다.[5] 이 시즌 발렌시아 감독을 맡은 로날드 쿠만이 카니사레스의 훈련참가를 금지시켜버리는 등 꽤나 심적으로 고생했던 것도 은퇴의 한가지 이유로 보인다.[6] 주전 골키퍼인 안도니 수비사레타가 퇴장을 당하면서 필드로 들어갔다.[7] 여담으로 한국과 스페인의 8강 경기 때도 관중석에 앉아 초조하게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경기를 중계하던 신문선 해설위원이 카니사레스를 못알아보고 그냥 스페인 관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