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사키 바트만 Saartjie Baartman | |
이명 | 사라 바트만 Sarah Baartman |
출생 | 1789년 |
케이프 식민지 이스턴케이프 주 감투스 강 유역 | |
사망 | 1815년 12월 29일 (향년 26세) |
프랑스 왕국 파리 | |
신장 | 150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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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아프리카(현재 나미비아 지역) 출신의 코이코이족[1] 여성으로, 유럽에 끌려가 인종 전시[2]를 당한 인물이다.일명 '호텐토트의 비너스'라고도 불렸는데, 여기서 '호텐토트'는 네덜란드인들이 코이코이족의 언어인 나마어의 흡착음을 모방해 만든 말로, 코이코이족에 대한 차별적, 모멸적인 의미가 담긴 멸칭이다.
2. 불행한 일생
비너스라는 별명과는 달리 일생이 불행 그 자체였던 인물이었다. 원래는 남아프리카의 평범한 코이코이족 소녀였으나 15살이 되던 해 유럽인들의 침략으로 코이코이족 대다수가 몰살당했고 그녀 역시 영국에 팔려와 동물원의 동물 취급을 당했으며 광장, 대학, 서커스 등에서 알몸으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세례명이자 부르기 쉬운 '사라 바트만'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렸다. 그런데 영국은 혁명으로 인권단체들의 노예제 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기에 결국 아직 노예제가 합법이던 프랑스로 팔려나가게 되었다.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들자 알콜 중독에 빠지고 매춘부가 되어 불행한 삶을 살았으며, 그 과정에서 얻은 성병으로 향년 26세 전후의 나이로 요절했다. 즉 유럽인들에 의해 강제로 유럽으로 끌려가 비참하게 살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죽고 만 것이다.문제는 죽은 뒤에도 그녀의 불행이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은 그녀가 사람이 아닌 동물이라며 해부했으나,[3] 장기가 보통 유럽인과 똑같아서 사람이라고 판별되었다. 그럼에도, 골격과 성기, 뇌 등의 내장을 들어내고 연구 대상으로 삼거나, 해부 전 시체를 석고틀에 찍어낸 후 석고상으로 만들어 1974년까지 박물관에 전시했다.
참고로 바트만을 해부한 사람은 프랑스 동물학자 조르주 퀴비에(1770~1832)이다. 고생물학에서 엄청난 공로를 남겼으나 인종차별주의자이고 백인 외 사람을 짐승이라고 여겨왔으며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부정하여 종의 불변을 고집하고 "천변지이설"을 주장하였다. 심지어, 라마르크의 장례식에 나와 그는 틀리고 내가 맞았다고 고인모독 조사를 읊다가 분노한 라마르크의 아들딸들에게 욕설을 듣기도 했다. 퀴비에는 흑인은 백인과 다른 짐승이라고 자신했다가 바트만을 해부하곤 실망하듯이 '흑인도 백인이랑 장기와 모든 것이 똑같다....'라며 마지못해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이 소식이 알려진 이후 모든 국가의 인권단체들을 중심으로 유해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반환하라는 시위가 일어났으나 프랑스는 '타국에서 유입된 유물은 프랑스 소유'라는 관련 법규를 근거로 거부했다. 그러나 인권단체들은 "사람의 신체는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다"는 다른 법 규정을 들며 항의를 계속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던 넬슨 만델라까지 합세하여 여론이 프랑스에게 불리해지자 결국 2002년 5월에 시신이 반환되어 매장되었다.
결국 그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비참하게 백인들에게 유린되며 다시는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다 이국에 오고 200년, 죽은 뒤 170년이 지나 인권단체들의 도움 끝에 고향으로 돌아와 안식을 찾은 것이다.
3. 그 밖에
비슷한 삶을 살았던 인물로는 '늑대인간 여인' 이라 불렸던 멕시코 여성 훌리아 파스트라나가 있다. 훌리아는 원래 멕시코 원주민 출신으로 다모증과 잇몸증식증으로 유인원 여성이라 불렸다. 그러다 테오도르 렌트라는 이름의 미국인 기획자와 결혼하여 세계를 돌며 사람들에게 자신을 전시해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얻은 아들은 어머니와 같은 질환을 앓다가 곧 죽었으며, 훌리아 역시 산후 후유증과 아이를 잃은 상실감으로 인해 26세를 일기로 요절한다.[4] 그러나 사키 바트만과 마찬가지로 훌리아의 시신 역시 아이와 함께 방부처리되어 구경거리가 되었으며, 노르웨이의 대학으로 보내졌다가 1876년에 용기가 파손되면서 아들의 미라는 파괴되었고 그녀 역시 잠시 행방불명되었다. 사후 153년이 지난 201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국 멕시코로 돌아가 매장되었다. 게다가 훌리아는 유달리 총명하여 다국어까지 가능하고 사교성도 좋은 여성이었지만 테오도르로 인해 인생이 막장이 되었다. 이후 테오도르는 제노라란 다모증 여성을 전시하다 정신착란으로 죽게 된다.로버트 피어리 항목에 나오듯이 미국도 이런 일을 벌인 적이 있다. 20세기 초반에 이누이트 여러 명을 속여 데려와서는 동물원 구경거리로 팔아먹고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을 박제하여 역시 구경거리로 만들었던 것. 이들은 처음 미국 땅을 밟은 지 90여년이 지난 1997년에서야 고향에 묻힐 수 있었다.
이른바 문명인들의 이런 야만적인 짓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별명 '엘리펀트 맨'으로 유명했던 조셉 메릭도 한동안 이런 구경거리가 되어 고통받았고, 심지어 1907년 일본에서 열린 도쿄 권업박람회에는 조선인 두 명이 '동물'로 전시되었던 일도 있었다.
이게 또 오래전 이야기도 아니다. 1958년에 콩고나 르완다 같이 벨기에 식민지이던 곳의 흑인 아이들을 벨기에에서 동물원의 동물처럼 전시했던 게 당당하게 사진에서 기록에 남아있다. 결국 엄청난 비난을 받고 사라졌지만 말이다.
심지어 2010년대에도 이와 비슷한 행태가 나타났다. 인도 안다만 제도에서 현지인을 관람하는 사파리 상품 버스를 운영했던 것. 현지 거주민들은 "사파리? 우리가 짐승이냐?" 라며 분노했고, 국제적으로 보도가 되자 인도인들을 저렇게 구경거리로 대하던 영국을 따라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시신을 방부처리하고 전시물로 써먹는 야만적인 관행은 엘머 맥커디 같은 사례에서 보듯이 같은 백인을 대상으로도 자행되었다.
2010년 가장 따뜻한 색, 블루 감독인 압델라티프 케시시가 블랙 비너스라는 제목으로 바트만의 삶을 영화화했다.
4. 같이보기
[1] 코이코이는 코이코이족 말로 '인간'이라는 뜻이다.[2] 사라 바트만의 사진이나 그림을 봐서 알수있지만 엉덩이가 굉장히 컸다. 코이코이족들은 성장하면서 둔부가 거대해지는 둔부지방경화증을 가졌기 때문이라는데 이 때문에 당대의 관심을 굉장히 받았다. 당시 유럽인들은 흑인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았고, 비대한 유방과 엉덩이를 과도하게 쌓인 성욕 때문이라고 해석했다.[3] 당시 프랑스 인류학자들은 사라가 인간 서열 내에서도 가장 등급이 낮은 칸 계열이라고 판단해 사라를 기준으로 '인간이 멈추고 동물이 시작되는 지점'에 대한 인간 연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훌리아는 선천적으로 자궁이 좁은 편이라 아이를 갖기가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