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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5-25 23:33:38

사누르

파일:사누르 팔레스타인.png
마르즈 사누르에서 바라본 모습
파일:사누르 1.jpg
자라르 가문의 궁전 유적

1. 개요2. 역사
2.1. 자라르 가문의 거점2.2. 근현대

1. 개요

아랍어: صانور
영어: Sanur / Sanour

이스라엘 북부의 도시. '산누르'로도 표기된다. 나블루스에서 북쪽으로 20km, 제닌에서 남서쪽으로 15km 떨어진 언덕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5천명으로, 전부 무슬림이다. 오스만 제국 시기 현지 호족인 자라르 가문의 거점이었고, 자히르 알 우마르제자르 파샤 등의 포위를 견뎌낸 천혜의 요새로 명성을 알렸다. 동쪽과 남쪽에 펼쳐진 마르즈 사누르 (마르즈 알 구루크)에서 농사가 잘 되며, 동쪽의 도시인 메이탈룬과 인접해 있다. 인근에 이스라엘의 정착촌인 사-누르가 있어 현지인들과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2. 역사

언덕 경사면에서 청동기 시대의 저수조, 도자 파편,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마을이 있었고, 오스만 제국기인 1596년 기준 23가구가 거주했다. 주민들은 1/3의 세율로 매년 5200 악체의 세금을 냈다.

2.1. 자라르 가문의 거점

파일:산누르 성벽.jpg
사누르 요새

18세기 들어 사누르를 기반으로 한 자라르 가문은 제즈릴 협곡 (마르즈 이븐 아메르)과 나자렛, 제닌, 랏준 일대를 영지로 얻었다. 자라르 가문은 다른 팔레스타인 내륙의 소도시들과 달리 성벽을 완전히 둘렀다. 1730년대 들어 자이단 가문의 자히르 알 우마르갈릴리 지역을 통합해가자 이브라힘 자라르는 바니 사크르 베두인들과 연합해 맞섰으나 패해 전사했다. (1735년) 자히르는 패주하는 자라르 군대를 추격해 사누르에 이르렀으나 요새의 험준함에 공력하지 않고 돌아갔다. 다만 제즈릴 협곡과 나자렛은 자히르의 영토가 되었다. 1764년에는 다마스쿠스 총독 우스만 파샤가 사누르를 포위했으나 무함마드 자라르의 저항에 막혀 철수했다.[1]

1785년 유수프 자라르는 사누르의 성벽을 더욱 증축했다. 따라서 1790년 (혹은 1795년) 제자르 파샤가 사누르를 포위하고 대대적으로 포격했으나 유수프 자라르는 50일 넘게 버텼다. 이에 제자르 파샤는 땅굴을 통해 성벽을 폭파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포위 진영에 더 큰 피해가 발생하자 철수했다. 그리고 1830년 압둘라 파샤가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자라르 가문을 응징하기 위해 레바논 아미르국의 바쉬르 2세가 보낸 병력과 함께 사누르를 포위했다. 3개의 포대에서 포격이 지속된 4개월 간의 포위 끝에 성벽이 허물어지자 도시는 끝내 함락되었고, 약탈 후 성벽과 성탑 대부분이 허물어졌으며 압둘라 파샤는 보복으로 인근 올리브 나무들까지 베었다.

2.2. 근현대

파일:사누르 요새.jpg
1908년의 사누르

1840년에는 무함마드 알리 왕조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가 사누르를 포위, 포격했다. 성벽의 파괴 후에도 28개의 마을을 통치하던 자라르 가문의 권력은 서서히 약화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지역 유지 정도로 남았다. 1882년 기준 인구는 3백명 정도였고, 1931년 기준 759명이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시에 봉기군 지도자 압둘 라힘 알 핫지 무함마드가 사누르에서 영국군과 교전 중 전사했다.[2] 1945년 기준 인구는 1020명이었고, 1961년 1471명으로 늘었다. 오슬로 협정으로 사누르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전권을 갖는 A구역이 되었다. 이에 따라 1987년에 세워진 이스라엘의 정착촌이 2005년에 철수했지만, 2026년에 재설치 되었다.


[1] 이후 자라르 가문은 자히르와 협조한다[2] 그의 시신은 사누르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툴카름 인근의 딘니바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