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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virtuoso/virtuosa [1]이탈리아어로 '덕이 있는'[2]이라는 뜻의 형용사이다. 17세기부터 특별히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는 학자나,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는 음악가들에게 사용되었고 현재는 주로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는 거장 음악가들에게 사용된다.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같은 '전문 연주자'는 20세기 중반 이후가 되어서야 형성된 개념으로, 그 전에 살았던 음악가들은 작곡도 기본적으로 병행했기 때문에 해당 악기의 전공자들에게는 '이 양반들이 후대 생각은 안 하고 힘든 곡을 만들어놨다'는 원망 섞인 드립을 좀 듣긴 한다. 미디어 믹스에서는 음악가가 아니어도 '거장' 칭호를 붙일 때 사용하곤 한다.
2. 이 칭호를 가진 음악가들
2.1. 바이올리니스트
- 피에트로 로카텔리
바이올린 비르투오소를 논하자면 빠지지 않는 파가니니 이전, 바로크 시대 말기에 살았던 바이올리니스트자 작곡가로, 안토니오 비발디의 후배로서 바이올린 테크닉에 대해 상당한 진척을 보였던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 중 12개 협주곡집 "바이올린의 기법"은 바로크 시대 바이올린 곡들 중 가장 어렵다고 여겨지며, 로카텔리 문서에서 소개된 협주곡 12번 중 카프리치오 23번을 현대적인 기보법으로 풀어서 작성된 악보 사진을 보면 정녕 사람이 연주 가능한 곡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난도가 상당히 높다.
- 지오바니 바티스타 비오티
- 니콜로 파가니니
굉장히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리스트 등의 후대의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에 대한 일화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활 대신 나뭇가지를 사용해 곡을 연주했다던가, 현 하나로 곡을 연주했다던가 하는 뛰어난 기교를 나타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당대에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 때는 비르투오소라는 표현이 파가니니만을 가리키는 것인 적도 있었을 정도.
- 루이스 슈포어
니콜로 파가니니의 동시대에 독일에서 활동[3]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로서 활동 당시 파가니니의 라이벌로 꼽혔다.[4] 파가니니와 달리 제자 양성 및 바이올린 기교의 개혁에 힘을 쏟았으며, 그 과정에서 현대적인 턱받침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음악적으로는 바이올린의 기교보다는 선율을 중시하였으며 본인의 작품에도 그러한 점이 반영되었다. 지휘자로도 활동하여 현대적인 지휘봉을 이용한 지휘법을 처음 시도하였다. 작곡가로서는 독일 낭만파의 태동을 이끈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5][6]
- 요제프 요아힘
헝가리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동시대 활동한 사라사테의 라이벌로 꼽혔다. 12세의 나이에 베토벤 사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던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멘델스존의 지휘로 연주함으로서 그 가치를 재발견하게 하였으며[7] 이후 독일에서 활동하며 브람스와 친한 친구로 지내며[8]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초연하기도 하였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도 이 사람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것. 슈포어가 현대적인 턱받침을 고안했다면, 요아힘은 그것을 사용하여 바이올린을 턱을 사용하여 강하게 고정시키는 연주법을 정착시켜서 현대 바이올린 주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4대 바이올린 협주곡'[9]을 언급한 사람이기도 하다.
2.2. 피아니스트
- 프란츠 리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피아니스트. 그의 곡을 쳐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파가니니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맞은 이후 20년 간 작곡한 곡들에서 상당히 과시적인 패시지가 많은 기교적인 곡을 많이 작곡하였다. 대표적으로 초절기교 연습곡(S. 139)이나 파가니니 대연습곡(S. 141)의 라 캄파넬라 같은 곡들에서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10]
-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가늘고 긴 손가락과 뛰어난 유연성[11]을 바탕으로 뛰어난 기교를 보여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그 역시 기교적으로 난해한 곡을 많이 작곡하였는데 소나타 2번이나, 피아노 협주곡 3번 등은 피아니스트들조차 기교적으로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한다.
- 마르크앙드레 아믈랭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 등의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의 계보를 잇고 있는 아믈랭은,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가 슈퍼 비르투오소(Super Virtuoso)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을 정도로 상당히 어렵고 난해하다고 알려진 미지의 곡들을 깔끔하게 연주, 발굴한 것으로 유명하다. '12개 단조 연습곡'을 포함한 그의 곡들도 마찬가지라서, 심하게 까다로운 기교를 요구함과 동시에 근현대 특유의 음악적 난해함과 더해져 기존과는 차원이 다른 고난도 곡을 다수 작곡했다.
- 조르주 치프라
바로 위의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이 그동안 덜 알려져 있었던 여러 작곡가들을 발굴해 연주한 것과 달리, 치프라는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로 불러도 상관 없을 정도로 리스트 전문 비르투오소였다. 한편으로는 "반음계적 대 갤럽(S. 219)" 1964년 도쿄 연주와 같이 엄청난 기교를 동원해 청중들의 탄성을 일으키는가 하면, "순례의 해" 혹은 오페라를 기반으로 하는 편곡들과 같이 서정성도 요구하는 곡들 역시 수려하게 연주했다. 그렇지만 그의 진가는 바로 그의 즉흥 연주 및 편곡에서 볼 수 있는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이 매서운 옥타브 교대 연타 기교로 인해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하차투리안의 칼춤, 로시니의 기욤 텔(윌리엄 텔) 서주,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 올림다 단조판 등이 유명하다.
- 마르타 아르헤리치
젊은 시절부터 매우 탁월한 기교로 유명해졌고, 특히 옥타브의 속도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빠른 해석으로도 악명이 높다(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 쇼팽 전주곡 Op. 28, No. 16 등). 나이가 들면서 음악성까지 함께 성숙해지는 피아니스트의 일반적인 일명 '노화의 효과'를 거치면서도 젊었을 적 기교까지 잃지 않고 간직한 덕분에, 서술 시점인 2024년 5월 기준 82세인 아르헤리치는 노익장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으며, 여전히 '여제'라는 칭호가 계속 따라다닌다.
[1] 전자는 남성형, 후자는 여성형 단어.[2] 영어의 'Virtue'와 어원이 같다.[3] 독일식 이름인 Ludwig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4] 실제 두 명은 같이 연주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5] 그러나 당대에 작곡가로서 베토벤의 후계자, 혹은 능가할지도 모른다고 여겨지기도 할 정도로 높게 평가받은 것에 비해 현대에 와서는 거의 완전히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것이 무색하게도 바이올린 작품보다는 클라리넷, 하프 등 다른 악기를 위해 작곡한 작품이 그나마 연주되는 수준이다.[6] 생전 베토벤을 매우 존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런 와중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엄청 비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정확히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이후의 후기 작품을 싫어하여 많은 비판을 했다고 한다. 반면에 바그너의 작품은 높이 평가하여 손수 지휘하여 무대에 올리기도 하였다. 슈포어 등의 혹평 때문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래의 요아힘(그리고 멘델스존)에 의해 재발굴되기 전까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7] 현재까지도 널리 연주되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의 카덴차를 작곡하기도 하였다.[8] 브람스를 스승인 슈만에게 소개한 것이 바로 요아힘이었다.[9] 베토벤, 브람스, 브루흐,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10] 이 둘은 그나마 개정 후라서 난이도가 하락한 것이지, '라 캄파넬라'의 원류가 되는 "'작은 종'에 의한 대환상곡(S. 420)", 개정 전 초절기교 연습곡(S. 137) 등 1830년대 작품들은 그야말로 피아노의 파가니니와도 같은 악보 상태를 보인다. 1996년 4월 16일 리스트의 곡으로만 프로그램을 설계해 리사이틀을 연 마르크앙드레 아믈랭조차 S. 136, No. 11을 연주하기 이전 "1838년판(S. 137)은 연주가 불가능하다(unplayable)."며 혀를 내둘렀다.#[11] 13도라는 어마무시한 크기부터 CEGCE 화음을 23451로 짚어 연주했다는 설까지 있을 만큼 인간이 아닌 듯한 손을 지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