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브로르 라르스 아스틀레위 멜베리 (Bror Lars Astley Mellberg) |
생년월일 | 1923년 12월 9일 |
사망년월일 | 2004년 9월 8일 (향년 80세) |
국적 | 스웨덴 |
출신지 | 암비에르뷔 |
포지션 |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
신체조건 | 175cm | 74kg |
소속팀 | 칼스타드 BK (1947-1949) AIK 포트볼 (1949-1950) 제노아 CFC (1950-1952) 툴루즈 FC[1] (1952-1953) 레드 스타 FC (1953-1956) FC 소쇼몽벨리아르 (1956-1957) AIK 포트볼 (1957-1961) |
국가대표 | 6경기 2골 (1949-1958) |
[clearfix]
1. 개요
스웨덴의 전 축구 감독.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멜베리는 어린 시절에 암미에르뷔에서 축구와 스키를 병행했다.1947년, 멜베리는 칼스타드 BK에서 데뷔했고 칼스타드에서 2년을 보냈다. 1949년에 AIK 포트볼로 이적한 멜베리는 AIK에서 첫 시즌부터 21경기에서 15골을 넣었고 1950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스웨덴 대표팀 동료였던 스텔란 닐손과 함께 세리에 A에 진출했다.
멜베리와 넬손의 행선지는 제노아 CFC였다. 이적 첫 시즌에 멜베리는 13골, 닐손은 10골을 넣어 해당 시즌에 각각 팀 내 득점 1, 2위에 랭크되었지만[3] 제노아는 리그 꼴찌로 강등당했다.
1951-52 시즌을 세리에 B에서 같이 보내고 그 둘은 제노아를 떠났다. 멜베리는 디비지옹 2의 툴루즈 FC로 이적했고 이적 시즌에 디비지옹 2 득점왕이 되었다. 팀도 디비지옹 1으로 승격이 확정적이었지만 부패 스캔들로 인해 회장과 감독이 실격되었다. 멜베리도 툴루즈를 떠나 레드 스타 FC로 팀을 옮겼다.
멜베리는 레드 스타와 FC 소쇼몽벨리아르를 거쳐 1957년에 스웨덴으로 복귀했다. 이는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불안도 영향을 끼쳤다. 멜베리는 AIK에서 1961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2.1.2. 국가대표
멜베리는 1949년 10월 23일에 치러졌던 덴마크전에서 스웨덴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이 시합에서 멜베리는 후반 30분에 2:2로 따라가는 동점골을 넣었지만 스웨덴은 덴마크에 한 골을 더 허용해서 2:3으로 졌다.이후 한동안 멜베리는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지만 AIK에서 1949-50 시즌에 보여준 활약을 바탕으로 1950년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예상대로 멜베리에게는 처음부터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멜베리는 스웨덴의 대회 4번째 경기였던 우루과이전부터 출전기회를 잡았고 마지막 스페인전에서 골을 넣었다. 멜베리의 골을 포함해 스웨덴은 3:1 승리를 거뒀고 3위의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멜베리는 해외 진출 이후 스웨덴 축구 협회의 방침으로 인해 대표팀과 연을 맺지 못하다가 1958년 월드컵에 다시 소집되었다. 1958년 월드컵에서 멜베리는 1950년 월드컵과 반대로 예선 2경기만 뛰었고 스웨덴은 준우승으로 역대 FIFA 월드컵 최고의 성적을 냈다.
멜베리의 마지막 A매치는 스웨덴이 7:1로 대승을 거뒀던 1958년 8월의 핀란드전이었다.
2.2. 이후
멜베리는 클럽 경영진으로 재직했고 여러 사업을 벌였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멜베리는 좋은 기술과 플레이 메이킹 능력, 뛰어난 골 감각과 공중볼 다툼 능력을 가진 포워드였다. 그러나 멜베리는 스피드가 느렸고 팀이 광적으로 공격적인 플레이를 하는 전술을 펼칠 때, 팀의 분위기가 좋지 않을 때에 효용성이 떨어졌다.4. 뒷이야기
- 예전에 올로프 멜베리가 브로르의 친척이라는 글들이 많았지만 현재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 디비지옹 2 득점왕 1회: 1952-53(툴루즈 FC)
[1] 1967년에 해체된 팀으로 현존하는 툴루즈 FC와는 다른 팀이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제노아가 1년간 넣은 골이 46골이었으니 그 두 선수가 넣은 골이 팀 전체 득점의 딱 절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