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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2 19:05:46

뷔로 드라리비에르

파일:뷔로 드라리비에르.png
성명 뷔로 드라리비에르
Bureau de La Rivière
생몰년도 1340년 ~ 1400년 8월 16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라 리비에르
사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아버지 장 드 라리비에르
어머니 이자보 당게랑
형제 장, 마르그리트
배우자 마르그리트 도노
자녀 이자벨, 샤를, 잔, 자크, 페레트
직위 시종관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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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5세, 샤를 6세 치세에 활동한 프랑스 시종관. 샤를 5세와 샤를 6세의 심복이었으나, 샤를 6세가 광기에 걸린 후 왕의 삼촌들에 의해 축출되었다.

2. 생애

1340년경 라 리비에르, 페르체인, 브리농, 샹팔망의 영주였던 장 드라리비에르와 이자보 당게랑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장[1], 마르그리트[2]가 있었다. 그는 종자이자 에스콰이어로서 경력을 시작한 뒤, 형제 장의 뒤를 이어 샤를 5세의 시종관이 되었다. 샤를 5세의 곁에서 왕국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377년 쿠시의 영주와 자르브뤼켄 백작, 브리엔 백작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를 접견해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는 임무를 잘 수행했다. 이때 그는 샤를 5세가소유했던 검은 말을 황제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카를 4세가 프랑스 방문을 마치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돌아갈 때 국경까지 호위했다.

1378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지령을 받아 샤를 5세 독살을 시도한 자크 드 라루와 샤를 5세의 비서였지만 카를로스 2세에게 매수되어 독살 계획에 가담한 피에르 드 테르트르를 심문하기 위해 임명된 위원을 맡아 두 사람을 사형에 처했으며, 1379년 샤를 5세에 반기를 든 브르타뉴 영주들이 세운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브르타뉴로 파견된 프랑스군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또한 1379년 2월 샤를 5세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후안 1세가 체결한 파리 조약에 참여한 위원 중 한 명이었다.

1380년 9월, 왕이 오랜 병환에 시달리다가 보테쉬르마른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땅바닥에 쓰러진 샤를 5세를 처음으로 품에 안고 왕의 임종을 지켜봤다고 한다. 샤를 5세는 1374년 유언장을 작성했을 때 자신의 유언을 집행할 임무를 그에게 맡겼으며, 그가 죽으면 자신 처럼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샤를 5세가 그를 무척 신뢰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샤를 6세를 대신해 정치를 이끈 삼촌들인 루이 1세, 장 드 베리, 호담공 필리프는 그를 정부 장악에 방해되는 인물로 여기고 제거하기로 했다. 그들은 먼저 그를 시종관에서 해임하고 상당한 재산을 압수했다. 이후 생폴 백작 발레랑 3세 드 뤽상부르리니를 부추겨서 그를 잉글랜드군과 공모한 혐의로 고발하게 했다. 하지만 프랑스 무관장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등이 그를 옹호했고, 샤를 6세는 그의 직위와 재산을 복원하도록 했다. 이후 뷔로는 수년 간 샤를 6세에게 국왕 삼촌들의 잘못된 통치에 대한 증거를 비밀리에 제공했다.

1388년, 샤를 6세는 친정을 선포한 뒤 그와 장 르 메르시에, 장 드 몽테규, 올리비에 5세 드 클리송, 피에르 드 빌렌을 중용했다. 그러나 1392년 8월, 샤를 6세가 브르타뉴 원정을 떠났다가 르망에서 광기에 사로잡혀 버렸고, 그의 삼촌들이 섭정을 맡았다. 그 직후, 뷔로와 동지들은 체포된 뒤 6개월간 감옥에 투옥되었다. 샤를 6세는 나중에 회복된 뒤 그들을 풀어주게 했으며, 뷔로가 빼앗겼던 재산을 돌려받게 했다. 1400년 8월 16일에 사망했고, 샤를 5세의 유언에 따라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 ~ 1365, 샤를 5세의 시종관[2] ? ~ 1388, 노트르담 드 주아르 수녀원장, 몽타빌리에 여성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