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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6 16:45:22

북보르네오 연방

파일:1920px-Flag_of_the_North_Borneo_Federation.png

파일:LocationNorthBorneoFederation.png

말레이어: Negara Kesatuan Kalimantan Utara
영어: North Borneo Federation, North Kalimantan

1. 개요2. 상세

1. 개요

북보르네오 연방은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제안된 국가다. 영토는 오늘날 동말레이시아브루나이이며 제안된 정부 형태는 브루나이 술탄국가원수로 둔 입헌군주제일 계획이었다. 수도 또한 연방 수립을 주장하던 주요 세력이 브루나이의 정당인 '브루나이 인민당'이고 브루나이 술탄을 국가원수로 두자 주장했기에 브루나이 시가 유력하게 추정된다.

2. 상세

북보르네오의 통일 및 독립은 전혀 이상한 주장이 아니었다. 북보르네오는 문화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말레이 반도보다는 인도네시아, 특히 인도네시아령 보르네오와 더 비슷했지만 보르네오 나머지는 네덜란드령이었고 독립 후에는 사회주의/민족주의 성향의 수하르토의 독재국가였음으로 자연스럽게 탈식민주의 바람이 불어오던 1950년대와 60년대, 북보르네오의 통일 독립국가 주장이 나타나게 된다.

정치 영역에서 이러난 움직임이 드러난 것 중 하나는 1956년 사라왁, 사바, 브루나이 3개주가 말라야와 같은 통화가 아니라 북보르네오만의 통화를 사용하겠다 주장한 것. 이 계획은 이뤄지지 못하지만 북보르네오 독립국가의 계획은 살아남고 이후에도 제안된다.

브루나이 인민당 당수 셰이크 아자하리 빈 셰이크 마흐무드는 브루나이 술탄을 국가원수로 하여 사라왁과 사바와 통일 국가 수립을 주장했다. 브루나이 인민당은 브루나이의 말레이시아 가입 또한 지지했지만 그 가입은 브루나이가 사라왁과 사바를 통일한 후에 브루나이가 말레이시아의 술탄 중 하나로 가입해 일이 틀어져도 말라야 반도에 저항할 수 있게 된 후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북보르네오의 통일 독립국가 수립은 3개주 주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인구와 경제적 격차를 감안하면 북보르네오 3개주의 말레이시아 가입은 북보르네오에 대한 말라야의 새로운 식민주의적 지배가 될 것이라 여기며 북보르네오 통일 국가는 말레이시아 가입과 대비되는 한가지 대안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 대중의 북보르네오 독립 지지는 1962년 브루나이 선거에서 선거에 부쳐진 모든 의석들을[1] 브루나이 인민당이 싹쓸이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브루나이 술탄이 북보르네오 통일을 거부했다.

브루나이 술탄은 북보르네오만의 통일이 이뤄질 시 그 모습은 브루나이가 석유 수익으로 가난한 사바사라왁을 부양하는 형태가 될 것이라 여겼으며 도시국가 규모의 브루나이가 아닌 북보르네오 전체의 입헌군주가 된다는 것은 이전의 전제군주적 권력을 잃고 사회주의를 비롯한 정치적 불안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 걱정했다.[2]

브루나이 술탄의 북보르네오 연방안 거부와 군대 형성, 의회 소집 연기와 같은 행동은 브루나이 인민당과의 마찰을 일으키기 충분했고 1959년 입헌군주제 개혁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브루나이 인민당의 분노는 62년에 폭발한다. 브루나이 술탄은 인민당과 상의 없이 인민당을 제외한 의원들만 소집하여(=선거로 뽑히지 않은 의원들만 소집하여) 브루나이의 말레이시아 가입을 표결에 부쳐 날치기로 통과시킨다. 그 결과 브루나이 인민당은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되며 북보르네오 연방의 주창자들이 진압되면서 사바와 사라왁 또한 말레이시아에 가입, 북보르네오 연방 계획은 완전히 무산된다.

그리고 1962년 일어난 브루나이 인민당의 반란은 브루나이 술탄이 말레이시아 가입조차 포기하는 결과를 낳아 오늘날 브루나이가 독립을 유지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그리고 북보르네오 연방의 무산 후 사라왁과 사바의 말레이시아 가입은 인도네시아의 반발을 낳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분쟁과 추후 북보르네오 공산반란으로 이어진다. 또한 동말레이시아는 공산당 문제로 말레이시아 연방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 개발이 느려졌고 서말레이시아와 묘한 감정이 남아 있다.


[1] 1959년 이뤄진 브루나이의 입헌군주제 개편은 제한적인 수준의 것이었으며 의석들의 일부는 브루나이 국왕에 의해 임명되었다. 프랑스의 삼부제(귀족+성직자+시민)와 비슷했던 것.[2] 당시에는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도 명백한 사회주의 정당이었으며 실제로 북보르네오 공산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라왁 쪽에서 유전이 개발되기 전이었으며 이전에도 이미 북보르네오에서 통치에 실패하고 사라왁 등을 할양했던 지라 다시 영역이 넓어진들 술탄에게 이득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