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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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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백제역사유적지구
영어 Baekje Historic Areas
프랑스어 Aires historiques de Baekje
국가·위치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5년
등재기준 (ii)[1], (iii)[2]
지정번호 1477

1. 개요2. 관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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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는 1차산업과 더불어 백제문화유적을 기반으로 한 관광산업이 핵심이다. 일각에선 부여 시내를 이탈리아 로마에 비유할 정도로 공사만 하면 유적이 나올 만큼 관광 자원 또한 무궁무진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관광도시이며 충남의 로마라는 말이 무색하게 관광업에 대한 기본 인프라가 거의 구비되어 있지 않다. 20세기 내내 옛 백제 왕성인 부소산성은 읍내 주민들이 바람 쐬며 막걸리 마실 가는 뒷동산 정도였고 고란사나 낙화암까지 가는 길도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관광안내소랄 것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였는데,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3]

과거 충청 권역에서는 초등, 중등생의 당일 현장학습이 곧잘 있어왔으나, 당시 이마저도 인솔교사가 군창(軍倉) 터 등 오래된 안내판을 보고 읽는 수준에 그쳤었다. 그나마 2010년대 전후로 공주와 함께 대백제전 등의 연례행사를 주최하고 있지만, 부여는 전반적으로 유적 권역이 잘 개발되어 있는 상태도 아니고 유적 대부분과 국립박물관이 읍내에 오밀조밀 모여있어서, 관광객들이 문화제나 부대행사를 관람한 뒤 돈을 소비할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 사실상 반나절 코스인 셈.

정림사지는 말 그대로 터만 남았고, 그나마 석탑이 있지만 너무 시내와 가까워서 좀 보기가 그렇다. 궁남지의 경우는 그나마 사극의 포인트 촬영 등으로 알려진 뒤 연못 일대에 연꽃을 심어 포토스팟으로 활용시키고 있지만, 이마저도 입구에 차 대고 걸어서 한 바퀴 돌면 10분이면 충분할 정도다. 이는 오래된 부여군의 행정 병폐와 타고난 문화유산 배치의 결과로, 오죽하면 군민들 사이에서도 "뭐 볼 게 있다고 먼 데를 왔지?"하는 생각을 할 지경이다.

2. 관광지


아래 4곳의 백제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지정됐다.

그밖에 부여의 유명 관광지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백제의 고도가 마케팅의 중심. 큰 돈을 들여 백제문화단지를 짓기도 했고 그 말처럼 이 동네 땅은 개발을 하려고 파다보면 유물이 나와서 개발이 중지되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다 부여읍에는 고도제한도 있어서 일정층 이상 높이(부소산 높이)의 건물은 짓지도 못하는 등, 발전하기 힘든 동네다. 집을 지으려고 토대 공사를 하면 유물이 나와서 보상금 받고 터를 옮겨야 하는 수준. 게다가 부여여자고등학교 아래에서 유적이 발견돼 학교 이전 준비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유적지가 매우 빈약한 것이 문제. 부여 읍내에는 고작해야 정림사지 5층석탑 정도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낙화암을 포함한 부소산성이나 궁남지에서 백제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같은 삼국시대의 고도인 경주와 비교해 봤을 때 매우 빈약한 수준이다.[12]

거기다 토대 공사를 하면 유물이 튀어나온다고도 하지만 도시화 역시 꽤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층교란이 심하다. 실제 부여 문화재연구소 바로 앞의 관북리 백제왕궁터 발굴조사 당시 백제시대 추정 지층 하부에서 언제 공사됐는지도 모르는 콘크리트 기초부가 튀어나오는 기묘한 상황이 나타나기도 했다. 물론 지표면에 건물의 흔적 따위는 없었다. 이러다보니 백제의 고도라고 광고하면서 관광객 유치에 안간힘을 쓰지만 실제 와서 볼 만한 것이 없고 그나마도 하루 정도면 전부 둘러볼 수 있는 만큼, 관광객이 숙박하면서 장기적으로 돈을 쓰게 만들기도 어려운 난감한 상황이다.

하지만 백제문화단지 건립과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로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나성이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부여관광에도 훈풍이 불 여지가 생겼다. 더군다나 부여에 다른 관광자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비록 백제석탑은 아니지만, 보물급 백제계 석탑인 장하리 삼층석탑이나 무량사 오층석탑도 충분한 백제관광 볼거리이고, 백제시대 절터인 군수리사지에선 보물 제32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발굴되었으나 가보면 허허벌판이다. 복원중인 부여 나성과 가림성도 볼만한 백제관련 컨텐츠이다. 백제에서 눈을 돌리면, 웅장한 사찰 무량사가 있고, 발굴중인 송국리 유적과 조선시대 홍산현 관아도 있다. 그리고 꾸준한 발굴성과 덕분에 국립부여박물관의 소장품들도 더욱 훌륭해지고 있으니, 앞으로 예산만 뒷받침 되어준다면 충분히 세계적 관광도시로 도약할 수도 있다.
▲ 복원 중인 부여 나성의 모습.

2013년에 신동엽 생가 옆에 신동엽문학관이 생겼다.[13]

[1] 백제역사유적지구의 고고학 유적과 건축물은 한국과 중국 및 일본의 고대 왕국들 사이에 있었던 상호교류를 통해 이룩된 백제의 건축 기술의 발전과 불교 확산에 대한 증거를 보여준다.[2] 백제역사유적지구에서 볼 수 있는 수도의 입지, 불교 사찰과 고분, 건축학적 특징과 석탑 등은 백제 왕국의 고유한 문화, 종교, 예술미를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이다.[3] 이런 점들은 흥미요소 발굴에 적극적인 경주, 이탈리아 로마와 대번에 대비된다.[4] 그 유명한 백제금동대향로가 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실상 부여박물관의 랜드마크.[5] 근처에 롯데리조트, 롯데아울렛 부여점,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등이 같이 있다.[6] 옛 나루터 일원 및 강변의 구드래조각공원을 포함. 단, 설립된 80년대 당시에는 전국구 규모였던 것이 무색하게 현재는 서울의 아무 근린공원과 견주어도 모자란 수준이고, 나루터 역시 지붕만 겨우 씌운 수준인 소형 유람선 몇 척만 운영 중.[7] 차라리 백제대교 건설 전인 6,70년대 활발하던 나루터 수준이라도 재현해 놓으면 어떨까 싶지만, 이후 수십년간 엄청나게 불어난 토사 침전토양 탓에 복원식 개발 자체가 어렵다. 어느날 구교리 최심부 민가들이 헐리더니 내내 자갈밭 허허벌판이 되어 있는데, 군청에서 개발 목적으로 수용/매입하였다가 흐지부지된 결과물이다.[8] 부여군 농산물 공동 브랜드 '굿뜨래'의 언어적 영감이 된 곳.[9] 구드래나루터와 함께 백마강 이서 지역의 운수를 책임지던 옛 규암나루터 부근에 위치. 단, 수북정은 백제와 관련 없는 후대에 세워진 것이며 자온대(自溫臺)의 실제 위치가 맞는 지조차 학계의 의견이 분분한 상황.[10] 부여군 최서단 충화면에 위치. 때문에 서천 한산을 통해 찾아가는 게 더 편한 지경이다. 실제로 촬영 당시 SBS 제작진들도 서울-서천을 경유해 오갔고, 한산면 식당들엔 저마다 당시 출연진의 싸인이 걸렸었다... 너무 외따란 곳에, 더욱이 소규모로 조성된 터라 후속 작품 제작에 이용될 일도 없었으며, 사후관리 및 개보수조차 똑바로 이뤄지지 않는 실정.[11] 과거, 부여의 유일한 길목이었던 옛 4번 국도 부여 초입에 있다. 사비대교 건립으로 부여읍내를 우회하는 도로가 새로 난 탓에 외지인이라면 전적기념비의 존재 자체를 아주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12] 사실 경주는 건국부터 멸망까지 천 년 동안 수도였고 사비는 성왕부터 멸망까지 100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수도였다. 같은 옛 수도라고 해도 백제는 수도를 여러 번 옮겼고 기간 차이가 커서 남아있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비교적 평화롭게 망해 문화재 파괴가 덜했던 신라와 달리 백제는 물리적 공격을 받아 멸망한데다 신라왕릉과 달리 백제왕릉은 도굴도 쉬워서 남아있는게 10분의 1도 안된다. 더욱이 경주는 통일 이후에도 300년 가까이 통일 신라의 수도였고 고려 건국 이후에도 효심-김사미의 난 이전까지 고려의 3경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웃한 공주가 그나마 부여보다는 사정이 나은 것도 이후 웅주-충청도의 중심지로 도시가 어느정도 유지가 되었고 대표 유적지인 공산성 정도는 계속 관리가 되었기 때문이다.[13] 사반세기 넘도록 향토인물 신동엽 시인의 기념사업이라곤 경찰서 옆 오솔길에 시비 하나 세운 게 전부였던 것과 비교하자면 격세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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