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지 전경 |
암반에 조성된 옛 묘지 유적 |
1. 개요
페르시아어, 아랍어: بندر سیراف / بندر طاهری영어: Bandar Siraf / Bandar Taheri
이란 남부 부셰르 주의 도시. 부셰르에서 동남쪽으로 150km, 젬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 7천의 소읍이지만, 중세 초엽 페르시아 만의 최대 항구 중 하나로써 해상 실크로드 연구에 있어 항상 언급되는 도시이다. 수세기간 번영하던 시라프는 수차례에 걸친 대지진과 해일, 해적질을 겪으며 쇠퇴하였다. 특히 기존 항만 일대는 점차 바다 속에 잠겨버렸다. 지금까지도 수중 발굴을 통해 과거의 부두나 선박, 행정 건물 유구가 발견되고 있다. 과거에 타헤리, 칸간, 다예르의 세 항구를 관할하던 시라프는 현재 옛 관할지이던 반다르칸간에 예속되어 있다.중세 시기 시라프는 타히리 혹은 타헤리로 불렸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본래 시라프의 주민은 대부분 유대인 상인이었는데, 이슬람 정복 후 아랍 무슬림들은 이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후 '불결한 유대인들을 정화'시켰다는 의미로 아랍어로 순수함인 타히르 (طاهر)의 변형인 타히리라 명명했다 한다. 그러다 2008년 사산 제국기 지명에 반다르 (항구)를 더한 반다르시라프로 환원되었다.[1] 시내에는 옛 유적이 다수 남아있다. 근래 들어 서쪽 5km 지점에 거대한 석유 화학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2017년 한국의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이 시라프 정유공장 건설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2. 역사
파르티아 시대에 세워진 도시로, 최소 서기 185년부터 남중국과 교역이 있었다 한다.[2] 4세기 중반 사산 제국의 샤한샤 샤푸르 2세가 성채를 세웠고, 5-6세기부터 인도와 중국 선박들이 종종 왕래할 정도로 일찍부터 국제항으로 번영하였다. 그중에서도 남중국 (광저우) 및 서인도 (구자라트)와 많은 교류가 있었고, 중국 & 인도 뿐만 아니라 동아프리카의 상아나 아프간산 청금석 등도 발견되어 다방면의 무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고대 이란의 해상 교역, 특히 아시아 방면 교역은 대부분 시라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영하던 도시는 7세기 들어 격화된 로마-페르시아 전쟁으로 동서 무역로가 페르시아 만 (걸프)에서 홍해-히자즈로 이전되자 쇠퇴하였다.[3]2.1. 압바스 왕조기의 번영
옛 자메 마스지드 (금요 사원)
이슬람 정복 후에도 시라프는 쇠락한 채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2세기가 흐른 후 이라크를 중심으로 삼은 압바스 왕조는 다시 페르시아 만 교역로를 활성화시켰고, 9세기 들어 동서 교역이 활발해지며[4] 시라프는 대대적으로 시가지가 확장되는 등 재차 번영하였다. 당시 세워진 건물들 중 금요 (회중) 모스크는 이란의 초기 대규모 모스크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중정을 갖춘 사각 형태로 지어진 모스크는 키블라 반대편인 동쪽에 문을 갖추었고, 9세기 초엽에 세워진 후 850년에 증축을 거쳤다. 당시 시내의 모스크들은 모두 외부에 돌출된 미흐랍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외에 부유한 거상들의 화려한 저택들도 지어졌다. 850년경 이븐 알 파이크는 시라프의 상선들이 인도를 왕래한다 기록하였고, 신라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상인 술레이만은 바스라에서 출항한 무역선들이 시라프 - 무스카트 (오만) - 콜람 (인도) 경유하여 중국으로 향하였다고 기록하였다.
900년경 시라프 출신 상인 아부 자이드 하산은 시라프의 상선들이 홍해의 제다와 스와힐리의 잔지바르에 왕래하며, 대중 교역은 878년 (황소의 난에 의한) 광저우 학살 후 감소했다고 기록하였다. 전성기 시절 시라프는 이란측 페르시아 만의 최대 도시였고, 인도 & 중국 & 동아프리카와의 교역 중심지였다. 10세기의 저서 '세계의 경계'에서 시라프는 상인들의 거처이자 파르스의 상점이라 소개되었다. 후대의 작가 이븐 알 발키는 10세기 초중엽 기준 매년 시라프에서 매매되는 물품의 가치는 253만 디나르라 기록하였다. 10세기 중엽 알 이스타크리는 아르다시르-카와라 (파르스 서부)에서 시라프는 쉬라즈에 견주는 제2의 도시라 기록하였다. 당시 시라프에서는 상아, 흑단, 백단향, 용연향, 대나무, 향신료, 종이, 알로에, 장뇌, (가나베 산) 진주 등의 외래 물품과 현지에서 생산된 리넨 냅킨과 히잡 등의 다양한 상품이 다양한 국적의 상인들에게 거래되었다.
시라프 주민들은 외국 상인들을 환대하기로 유명했다. 일례로 인도의 서찰루키아 왕조에서 상단이 올때마다 시라프의 상인들은 연회를 열어주었고, 접대 전용의 접시까지 구비해두었다. 대규모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시라프의 거상과 선장들은 동아프리카산 티크 목재와 구운 벽돌로 화려한 다층 저택을 지었다. 당시 소문에 의하면 가장 화려한 저택의 경우 건설에 3만 디나르가 들었다고 한다. 당시 압바스 칼리파의 한해 예산이 150만 디나르였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5] 10세기 후반의 보수 학자 알 마크디시는 시라프가 간음, 고리대금, 사치가 만연한 타락의 온상이라 여겼고, 977년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자 '신의 합당한 징벌'이라 여겼다. 번영하며 인구가 늘었지만 시라프는 작은 카나트 (지하 수로) 외에는 식수원이 없었고, 적당한 농경지도 없어 배후의 젬에서 식량과 물을 보급받아야 했다.[6] 시라프는 970년대 연이은 지진과 해일로 인해 주민들이 떠나며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2.2. 중세 후반의 쇠퇴
근대 시기의 나수리 성채와 바드기르 겸 감시탑
이븐 알 발키에 의하면 11세기 중반 부와이 왕조가 붕괴되고 셀주크 제국이 흥기하는 과도기에 키쉬 섬의 해적들이 시라프 상선들을 공격했다 한다. 그 결과 페르시아 만을 지나는 상선들은 점차 시라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바스라 행을 택하게 되었다. 11세기에는 시라프 뿐만 아니라 인근 가나베, 타와즈, 시니즈, 마루반 등의 항구들도 함께 쇠퇴하였다. 비록 12세기 초엽 시라프 상인 아불 카심 라미슈트가 여전히 대중 무역으로 부를 쌓는 등 예외적인 면도 있었지만, 셀주크 제국의 붕괴와 함께 완전히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13세기 초엽의 지리가 야쿠트 알 하마위는 시라프에 대해, 폐허가 된 건물 사이로 '비참한 사람들'이 사는 작은 도시로 묘사하였다. 당시 도시는 (옛 지명인) 시라프가 왜곡된 쉴라브로도 불렸다. 비록 쇠퇴하긴 했지만 사파비 왕조기에도 시라프는 여전히 아라비아 반도의 카티프 등지로 향하는 라레스탄 지역의 외항으로 남았고, 이븐 바투타 역시 지명을 기록하였다.
152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안토니우 텐레이루가 시라프를 방문, 지명을 '췰라엉'이라 기록하였고 1590년에는 이탈리아의 상인 가스파로 발비 역시 방문하여 실라우라 기록하였다. 다만 그들 역시 작은 항구 도시라는 묘사에는 변함이 없었다. 1812년 영국 외교관 제임스 모리어는 타헤리 유적을 방문하여 기록을 남겼고, 여행가 브룩스가 뒤따랐지만 중세 이슬람권이 아닌 포르투갈 유적이라 여겼다. 그러다 1835년 방문한 영국 해군 장교 켐프손이 옛 시라프라 규명하였다. 1933년 시라프를 방문한 헝가리-영국인 탐험가 아우렐 스타인은 해변을 따라 400m 가량 늘어선, 부벽이 더해져 육중한 해안 성벽에 대해 기록을 남겼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1960-70년대 영국 고고학자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가 유적을 발굴하였고, 유물들은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대의 시라프는 작은 해안 도시지만, 서쪽 10km 길이에 달하는 해안에 석유 화학 단지가 조성되며 부흥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1] 다만 대부분의 경우 시라프로 통용되어 본 문서에도 적용하였다[2] https://en.unesco.org/silkroad/silk-road-themes/underwater-heritage/siraf[3] 그 반대 급부로 번영하게 된 히자즈에서는 급격한 사회 변화와 빈부 격차의 부조리로 이를 개혁하기 위한 움직임의 일환으로 이슬람이 탄생하였다.[4] 현지 전승에 따르면 801년부터 대중 무역이 재개되었다 한다[5] 현재 가치로 치면 110조에 달하는 금액인 것이다[6] 또한 알 마크디시는 10세기 후반 부와이 왕조의 흥기 후 주민 다수가 오만으로 이주하며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했지만 증거는 없다